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태는 나무마다 칭칭 감아놓은 줄전구 조명이 번쩍이는 ‘귀빈모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잠시 그대로 앉아 주변을 살폈다. 들어가다가 누군가와 마주치는 건 불쾌한 일이었다. 다행히 비가 내리고 있어서인지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차에서 나와 모텔 입구로 뛰어갔다. 그 사이 빗줄기가 더 거세져서 금세 어깨며 등 뒤가 선뜩하게 젖어왔다. 빗물이 얼음장 같았다. 그리스 신전 기둥을 흉내 낸 인조 대리석으로 꾸며진 모텔 입구로 들어서자 계산대에 앉아있던 낯익은 종업원이 그를 알아보고 꾸벅 인사를 했다. 민망한 일이었지만 이 정도 창피는 어쩔 수 없었다. 이것 역시도 감수해야하는 굴욕들 중 하나였다. 매번 모텔을 바꾸어 볼까도 생각했었지만 그것이 더 번거롭고 무안한 일이 될 것 같아 계속 이 모텔을 이용하고 있었다.
그는 갈색 벽지와 갈색 그림자, 갈색 적막에 휩싸여있는 모텔 층계를 단번에 뛰어올라가 경애가 살짝 열어놓은 407호의 문을 열고 곧바로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샤워를 마친 경애가 속이 훤히 비춰 보이는 검은 레이스 란제리만 입은 채 다리를 꼬고 침대에 걸터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손에는 반쯤 구겨진 맥주 캔이 들려 있었다.
“아, 오빠 왔어요?”
“어.”
“아유, 왜 우산을 안 쓰고 왔어요. 머리가 다 젖었네. 샤워부터 해요.”
경애는 자리에서 일어나 제법 다정하게 몸을 붙여 왔다. 그러나 현태는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쌩하니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경애는 그런 현태에게 익숙했기 때문에 얼른 다시 자리에 앉아 보고 있던 드라마에 정신을 집중했다.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 몰래 아이를 지우려고 하는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남자 주인공은 여자 주인공의 이름을 부르며 산부인과 병원을 온통 헤집어 놓고 있었다. 왁자한 텔레비전 소리를 밀어내며 현태는 욕실 문을 꼭 닫았다. 늘 그렇듯 뒤통수가 따끔거리는 불쾌감을 그는 애써 무시했다.
그는 샤워기를 틀고 벌거벗은 몸을 물에 적셨다. 그의 몸에서는 이미 열이 오르고 있었지만 그는 좀처럼 흥이 나지 않았다. 냉탕과 온탕에 몸을 반반씩 담근 듯 불만스럽고 어중간한 기분이었다. 돌이켜 보면 경애와의 섹스에서 진심으로 흥분했던 건 그녀와의 첫 잠자리 때뿐이었다. 그리고 그건 경애나 섹스 때문이 아니라 처음으로 돈을 주고 여자를 산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돈을 주고 하는 게 처음이라구요?”
그녀는 천진하게 웃었고 현태는 탄복했다.
“와, 그럼 조금 죄의식이 들겠는데요?”
“죄의식? 왜?”
그는 무심코 되물었다. 그녀는 당황했는지 입술을 달짝거리며 외쳤다.
“아니, 아니요. 혹시나 그런 기분이 든다면 그럴 필요가 없다는 말을 해주려고 한 거예요. 우리가 뭐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아니고, 손해 보는 사람도 없잖아요. 그렇잖아요. 자아, 그러면, 우리 이제 뭘 할까요? 뭐 하고 싶어요?”
“아무거나?”
“때리는 것만 빼구요. 그런 취미는 없죠?”
그러고 보니 어느 영화에 나왔던 금발머리 창녀가 그런 대사를 했었다.
[때리고 싶으면 세 배를 내세요.]
혹시 경애도 돈만 더 주면 때리는 걸 허락할까? 허락한다면 얼마를 요구할까? 돈을 지불하게만 해준다면 그도 한 번쯤 참고 때려볼 수도 있을까?
그는 샤워를 마치고 팬티 차림으로 욕실을 나왔다. 경애는 두 번째 캔 맥주를 마시며 텔레비전을 향해 목을 쑥 빼고 있다가 현태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정말 눈이 마주치기 전에 현태는 슬쩍 눈을 피해버렸다. 현태로서는 이때가 가장 어색하고 어려운 순간이었다. 섹스를 하러 왔으니 섹스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섹스하기 전에 여자에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여자의 표정에서 무엇을 읽어야 하는지 그는 알 수가 없었다.
“텔레비전 꺼.”
현태가 어물쩍하게 침대에 걸터앉으며 명령조로 말했다. 경애는 현태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곧바로 텔레비전을 끄고 폴짝 엉덩이를 옮겨 현태 옆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란제리를 훌훌 벗어 옆으로 던져 놓았다. 하얗게 밝은 형광등 불빛 아래서 경애의 나체가 더 밝게 빛을 발하며 불시에 모습을 드러냈다. 현태는 턱을 끌어당기면서 지그시 숨을 삼켰다. 그것은 언제 보아도 갑작스럽고 기발한 충격이었다. 단지 얇은 천 하나를 벗었을 뿐인데 순식간에 다른 생물로 변이해 버리는 것이다. 분명히 말하건데 원래부터 옷 속에 그런 생물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경애는 히죽이 미소를 지으며 좀 더 현태가 잘 볼 수 있도록 자세를 고쳐 앉았다.
현태에게는 잠자리에서 여자를 때리는 괴벽은 없었지만 약간 별난 취향이 있었다. 섹스 전에 상대방의 벗은 몸을 샅샅이 살펴보는 것이었다. 벌써 서른 번 가까이 경애와 잠자리를 가졌으면서도 그는 그녀의, 아니 여자의 육체를 생전 처음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구석구석 들여다보곤 했다. 경애는 이런 그의 취향에 별 불만이 없었지만 - 불쾌할 정도로 주물럭거리거나 이상한 자세를 요구하는 것보다는 나았기 때문에 - 현태는 경애에게 미안한 마음이 없지 않았다. 그저 눈앞에 놓고 빤히 바라보는 것뿐인데도 어쩐지 때리는 행위만큼이나, 심지어 그보다 더 나쁜 일인 것만 같았다.
경애는 쑥스러운 기색 하나 없이 그를 향해 가슴을 활짝 펴고 천천히 옆으로 목을 기울였다. 그가 자신을 관찰하는 동안 그녀 역시 그를 관찰하곤 했다. 그의 무해한 음란함을 내심 재밌어하며, 또한 비웃으면서 말이다. 현태는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관찰이란 일방적이어야 하고 여자는 절대적인데다가 무엇보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향해 훅 끼쳐오는 분홍빛 살 냄새에 그는 귓불을 붉혔다.
그러나 그는 서두르고 싶지 않았고 저절로 차분해졌다. 그는 조밀한 눈빛으로 그녀의 어깨부터 천천히 훑어나갔다. 조금 짧은 목에서부터 둥그런 어깨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선은 언제나 그로 하여금 애틋한 마음을 불러일으켰다. 그녀가 단지 하나의 몸뚱이가 아니라 한 명의 인간임을 상기시켜 주는 건 그녀의 얼굴이 아니라 바로 그녀의 좁은 어깨였다. 그 뭉툭한 어깨에서 쇄골뼈로 가파르게 떨어지는 날카로움이 그의 이마에 서늘한 자국을 남겼다. 그녀가 두 손으로 머리를 매만지자 그는 그녀의 팔로 시선을 옮겼다. 큼직한 갈색 주근깨가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팔은 팔꿈치에서 한번 맵시 있게 꺾인 뒤 가느다란 팔목을 거쳐 다섯 개의 창백한 손가락까지 긴 선을 그리며 이어졌다. 머리에 꽂아 놓았던 핀들을 하나씩 빼는 경애의 나긋한 손놀림을 바라보며 현태는 이토록 길고 가느다란 팔은 기능적인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육체에 영감을 주기 위해 진화되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