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은 아침 일찍부터 비가 내렸다. 하늘은 온통 두터운 먹구름에 뒤덮였고 거리에는 흠뻑 젖은 청회색 그림자가 무겁게 드리워졌다. 현태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마자 창문 앞으로 다가갔다. 아스팔트가 새까맣게 번들거리고 있을 뿐 별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이로서 고양이가 마지막으로 죽은 지 열흘이 지나고 있었다. 이정도면 성적이 꽤 좋은 편이었다. 어쩌면 14일이라는 최고 기록이 이번에 깨질지도 모른다.
그는 물방울을 닦아 내기 위해 손바닥으로 유리창을 문질렀다. 그러나 젖어있는 건 유리창의 반대쪽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실소를 지으며 슬그머니 손을 내려놓았다. 비가 오는 날은 머리가 더 멍해지는 것 같았다. 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줄기와 뭉개지는 풍경들을 현태는 멀뚱히 바라보며 한참이나 서 있었다. 그는 비 오는 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떨어지는 비와 함께 기분마저 축축한 바닥으로 스며드는 것 같았다. 거기다 비가 오면 꽃집에는 손님이 뚝 끊기기 마련이었다. 우리나라가 사우디나 카이로처럼 비가 드문 나라였다면 벌써 근사한 외제차 한 대는 뽑았을 거라고 현태는 종종 수철에게 농담하곤 했다.
그는 느릿느릿 준비를 마치고는 평소보다 30분 늦게 집을 나섰다. 운전을 하며 골목길을 지나다 보니 '미스터 토스트' 주인이 일손을 놓고 연두색 차양 끝까지 나와 어두운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비 오는 날 장사가 안되는 건 꽃집만이 아니었다. 우산 장수와 빈대떡 가게 주인을 제외한 모두에게 오늘은 한가하고 우울한 하루가 될 것이다. 거기다 시원한 여름비도 아닌 얼음장 서린 이른 봄비를 달가워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현태는 이대로 차를 돌려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비 오는 날은 다른 건 몰라도 낮잠 자기에는 더 없이 좋지 않은가. 사근사근 떨어지는 빗소리와 어두운 무채색 그림자에 잠겨 잠들어 본지가 까마득했다. 아니,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게 아니라, 자신이 정말 단 한 번이라도 그렇게 자 본적이 있었던가? 사실 따지고 보면 당장 낮잠을 자러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자신이 사장이니 뭐라고 할 사람도 없을 뿐더러, 손해라고 해보았자 고작 하루 매상을 포기하는 것뿐이었다. 자신의 인건비를 계산하면 오히려 손해일 게 뻔한 오늘 하루의 매상을 말이다. 하지만 그는 그럴 수가 없었다. 날씨는 오늘 비바람이 치다가도 내일이면 다시 감쪽같이 맑아지지만, 사람은 계속 미끄러져내리는 가파른 오르막 길을 오르고 있는 것처럼 한 발 뒤로 물러서면 다시 앞으로 한 발 옮기기가 쉽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그 한 발자국 만큼 영원히 뒤로 밀려날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는 목적지를 딱 한 발자국 앞에 두고 영원히 쓰러질지도 모른다. 그 목적지가 어디인지 모르기에 그것은 더욱 초조한 불안이었다.
비 오는 날 꽃집 안에서는 야채 데치는 냄새가 더 심해졌다. 각설탕처럼 천정이며 벽에 다닥다닥 붙어있던 습기가 당장 실내에도 비를 뿌릴 것만 같았다. 이럴 땐 책상에 엎드려 조는 것마저도 쉽지 않았고, 설사 깜빡 잠든다 해도 지독하게 불쾌한 기분으로 깨어나기 십상이었다. 오늘은 수철마저 그의 가게로 건너오지 않았기 때문에 현태는 우두커니 혼자 앉아 뿌연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딱히 할 일도 없었고, 딱히 무언가 할 마음도 없었다. 그는 내리는 빗소리를 따라 자신의 불분명한 기분 속으로 뭉근하게 잠겨들었다. 어째서 사람은 아무 이유도 없이 이토록 우울해지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그를 더욱 울적하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이 미끌미끌하고 물컹하지만 또한 단단하기도 한 고무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앞도 뒤도 없고, 안도 바깥도 없고, 부드럽고 촉촉한 속살도 없는, 어찌 해 볼 수 없이 빡빡한 하나의 덩어리 말이다.
그는 오후 1시가 조금 지나자 점심으로 싸가지고 온 도시락을 먹었다. 김치볶음밥과 계란 프라이는 차갑게 식기는 했어도 먹을 만했다. 식사를 마친 후 2시간 동안 그는 식곤증과 습기와 히터 열기와 산소 부족으로 인해 축 늘어져 있었다. 막 책상 위에 고개를 처박으려는데 별안간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는 바람에 그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한 여자가 젖은 우산을 가다듬으며 가게로 들어서고 있었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그녀의 파란색 코트 아랫단이 검은색 물감이라도 빨아들인 것처럼 흠뻑 젖어 있었다.
“아, 어서 오세요.”
현태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인사했다.
“네, 안녕하세요. 죄송해요. 제가 너무 문을 세게 열었죠? 아유, 웬 비가 이렇게 오는지.......”
얇은 은태 안경을 쓴 여자가 빗물에 젖은 귀밑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기며 웃었다.
“네, 비가 정말 많이 내리네요. 뉴스를 보니 내일 새벽까지 내린다고 하던데요. 길바닥이 얼어붙지 않아야 될 텐데.”
현태가 그녀에게 휴지를 건네주며 말했다. 비가 오는 날에는 손님과 대화를 풀어내기가 수월했다.
“뭐 찾으시는 거 있으세요?”
“예, 꽃 좀 사려구요.”
"어떤 꽃을 찾으시는데요?”
“저기, 실은 제가 꽃꽂이 강사거든요. 그래서 수업시간에 쓸 꽃이 좀 필요해요.”
“아, 그러세요?”
“제가 이사 온지 얼마 안돼서 아직 수강생은 두 사람뿐이에요. 장소도 따로 두지 않고 그냥 저희 집에서 하고 있어요. 소규모 수업으로요. 오늘 첫날이라 동양 꽃꽂이 기본형을 하려고 하는데, 혹시 선이 긴 나뭇가지가 있을까요?”
“음, 한 번 보죠. 여기 오리목이 좀 있네요. 이정도면 선도 예쁘고 두 분 하시기는 충분할 것 같은데요. 그리고 오리목하고 어울릴 만한 꽃으로는 백합하고 소국이 있는데, 어떠세요?”
“네, 좋을 것 같아요. 그럼, 오리목 3단 하구요, 아, 백합이 너무 싱싱하고 예쁘네요. 백합 열 송이도 주시구요. 소국 두 단, 거기에 엘로윈 두 단 하고 연분홍색 장미도 좀 주세요. 장미는 다섯 송이요. 와, 장미 색깔이 너무 잘 나왔어요. 수강생들이 좋아하겠어요. 네, 일단 그렇게 하면 오늘 하루 수업으로는 충분할 것 같네요.”
현태는 그녀가 고른 꽃들을 꺼내어 적당히 다듬은 뒤 종류별로 신문지에 말기 시작했다. 가게 안은 신문지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빗소리 외에는 먹먹할 만큼 조용했다. 그는 여자가 걸치고 있는 코트의 짙푸른색이 눈앞에 아른거려서 몇 번이나 눈을 깜빡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