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은 천천히 한 발씩 손님에게 다가간다. 그들은 손님을 바라보며 손님의 주변을 빙 돈다.
아내 무고하지 않은 동물의 고기.
남편 죄의식에 오염되지 않은 고기.
아내 고기로 태어나지 않은 고기.
남편 고기로 죽지 않는 고기.
남편 고기로 불리지 않는 고기.
남편 이름이 없는 고기.
아내 고기가 아닌 고기.
남편 그러니 채식주의자도 먹을 수 있지.
아내 여전히 그 누구보다 채식주의자일 걸.
남편 그럼 당신도 이걸 먹겠다는 거야? 소고기처럼? 돼지고기처럼? 닭고기처럼?
아내 아니. 난 그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어. 난 우리가 모든 걸 함께 하기를 원해. 난 우리가 완전히 같아지기를 원해. 난 우리의 사랑이 완벽하길 원해. 그러니까....
남편 그러니까?
아내 나도 당신과 함께 채식주의자가 되겠어.
남편 (놀라며) 자기야, 그게 정말이야?
아내 우리는 함께 같은 식사를 차리고, 함께 같은 음식을 먹고, 함께 같은 맛을 느낄 거야. 그리고 나서 함께 침대에서 사랑을 나눌 거야.
남편 우리는 한 쌍의 코끼리가 되는 거군.
아내와 남편은 서로 손을 맞잡고 웃는다.
손님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며) 어어, 그러니까, 처음부터, 제가 그랬잖아요. 세상에는 모르는 단어들이 너무 많다고. 다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뻔하다고 생각했는데, 별안간 단어들이 안색을 싹 바꾸더니, 점점 멀리 달아나버려서, 그러니까 제가 지금 그것들을 잡으러 가야하는데, 그러니까 실례지만 저는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아서…….
남편과 아내가 출입문 쪽으로 도망가는 손님에게 달려든다. 남편, 아내, 손님, 빅토리아가 뒤섞여서 피카소의 ‘게르니카’같은 장면이 연출된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남편과 아내는 손님을 의자에 앉혀놓고 손과 발을 묶고 있다.
손님 저기, 저기요, 잠깐, 잠깐만요. 잘 생각해보니까, 저도 여러분 같은 채식주의자가 되고 싶어요. 네, 저도 여러분처럼 코끼리가 될래요. 가장 아름답고, 가장 강하고, 가장 부조리한 초식 동물. 코끼리는 평화롭게 나무 이파리를 뜯어 먹으면서 나무 위 둥지 속의 새끼 새들까지 씹어 삼키죠. 그걸 누가 탓할 수 있겠어요? 그래요, 우리 다 함께 동물들을 사냥하러 가요. 무고하지 않은 동물의 고기, 죄의식에 오염되지 않은 고기, 고기로 태어나지 않은 고기, 고기로 죽지 않는 고기, 고기로 불리지 않는 고기, 이름이 없는 고기, 고기가 아닌 고기를 위해서 말이에요. 네, 그래요, 제가 미끼가 될게요. 제가 노래를 불러서 덫을 놓을게요. 그렇게 동물들을 이곳으로 끌어들일게요. 그럼 여러분은 쉽게 고기를 수확할 수 있을 거예요. 크고 날카로운 낫으로 보리의 줄기를 쓱쓱 베어내듯이 말이에요. 보리가 고기로 만든 비료를 먹고 자란다는 사실을 알고 계세요? 그걸 누가 탓할 수 있겠어요? 그래요, 그렇게 우리 함께 같은 식사를 차리고, 함께 같은 음식을 먹고, 함께 같은 맛을 느껴요. 그리고나서 함께 침대에서 사랑을 나눠요. 원래 우리가 오늘밤 하려고 했던 것처럼요. 네? 우리, 우리, 우리 그렇게 해요.
손님을 단단히 묶은 남편과 아내가 손을 털며 몸을 일으킨다.
손님 (울음을 터트리며) 제발 저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제발 저를 무고한 짐승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제발 저를 빅토리아처럼 대해주세요. 저를 귀염둥이라고 부르고, 저에게 장난감을 주고, 저에게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혀 주세요. 제발 저를 사랑해 주세요. 야옹. 야옹. 야옹.
남편이 갑자기 손을 치켜 들고 손님의 얼굴을 사정없이 후려친다. 순식간에 무대는 쥐죽은 듯 조용해진다.
남편 우리를 바보 취급하는 군.
아내 연극이 끝나면 관객은 언제나 배우들을 바보취급하지.
남편 자신들의 연기가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거든.
아내 자신은 언제까지나 관객일 수 있다고 믿는거야.
손님이 웃음을 터트린다.
아내 아우, 배고파. 그러고 보니 우리 어제 저녁부터 아무 것도 못 먹었네.
남편 맞아. 정말 허기진다. 그럼 우리 뭘 해서 먹을까?
아내 찹 스테이크 어때? 양파와 피망을 잔뜩 넣어서.
남편 불고기 부추 덮밥도 괜찮을 것 같은데.
아내 알배추랑 같이 샤브샤브를 끓여도 좋고.
남편 묵은지 김치찌개를 끓여도 되지.
아내 토마토 스테이크 샌드위치도 괜찮고.
남편 양배추를 넣은 매콤한 두루치기는 어떨까.
아내 그냥 담백하게 수육도 좋을 것 같아.
남편 자아, 그럼 시작해 볼까?
아내 아, 그런데 연장이 좀 있어야 되겠어. 근육을 가르고, 뼈를 분리하고, 내장을 긁어내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거든.
남편 그래? 집에 딱히 적당한 연장이 없는데.
아내 그럼 어떻게 하지?
남편 걱정 마. 사거리에 있는 정육점에서 빌려오면 돼. 사장이랑 친분이 있으니까 문제없을 거야. 지금쯤이면 문을 열었을 걸. 내가 얼른 갔다 올게.
아내 그럼 같이 가자. 오다가 시장에 들려서 장도 봐오고. 이런 날에는 좋은 술도 한 잔 해야지. 우리가 함께 채식주의자가 된 걸 기념해서 말이야.
남편 좋아, 그렇게 하자.
그들은 옷을 차려입고 집을 나서며 다정하게 대화한다.
아내 자기야, 빅토리아에게도 앞으로는 고기 대신 이걸 주면 어떨까?
남편 와, 그럼 빅토리아도 채식주의자가 되는 거야?
아내 그렇지. 세계 최초의 채식주의묘가 되는 거지.
남편 그럼 우리는 채식주의 가족이 되는 거네?
아내 맞아, 진정한 하나의 종이 되는 거야.
남편 정말이지 꿈만 같아.
아내 사랑하는 가족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는 평범한 일상이야말로 진짜 행복이지.
남편 그래. 이게 바로 사는 맛이야.
두 사람은 소리 내어 웃으며 밖으로 사라진다.
그들이 사라지자 손님은 미친 듯이 묶인 줄을 풀려고 애쓴다. 그러나 줄은 풀리지 않고 손님은 기진맥진하며 절망한다. 그 때 빅토리아의 가방에서 손님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한다. 벨소리는 ‘헤드 윅 - Angry Inch’. 빅토리아가 핸드폰을 가방에서 꺼내서 가지고 논다.
손님 (절박하게) 빅토리아-. 빅토리아-. 아구구, 우리 아기. 우리 빅토리아처럼 착하고 귀여운 고양이는 세상에 없을 거야. 우리 귀염둥이, 요 새침데기, 깜찍한 공주님. 이리 와. 이리 좀 와봐요. 저런, 하루 종일 혼자 있었지요. (관객들을 둘러보며) 아무도 없었지요. 텅 빈, 이곳에서, 홀로. 뭘 하고 있었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니. 무슨 꿈을 꾸었니. 난 알 수가 없구나. 미안해, 빅토리아. 정말 미안해. 나를 이해해 줘. 나를 불쌍히 여겨줘. 그리고 제발 나를 용서해다오.
빅토리아가 핸드폰을 무대 옆으로 던져버린다. 그러자 손발이 묶인 손님이 의자에서 펄쩍 뛰어내려 핸드폰을 향해 꿈틀거리며 기어간다. 그리고 ‘Angry Inch’가 울려 퍼지는 핸드폰을 작동시키기 위해 입과 혀로 처절하게 노력한다. 그 사이 빅토리아는 손님이 앉아있던 자리 위로 뛰어 올라가 탁자 위에 놓여있는 치킨을 집어 들고 뜯어 먹기 시작한다. (그동안 손님은 내내 핸드폰을 붙잡고 절박하고 무의미한 행위를 계속하고 있다) 한 마리를 다 먹고 나서 나머지 한 마리도 집어 올리던 빅토리아는 문득 통닭의 양 날개를 두 손으로 잡고 공중에 펼쳐서 퍼덕이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빅토리아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 - 춤을춰요, 에스메랄다)
많은 세월이 흐른 뒤 그들을 찾겠지
끌어안은 채 썩어간 두 사람의 뼈를
슬픈 콰지모도 그가 에스메랄다를 얼마나
애타게 사랑했는지 저주받은 그 영혼이
어떻게 사랑했는지
나의 피와 살을 뜯거라 어둠의 독수리여
시간과 죽음을 넘어 하나가 되도록
고통스런 내 영혼이 이 땅을 떠날 수 있게
간절한 나의 사랑이 저 하늘에 닿을 수 있게
저 하늘에 닿을 수 있게
춤 춰요 에스메랄다
노래해요 에스메랄다
조금만 더 날 위해
죽도록 그댈 사랑해
춤 춰요 에스메랄다
노래해요 에스메랄다
함께 갈 수 있다면
죽음도 두렵지 않아
춤을 춰요 에스메랄다
노래 해요 에스메랄다
내 품에서 잘자요
죽도록 그댈 사랑해
춤을 춰요 에스메랄다
노래해요 에스메랄다
저 세상 그 끝까지
죽음도 두렵지 않아
춤을 춰요 에스메랄다
노래해요 에스메랄다
함께 갈 수 있다면
죽음도 두렵지 않아
막이 내린다.
‘팬텀 오브 오페라’를 배경 음악으로 연기자들이 무대 인사를 마친 뒤, 무대 벽에 극장 근처 치킨집들을 소개하는 안내 영상이 나온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