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의 기억
스무 살이 되었을 때, 나는 대학생이 아니었다. 요새는 점점 한 번에 대학에 붙는 일이 적고 N수가 더욱 평범한 일이 되었다지만, 어쨌든 그건 인생에서 처음 마주친 대단한 실패였다. 별 수 없이 나는 재수종합학원에 등록해서 별안간 낭인 신세가 되어버렸다. 최소한 나는 그런 처량함을 느꼈다.
그러나 처량한 신세라고 해서 음식에 대한 열정이 사그러들진 않았다. 오히려 실존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더 원초적 욕망에 집중했달까. 재수생의 신세는 고달파서, 아침부터 오후까지 하루종일 닭장같은 교실에 갇혀 수업을 듣고 나면 야간자율학습-'야자'가 이어졌다. 점심도 저녁도 도시락을 싸오는 게 기본적인 규칙이었으니, 아침에 한 번 학원 건물에 들어서고 나면 하늘이 깜깜해지는 밤 10시가 될 때까지 그 건물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 또한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수업 후 야자 1부 전까지, 또 야자 1부와 2부 사이에 짧은 외출이 허용되었는데, 가끔 나와 친구는 그 시간을 활용해 야자를 땡땡이쳤다.
우리가 탈출한 목적지는 강남역 번화가의 삼겹살 집이었다. 흥청망청하는 분위기가 가득한 강남역 뒷골목 어느 건물의 2층에 위치한 그 가게는 알록달록한 떡에 삼겹살을 싸먹는 메뉴를 팔았다. 잘 익힌 기름진 삼겹살에 콩고물을 잔뜩 묻히고, 불판 한쪽에서 구워낸 떡에 고기를 싸먹으면 고소하고 기름진 맛이 입안 가득 퍼져올랐다. 불판의 반대편에서는 삼겹살의 돼지기름에 적셔진 김치가 노릇하게 익어갔다. 흥에 겨운 우리는 약간의 죄책감과 짜릿함을 느끼며 죽통주를 시켰다. 옅은 대나무 냄새가 나는 술을 소주잔에 따르며, 이러다 술 먹은 티가 나면 어쩌지 슬쩍 걱정하는 체했다. 그러면서 취중 공부를 할 거라며 야자 2부가 시작되는 20시에 맞춰 우리는 호기롭게 다시 학원으로 돌아갔고 22시까지 공부하는 시늉을 했다.
이런 모험을 할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는 저녁 도시락을 건너뛰고 편의점으로 향했다. 새로 출시된 짬뽕컵라면의 해산물 맛을 음미하며 컵라면치고는 고급스러운 맛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삼겹살과 편의점 사이 정도의 여유가 있을 때는 부대찌개 집을 갔다. 고기를 구워먹는 아저씨들 사이에서 우리는 가공햄을 우물거리며 얼큰한 국물을 쭉 들이켰다. 쓰다보니 어째 선택한 메뉴들이 한결같이 맵고 짜고 기름진 것들 투성이인데, 우리는 재수의 압박감을 혀를 괴롭히는 맛으로 달래고 있었나 싶다.
어쨌든 이런 모험은 가끔씩 일어나는 일이었고, 대개는 하루 종일 몸을 붙이고 수업을 들었던 일체형 책상에 그대로 앉아 도시락을 까먹었다. 우리는 추위를 피하려 서로 몸을 붙이는 펭귄마냥 삼삼오오 모여앉아 도시락 반찬을 나눠먹었다. 엄마의 정성어린 도시락 두 통은 그렇게 재수생 딸을 하루종일 먹여살렸다. 내가 좋아하는 계란말이와 명란젓이 자주 반찬으로 등장했다. 답답한 교실에 하루종일 앉아 늦은 밤 돌아갈 집을 떠올리며 나는 엄마의 계란말이를 삼켰고 쌀밥 위에 명란젓을 곱게 펴발랐다.
수능 당일, 나는 친구와 같은 고사장에서 시험을 쳤다. 우리 둘다 다른 수험생이 잘 선택하지 않는 과목을 골랐기 때문이었다. 언어와 수리 시험을 끝내고 점심 시간이 되어 각자의 도시락 뚜껑을 여는데 나는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내 도시락 통에도 계란말이와 명란젓이 들어있었고, 친구의 도시락 통에도 계란말이와 명란젓이 들어있었다. 우리는 학원에서 늘상 도시락을 나눠먹었었고, 내가 곧잘 싸오던 메뉴들을 '평상시처럼' 수능 날에도 먹어야 탈이 안날 것 같아서..라고 친구가 말했다. 덕분에 같이 앉아 나눠먹는다는 게 의미가 없긴 했지만, 야속하리만치 하루만에 운명을 가르는 수능시험날 우리는 속절없이 웃을 수 있었다.
지금도 그 때 친구들을 만나면 그 일년의 추억 아닌 추억들을 곱씹고는 한다. 거기에는 얼굴이 늘 술톤이었던 땅딸막한 담임 선생님도 들어있고, 제일 꼭대기층이라 수압이 안좋았던 화장실도 껴들고, 짧은 휴게 시간 동안 수다를 떨며 까먹느라 녹아내리던 아이스크림도 떠오른다. 그러나 역시 맘편히 즐거운 일은 먹는 일이라 이제는 없어진 떡 삼겹살과 죽통주를 팔던 가게를, 한 쌍의 계란말이와 명란젓을 얘기하고 또 얘기한다. 그것들은 참 질리지도 않는다.
실제인지 꾸며진 기억인진 모르겠는데, 어릴 때의 어떤 장면들을 떠올리면 기분이 좋아지는 거.
아…막, 이미지로 기억되는 거…?
응. 그런 것들이 사는 데 꽤 힘이 되는 것 같아.
- 난다, <어쿠스틱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