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pare #1
항공사 승무원이라면 비행에 투입되기 전 당연히 몸에 무조건 지니고 다녀야 할 것들이 여러 개 있다.
여권, 승무원등록증, 아이디카드, 그 외 비행 기반 아이템 및 기타 유니폼 아이템들 등등
교육 때부터 귀에 딱지가 앉게 교육을 받고 조언과 충고를 늘 들으며 강조 또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부분이 바로 위에서 말한 여권, 아이디카드, 승무원 등록증 등의 필수휴대품이다.
필수휴대품이 없으면 비행을 할 수 없는 빈 껍데기 승무원이기에 비행을 시작하기도 전 교육때부터 지금까지도 무조건 늘 지니고 있는다.
하지만 우리 승무원들도 인간미 풀풀 넘치는 사람이지라 필수 휴대품을 놓칠 때도 있다.
Quick turn(짧은 하루짜리 왕복 비행)으로 사용했던 가방에서 layover(1박 이상 체류하는 비행) 가방으로 짐을 옮길 때 깜빡하고 안 옮겼다던가,
혹은 현관문 앞에서 마지막에 챙겨야 하지 해놓고 정말 깜빡했거나,
진짜 억울하게 다 챙겼는데 오다가 잃어버렸거나 등등
다양한 변수가 있기에 승무원들의 출근은 여러모로 예민한 게 아니다.
물론 11년 차 승무원인 나도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때는 새벽 5시 10분 브리핑
입사한 지 3개월도 안된 초짜신입은 긴장감과 압박감으로 잠 한 소금 못 자고 비행준비에 여념이 없었고 모든 게 다 완벽했다고 생각하고 무려 4시에 공항에 도착했었다.
당연히 브리핑실에는 아무도 안 계셨고 그 적막함에 안도와 편안함을 느낀 채 또다시 비행준비에 몰두하였다.
4시 40분경 선배님이 오셔서 이런저런 스몰토크를 하다가
“00 씨, 혹시 id 카드는 가방에 있는 거죠?”
나는 피가 차갑게 식는 느낌이 이런 느낌일 것이라고 순간 생각했다.
당연히 내 목에 걸려있어야 할 id 카드와 승무원등록증이 보이질 않는다니..?
주마등처럼 삭삭 스쳐가는 상황의 장면들
현관문 앞에 아빠의 차키와 함께 다소곳이 놓여있는 내 필수휴대품들이 스쳐갔다.
브리핑시간까지는 약 30분이 남아있던 상황
손을 벌벌 떨며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고
자다 깬 아빠는 뭐? 뭐?? 뭐??? 하더니 금방 끊고
‘난 이제 망했다. 내 비행인생은 여기서 끝이야. ’
‘어떡하지 같이 가는 분들한테 큰 피해를 끼칠 텐데 ’
얼굴은 하얗게 질려가고 아빠의 전화만 벌벌 떨면서 기다리고 있었던 찰나
아빠에게 전화가 오더니
” 아빠 지금 가고 있어 15분이면 돼 현관문 앞에 이거 목걸이 말하는 거지? “
그때의 아빠의 긴박한 목소리와 뒤에서 들리는 ”천천히 빨리 가 “라는 엄마의 목소리는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때 같이 비행했던 사무장님, 선배님의 성함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얼마나 한심하고 바보 같은 신입일 수가 없다.
그럼에도 그때의 크루들은 나를 다독여주었고,
괜찮다며 브리핑 진행하고 있다가 아버님 오시면 금방 받아오면 된다고 오히려 따뜻하게 안아주셨던 다정한 사람들이다.
나는 무사히 비행을 잘 다녀왔고 혹독하게 필수휴대품의 신고식을 경험했다.
지금도 다시 생각해도 아찔했던 그날 새벽의 긴박함을 잊지못한다.
그때의 선배님들의 다정한 위로와 다독임을 잊지않고 후배들에게 내리사랑해주려 늘 상기한다.
2. 여권
시니어가 된 지 꽤 되었다.
이제 나는 사무장의 직책을 목전에 두었고 나만 잘하면 되는 날들이었다.
나는 평소 비행을 하기 전에 꽤나 예민한 승무원이었다. 후배들은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겠지만, 브리핑 시간 1시간 전에는 도착해서 비행준비를 시작해야 그날의 비행이 잘 풀릴 것만 같은 나만의 루틴을 꼭 지켜야만 했다.
그날도 여느 날과 다를 바 없이 1시간 이전에 도착해서 필수휴대품을 다 꺼내놓고 브리핑 준비를 하려던 찰나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가방 앞주머니에 당연히 있어야 할 여권이 없다니?
내가?
아무리 가방을 뒤져보고 탈탈 털어봐도 여권이 나올리는 만무하였고 또 한 번 피가 차갑게 식는 느낌을 경험하였다.
하필 그날은 평일이었고 아빠는 당연히 출근하셨고 엄마는 외출을 하셨던 날이었다.
’ 망했다. ‘
사무장이고 뭐고 다 날아가고 앞으로의 비행인생이 고되질 건 안 봐도 비디오
심장이 엄지발가락까지 쿵 하고 내려앉고 회사에 보고를 해야겠다라고 하던 찰나
언니가 집에 있는 날이었던 게 스쳐 지나갔다.
연차였는지 늦은 오후 출근이었는지 정확하게 기억은 나질 않지만 어쨌든 언니가 있었다.
제발 약속이 없기를 바라며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고 자다 일어난 언니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그렇게 천사의 목소리일 수가 없었다.
다행히 언니가 총알택시를 타고 브리핑시간 이전에 나는 여권을 받아 비행을 갈 수 있었고 언니의 여권배달 덕분에 지금까지 순탄 비행 중이다.
그때 언니의 모습을 또한 아직도 잊지 못한다.
밑에는 잠옷바지 위에는 급하게 입은 패딩으로 아주 요상한 패션이었지만 나에게는 그 모습이 그렇게 런웨이의 모델처럼 근사할 수가 없었다.
이 글을 빌어 다시 한번 압도적 감사를 표한다.
다행히(?) 11년 동안 2번의 에피소드 외에는 필수휴대품에 대한 이슈는 없었다.
나는 다행히 가족들 덕분에 비행 전에 해결을 해서 무리 없이 지금까지 하늘을 걷고 있지만 늘 불안을 마음에 두고 비행을 한다.
하늘을 걷는 승무원이라면 늘 마음에 두고 사는 불안함
어떤 글에서 봤는데 딱 우리 승무원들이구나 싶던 글이 있었다.
나는 아직까지도 출근 전, 중, 후에 항상 필수휴대품의 유무를 걸어 다니면서도 부산스럽게 확인한다.
물건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을 알지만 계속 반복적으로 확인하는 행동, 일어나지 않은 상황을 생각하며 불안을 안고사는 마음, 공황장애의 특성이다.
비행을 모르는 주변인들이 “ 비행 전에 왜 이렇게 산만하냐”라고 물어들 보는데,
끊임없이 무의식적으로 내 필수휴대품의 유무를 촉각적으로 확인하는 게 내 버릇이 되어버린 까닭에 나는 산만한 승무원이 되어버렸다.
아마 나는 비행을 관두는 그날까지도 필수휴대품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승무원들은 다 이렇게 고통받고 있지 않을까 싶다.
#1 prepare_필수휴대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