아내 당연하죠. 여자들은 모두 고질적인 피해망상 환자들이에요.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요. X에 X를 곱하면 트리플X가 되는 것처럼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니죠. 다들 고칠 수 없는 정신병에 걸렸어요.
손님 치료받아야겠군요.
아내 물론이죠. 하지만 치료는 남자들이 받아야 해요.
손님 정신병에 걸린 건 여자들인데 왜 남자들이 치료를 받아야 하죠?
아내 남자들이 바로 여자들의 무의식이거든요.
손님 그럼 남자들의 무의식은 여자들인가요?
아내 아뇨. 그들의 엄마들이죠.
손님 그럼 엄마들의 무의식은요?
아내 엄마들에게 무의식이 있나요? 짐승들에게 무의식이 없는 것처럼요. 엄마는 그저 남자와 교미해서 남자를 배고 남자를 낳을 뿐이에요. 그렇게 무의식인 엄마는 전의식인 남자를 길들이고, 전의식인 남자는 의식인 여자를 길들이고, 의식인 여자는 다시 새끼를 싸지르죠.
남편 아니,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아내 당신 방금 나를 여자로 길들이려고 했지?
남편 뭐? 내가? 내가 언제?
아내 여자들의 선천적인 힘이라느니, 부드러운 연민과 섬세한 공감 능력이라느니, 생명을 잉태하고 지키고 키워내는 고결한 모성이라느니 따위를 들먹이며 내 무의식 행세를 하려고 했지.
남편 나는 여자를 칭찬한 거야.
손님 칭찬은 누군가를 길들이는 가장 좋은 방법이죠.
아내 당신은 일단 나를 여자로 길들인 다음, 그 여자를 다시 채식주의자로 길들이려고 했어. 이게 바로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하는 짓이지. 길들이기 위해 길들이는 것.
남편 아니, 잠깐, 이런 씨팔. 정말 듣자 듣자 하니 너무하는 군, (무대 앞쪽으로 나와서 여자 관객들을 바라보며 열변을 토한다) 언제나 이 잡듯이 말 꼬리 하나하나를 잡으려 하고, 순수하고 우호적인 표현에도 먹칠을 하고, 모든 용어의 이념적 기원을 추적하고, 희석된 일상까지 극단적으로 난도질해서 도덕적 우위를 점유하려고 해, 남자가 여자를 길들이려 한다고? 그러는 여자들은 남자를 길들이려고 하지 않나? 남자다움에 대해 공공연히 떠들어대면서 뒷구멍으로는 가혹하게 점수를 매기지 않느냔 말이야, 전쟁이 나면 남자가 앞장서서 나라를 지켜야 하고, 사고가 나면 여성과 아이부터 구조되어야 하고, 걸핏하면 남자의 기사도 정신이니 매너니 책임을 운운하고, 남자다움을 부추기면서 동시에 조롱하지, 남자와 여자는 절대 평등해야 한다고 방방 뛰다가도 평등한 손해 앞에서는 돌연 여자의 다름 뒤로 나자빠지고, 자신의 세대가 아니라 자기 엄마 세대에게 감정을 이입하면서 역차별을 누리기 위해 진정한 남녀평등을 방해하고 있는 건 남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여자들이 아닌가, ‘인간’과 ‘여자’ 중에서 그 때 그 때 자신의 유불리에 따라 취사선택하고, 자신의 나약함과 비겁함을 무슨 정언 명령처럼 남탓으로 돌리고, 다른 여자의 유리벽으로 뻔뻔하게 자신의 한계와 무능까지 정당화하고, 지난 만년 동안의 여성 차별에 대한 손해배상을 지금 남자들에게 이자까지 쳐서 한꺼번에 요구하지. 남자들에게 여자의 외모만 본다고 욕하면서 남자의 경제력은 현실이라고 큰소리치니, 오히려 진짜 정통 보수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란 말이야, 일방적으로 남자에게만 국방의 의무를 강요할 거면 여자에게는 출산의 의무라도 있어야 하는 건데 그럴 땐 또 여자의 몸은 자신만의 것이라고 떨쳐 일어나고, 여자도 안경 쓸 자유가 있다고 하면서 안경 밑에 화장은 점점 더 진해지고, 가슴과 허벅지를 보란듯이 훤히 드러내고는 쳐다보면 시선강간 운운하지를 않나, 징징거림과 자기주장을 구별하지도 못하고, 요구사항은 많고 고마움은 적고, 눈치나 염치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없고, 남자가 여자 때리면 여자 때리는 개새끼, 여자가 남자 때리면 여자한테 맞는 개새끼…….
손님 저기, 조심 하세요. 위험 수위를 넘고 있어요.
남편 잠깐 좀 있어봐요. 나도 할 말이 많다구요. 그 동안 쌓인 게 많아요. 밤새도록 할 수도 있어요.
손님 이건 여성 혐오에요.
남편 쳇, 그래서요?
손님 여성 혐오는 불법이에요.
남편 이런 젠장.
아내 세상에, 이제 보니 자기도 어쩔 수 없는 남자구나, (무대 앞쪽으로 나와서 남자 관객들을 바라보며) 예전부터 정말 궁금했는데 남자들은 모두 바보인 거야, 아니면 바보인 척 하는 거야? 왜 뻔히 알면서도 시치미를 뚝 떼고 모른 척 하지? 마치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박박 우기다가 스스로도 정말 믿어버리고야마는 어린애들처럼 말이야, 이제 더 이상 여성차별은 없다고? 오히려 남자들이 역차별의 피해자라고? 왜 걸핏하면 선량한 남자들까지 모두 잠재적인 범죄자 취급 하느냐고? 하하,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나이부터 음담패설로 우정을 쌓고, 여자 비하를 주춧돌 삼아 서로의 자존감을 구축하고, 남자 자체가 바로 자격이 되는 남자들만의 카르텔을 여자들이 모르는 줄 알아? 성애화 시키지 않고는 여자를 쳐다보지도 못하는 주제에 여자 신체 부위나 품평하며 히히덕거리고, 박는 것과 받는 것의 행위를 자연법적인 권력 관계로 간편하게 치환하고, 수백 수천만의 성범죄를 몇 몇의 무고죄로 싸잡아 퉁치려 하고, 노동 착취에는 광분하면서 성착취에는 관대하고, 성매매의 순기능을 지성적으로 신봉하고, 여자의 육체적 약함을 정신적인 비겁함으로 간주하지, 하체부터 껄떡거리는 속물들인 주제에 짐짓 남자들의 집단 지성을 추종하고, 남자만이 지성과 야만을 모두 독점할 능력이 있다고 자신하고, 틈만 나면 껌 씹듯이 포르노를 보면서 최소한의 수치심마저 마비되었지, 내심 임신을 미개한 신체 기능이라고 생각하고, 육아란 비인격적이고 비지성적이라고 믿으면서도,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짐짓 모성을 추켜세우며 정형화하잖아, 유치하고 졸렬한 방종에 의미 부여는 산더미 같고, 인정받기를 갈구하면서 공감하는 데는 비루하고, 거들먹거릴 기회만 엿보면서도 만성적인 열등감에 빠져있고, 긴장을 숨기려고 분노하고, 약육강식의 계보 속에 있어야만 비로소 안심하고, 비굴함의 매뉴얼을 작성하고, 여자를 깔보려고 콘돔을 거부하고, 막상 원치 않는 아이가 생기면 세상 그 어떤 여자보다 열성 페미니스트가 되어서는 여성의 독립과 낙태의 권리를 옹호하면서…….
남편 (손님에게) 아니, 잠깐, 잠깐만요. 이건 남성 혐오 아닙니까?
손님 맞습니다.
남편 그런데 왜 경고하지 않는 거죠?
손님 남성 혐오는 불법이 아니거든요.
남편 이런 젠장.
남편과 아내가 각자 돌아서서 혼잣말로 떠들어댄다.
남편/아내 (서로 대사가 도돌이표처럼 어긋나면서 소음을 만들어 낸다. 여러 번 반복하거나 새로운 대사를 추가해도 좋다.) 모든 게 틀렸어. 하나 같이 부당해. 이해할 수가 없어. 견딜 수가 없어. 이렇게 살 수는 없어. 대체 어떻게 남자와 여자가 부부가 되었을까. 결혼은 법으로 금지되어야만 해.
손님 흐음, 정말 클래식하네요. 고전적이에요. 자고로 남자와 여자는 자살률이나, 공항부지 선정이나, 연금법에 대해 토론하다가도 결국에는 남녀 문제로 치고받으며 싸우기 마련이죠. 보통 논의는 가장 작은 것에서부터 가장 큰 것으로 귀결되기 마련인데, 남녀 문제는 가장 큰 것에서부터 가장 작은 것으로 귀결된다니까요. 결국 서로의 사타구니에 코를 처박을 때까지 말입니다. 남녀간의 싸움은 너무나 구질구질하고 난잡해서 도저히 철학적으로나 미학적으로 승화시킬 수가 없어요. 연극으로는 더더욱 안되죠. 민주주의요? 아예 성기가 달리지 않은 아이들이 태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겁니다.
아내와 남편은 서로를 마주보며 침묵한다.
손님 어이구, 이거 참, 어느새 시간이 다 되었네요. 벌써 창밖이 희미하게 밝아옵니다. 정말 소란스러운 밤이었죠? 우리가 기대했던 소란은 아니었지만요. 아주 시끌벅적했어요. 사실 무슨 얘기를 했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습니다. 해야 할 얘기들과 하지 말아야 할 얘기들이 산더미처럼 쏟아져 나왔죠. 하지만 거짓말은 없었어요. 그럼요. 거짓말은 없었습니다. 거짓말을 한 사람은 있었을지 모르지만 장담컨대 거짓말은 없었어요.
아내와 남편은 서로를 마주보며 침묵한다.
손님 이제 우리 모두는 당분간 침묵할 필요가 있어요. 생각을 정리하고, 논리를 보수하고, 전열을 가다듬어야죠. 서두를 필요 없습니다. 하나같이 중요한 문제들이고, 하나같이 오래된 문제들이고, 하나같이 상스러운 문제들이니까요. 어쩌면 몇 주, 몇 달, 몇 년, 아니 평생이 걸릴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 사이에 새로운 문제들이 튀어나오겠죠. 그럼 우리는 이전의 쟁점들은 다 내팽개친 채 또다시 토론하고, 또다시 반박하고, 또다시 재반박을 하다가 얼떨떨해지고 말겁니다. 그리고는 또다시 침묵하게 될 거예요. 아휴, 대체 언제쯤 사는 것처럼 살아볼 수 있을까요. 아무 결론도 내지 않고, 토론이나 말싸움 없이, 그저 거리낌 없이 남의 일처럼 방관할 수 있을까요. 뻔히 알면서도 어리석은 소리를 지껄이고, 다른 누군가를 설득하려고 바둥거리고, 나 자신의 결백을 의심하고, 증거와 알리바이를 조작하다가, 결국 스스로에게 유죄를 선포해야 한다는 건 참으로 고달픈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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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남편은 서로를 마주보며 침묵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