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히말라야 2

천국으로 가는 길

by 전종호

갑작스럽고 무모하게 시작한 히말라야 여행은 기묘하고 신비한 체험을 안겨주었다. 신령한 얼굴의 설산雪山들, 우리와는 너무나 달라 비현실적이다못해 초월적으로 보이는 산사람들의 삶의 모습, 몇십 년은 뒤로 물러나 기이한 곳에 와 있는 듯한 시공의 후퇴와 착시, 시리게 푸르러 여여한 하늘 아래 산허리를 이으며 길게 흘러가는 구름길, 때로는 폭포같이 때로는 넓은 여울 같이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 한가득 바람을 가슴에 받아 말처럼 달려가는 듯, 사자의 포효처럼 외치듯 펄럭이는 오방색 룽다와 타르초, 포카라 페와호수 주변 카페에 앉아 하루 종일 멍때리는 무위無爲,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대낮의 한가한 시간들. 한때 교회 부흥회서처럼 그렇게 히말라야에 취해 뜨거운 은혜로 부풀어올라 한 해를 살았던 나는 겨울방학이 되자마자 다시 짐을 쌌다. 1월에 돌아오고 다시 12월에 떠난 것이니 한 해에 두 번 가는 히말라야였다. 홀려도 단단히 홀린 것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히말라야에 가는 사람들은 등반하는 사람들과 트레킹 하는 사람들로 나뉜다. 보통 6,000 미터가 그 기준이지만, 트레킹이라고 하여 산을 타지 않는 것은 아니다. 히말라야 3대 트레킹 코스는 안나푸르나(ABC), 랑탕, 쿰부 히말라야(EBC)이다. 풍요의 여신이라 불리는 안나푸르나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고 가장 대중적인 코스로, 시간 여유가 있는 사람은 푼 힐 전망대 코스에 이어서 걷는다. 산악인들이 안나푸르나 등정을 본격적으로 준비하는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ABC, 4130m)가 종점이다. ‘천상의 화원’으로 불리는 랑탕은 네팔의 1호 국립공원으로 강진 곰파가 목표이며, 체리고리(4984m)와, 하산길에 힌두 성지인 코사인쿤드(호수, 4380m)까지 가는 사이드 트레킹 코스가 있다. ‘세계의 지붕’이라는 쿰부 히말라야(EBC)는 에베레스트산을 직접 조망할 수 있는 코스로서, 도중에 5,000m 이상인 패스를 3개나 넘어야 하는 가장 힘들고 험한 코스이다. 이 밖에도 안나푸르나나 마나슬루 등 높은 산군을 중심으로 해서 한 바퀴 순환하는 어라운드 코스가 여럿 있고, 최근에는 무스탕 지역도 개방되어 방문객들이 꾸준히 늘고 있다.

지난 1월 안나푸르나에 이어 이번에는 랑탕 계곡으로 간다. 랑탕으로 가기 위해서는 우선 카트만두에서 관문인 샤부로베시까지 가야 한다. 약 150km. 지프를 빌리면 7시간, 버스를 타면 8∼9시간 걸린다. 비포장이기도 하지만 워낙 험해서 오래 걸린다. 오기 전에 지인이 가능하면 지프를 이용하고 버스를 타게 되면 차창 밖 길옆의 낭떠러지가 무서우니 왼쪽에 앉으라는 말이 생각났지만, 버스를 탔고 오른쪽 자리에 앉았다. 지프 대여는 너무 비쌌고(400달러), 버스(10달러)는 오른쪽 자리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삶에서 선택이 항상 가능한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이 탔다. 자리, 통로는 이미 의미가 없었다. 사람만 타는 것도 아니었다. 곡식 자루들이 무수하게 올라왔고, 자리가 없는 사람들은 자루 위에 앉았다. 닭도 타고 양도 탔다. 심지어 버스 위에 염소를 태웠다. 버스는 그렇게 흔들흔들 비포장도로를 달렸다. 그래도 불평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사람들은 흔들리는 버스에서 무심하게 잠을 잤다. 체념인가? 달관인가? 중간중간 사람들이 내리고 또 탔다. 도중에 버스를 세우고 점심을 먹었다. 아무도 서두르는 사람들은 없었다. 군데군데 산사태로 끊어진 길은 임시도로로 이어졌다. 달린다기보다는 기어간다는 말이 맞을성싶다. 낭떠러지와 길은 너무 가까웠고, 길 위에서 죽음과 삶은 아주 친숙했다.

버스가 출발할 때 작은 돌에 쓰인 ‘Heavenly Path’라는 표지판을 보았다. 하늘 가는 길? 하늘나라 같은 길? 천국에 이르는 길? 천국 가는 길? 하늘? 천국? 많은 생각들이 일어났다 사라졌다. 얼마 전에 어지러워 입원한 적이 있던 해븐리 병원도 떠올랐다. 천국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어렸을 때 주일학교에서 배운 것처럼 믿는 자들이 가는 천국인가? 지옥과 구별되는.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의 그 천국? 그럼 예수를 모르는 이 산골짝 사람들이 써놓은 저 천국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렇지만 나는 분명 천국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여행이 일상으로부터의 격리와 해방감을 위한 것이라면, 세상에서의 분주함과 괴로움에서 벗어나 무언가 어떤 해방감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천국이 어떤 특정한 공간이나 사후의 왕국은 아니라고 믿으며 살았다. 평생 무언가 대안을 찾아 헤맸다. 지배 질서에 복무하는 교육이 아니라, 인간의 행복에 이르는 교육이 있을까 그 길을 찾아 노력했다. 대안적 세상의 가능성과 이를 실현할 수 있는 대안적 공동체와 마을에 대하여. 세상을 바꾸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나를 바꾸고 비비는 것만큼 내가 있는 자리, 학교와 사회의 영역이 조금씩 넓어질 거라고 믿었다. 천국이란 결국 대안적 세계가 아닌가? 그러다가, 그러면서 지친 마음의 안식을 위하여 여기까지, 멀리 세상의 끝까지 온 것이다. 아직도 ‘소나무 아래 동자에게 스승이 어디 계신가 묻기 위하여’ 이 골짝에 스며든 것은 아니다. 샹그릴라를 찾아온 것은 더더욱 아니다. 천국이란 어떤 종교가 상정하는 공간이 아닌 어떤 상태, 즉 경쟁과 투쟁, 번민과 분노가 사라지고 마침내 이르게 되는 잠잠함과 고요의 상태가 아닐까? 그래서 열반은 적정寂靜 즉 고요함이라 하지 않았던가? 백척간두 정도가 아니라, 수천 미터 위 벼랑길을 흔들흔들 달리는 버스에서 저 허름한 사람들의 한 치 흔들림 없는 무심無心과 평온에 천국이 있는 것은 아닐까? 수타니파타의 한 구절을 생각했다. “번뇌의 화살을 뽑아버려 집착이 없고 마음의 평안을 얻으면 모든 슬픔을 뛰어넘어 열반에 들게 될 것이다.”


“산에 가는데 굳이 시간을 다툴 일도 아니어서/ 완행버스를 탔습니다/ 카트만두에서 샤부르베시까지 아홉 시간/ 가다 서다 타다 내리다/ 사람도 타고 염소도 타고 쌀자루도 타고/ 버스는 원시의 평화로 가득합니다/ 어설프고 패인 포장도로를 달리다/ 천 길 낭떠러지에 매달린 비탈길을/ 탈탈탈 구르며 느리게 가는 버스가/ 산사태로 무너진 길을 천천히 비껴갈 때는 /이 세상이 저세상인 듯/ 순간 아득해지기도 하지만/ 여러 차례 삶의 태풍을 만나/ 여기저기 찢기고 멍든 곡절의 마음이라/ 더 이상 놀라지는 않기로 했습니다/ 점과 점이 이어져 누군가의 숨길이 되고/ 마을과 마을을 이어 역사를 이어가듯/ 사람과 사람들 등 기대어 느리고 더디게/ 이렇게 살아도 될까 싶은 마음이 들도록/ 느리게 참으로 느리게 달려 산으로 갑니다/ 버스가 더 이상 갈 수 없는 막다른 길에서/ 히말라야 산속으로 걸어 드는 좁은 길은/ 속도의 문명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며/고요의 세계가 문을 열고 있습니다// <산으로 가는 완행버스를 타고>”

전종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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