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무언가 바라볼 수 있다는 것
〔전종호 여행 칼럼〕 어쩌다, 히말라야 8.
홀로 무언가 바라볼 수 있다는 것!
갑자기 들린 노래 한 곡에 흔들린 마음을 다잡고 다시 길을 나선다. 라마호텔까지 다시 500미터를 높이며 4시간가량을 더 걸어야 한다. 오전 맑음 오후 흐림의 전형적 패턴의 날씨가 반복된다. 멀리는 흐리지만, 가까운 거리를 보는 것은 문제가 없다. 협곡으로 물이 빠르게 흐르고 물소리는 더 사납게 운다. 길을 따라 열병하듯 서 있는 나무는 아열대 우림으로 짙푸르다. 구름이 끼어 하늘은 좀 흐려졌지만, 점심도 먹었겠다, 급한 일도 없겠다, 발걸음과 기분은 마냥 가볍다.
점심 먹기 전에 만났던 학생들을 생각하니 한결 기분이 좋아진다. 도멘 마을을 한참 지나서 길 건너 계곡 쪽 절벽에 말로만 듣던 히말라야 석청이 군락으로 붙어있어 사진을 찍을 때, 석청이라! 엉뚱하게 석청과 메뚜기를 먹으며 광야에서 메시아의 길을 준비했다는 세례 요한을 잠시 생각하는 사이, 한 무리의 학생들이 내려왔다. 삼육대학교 네팔교육봉사단이라고 한다. 높은 산을 오르고 내려오면서도 표정이 밝다. 젊음은 역시 좋은 것이다! 산의 비밀을 하나씩 가슴에 품고 가면 좋겠다. 내가 아는 교수를 아느냐고 물으니 그의 학생들이라고 한다. 인연은 히말라야의 산길에서도 이어진다.
산에서는 삶이 단순하다. 짐이라고는 어깨에 지고 있는 배낭뿐, 직장, 직위, 업무, 실적 등 이런 무게가 없다. 먹는 것에 대한 집착도 없다. 하루 분량의 열량이면 족하다. 보여주는 것에 대한 부담도 없다. 세수도, 목욕도, 떡머리도 신경 쓰지 않는다. 보고 듣고 걷고 생각하는 일이 전부이다. 하늘과 산을 우러러보고 여기 사는 사람들의 살림살이를 쳐다보고, 오고 가는 산객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걷고 있는 나 자신을 남인 듯 들여다보고 걷는다. 평소와 다르다면, 자연을 그냥 스치듯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다를 뿐이다. 무심코 들은 노래 한 곡이 산에서는 사람의 느낌과 기분을 고조시키거나 꺾어놓기도 하듯이, 설산 위의 하늘에 떠도는 구름 한 점이 심장을 멈추게 하기도 한다. 장소와 시간에 따라 감정의 모양과 의미가 달라진다. 산에서는 보는 것도 달라진다. 보여서 보는 것(see)이 아니라, 저것들이 무엇인지, 또 내 마음속에 움직이는 것들이 무엇인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주의 깊게 보게 되는 것(watch)이다. 산에서는 자연과 대상에 민감해진다. 평소라면 거들떠보지도 않던 돌멩이 하나,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가 새롭게 보인다. 사람은 산에서 저도 모르게 잊었던 자연성을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산이 고향이기 때문이다. 누구 말이다.
산에서는 생각이 단순해진다. 평상시에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높이를 오르고, 도시에서 한 달 치의 걷기 분량보다 더 길고 먼 길을 하루에 걸으면서 무슨 잡념과 걱정을 할 수 있겠는가? 한 발 잘못 디디면 낭떠러지 허공에 곤두박질할 순간에 무슨 정치와 종교적 잡담에 빠질 수 있겠는가? 자신의 한계에 직면하면서 오로지 자신의 내부세계를 들여다볼 뿐이다. 시선을 자신에게만 집중한다. 남의 시선, 남에 대한 간섭, 외부에 대한 관심, 이런 것들은 극한적인 산 체험에서는 사라진다. 산 아래에서 흔한 갈등이나 싸움의 원인도 남보다 자신에게서 먼저 찾고 반성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마다 산에 오는 목적과 이유가 저마다 다르다. 오락과 체력 단련이 목적인 사람도 있고, 설산과 암벽 등 한계 도전이 목적인 사람도 있다. 산 정상에, 그리고 저 산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한 것을 참을 수 없어 미지의 세계를 탐구하기 위해서 온 사람도 있다. 산을 오르고 내리며 구도의 길을 가는 사람도 있다. 목적에 따라서 산을 오르는 방식도 다르다. 높이와 심도를 강조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대중적인 코스를 선호하는 사람도 있다. ‘처음(초등)’, ‘더 높이(최고)’, ‘혼자(단독)’, ‘무산소’를 고집하는 전문적인 산악인들이 있는가 하면, 단체 산행을 하면서 친목과 체력과 유람을 목적으로 산에 오는 사람도 있다. 등산의 목적과 방법에 따라서 산을 대하는 시각도, 자신을 바라보는 자세도 달라진다.
등산이 대중화되면서 산들이 점차로 저잣거리처럼 시끄러워지고 있다. 등산객들은 점차 외국의 산과 길로 진출하고 있다. 규슈 올레와 산티아고 순례길과 히말라야의 산길에 한국인이 넘쳐나고 있다. 국제적인 상업원정대 사업이 번창하면서 8,000미터 에베레스트에도 등산객의 병목현상이 생겨나고 고봉은 쓰레기 몸살을 앓고 있다고 한다. 알피니즘이 투어리즘으로 바뀌고 있다고 한탄하는 소리도 들린다. 산에 오를 사람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고산 등반이 일부 사람의 특권이 되어서도 안 될 말이지만, 등산객들이 몰리고 단체화되면서 고소 산행이 기록이나 인증 체험의 기회나 구실이 되는 것은, 절망과 극복, 불굴의 정신 등을 산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어서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단체산행은 비용 절감, 위험 감소, 고독의 분산 등 유용성이 많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함께 가더라도 산에서는 단독 산행자로서 자연으로부터 배우겠다는 각오와 겸허한 태도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산에서는 누구나 생각과 행동이 단순해져야 한다.
산에서는 ‘보는 사람’과 ‘보이는 것’만이 존재한다. 오직 보는 사람 ‘나’만이 존재한다. 자연과 사물뿐만 아니라, 여기 사는 사람들과 여기를 방문한 산객들도 보는 ‘나’에게는 다 보이는 존재에 불과하다. 보는 주체인 ‘나’는 사람마다 고유의 시각이 있다. 너는 나의 대상이고 나는 너의 대상일 뿐이다. 평소에 우리는 얼마나 자주 남의 시선과 조직의 평가를 의식하며 살아왔던가? 예의와 질서를 의식하고 순응과 실적에 대한 압박을 받으며 살았다. 이것을 무시하면 왕따가 되거나 또라이 취급을 받았다. 산에서는 보여지는 대상이 아니라, 보는 자로서의 ‘나’라는 존재가 가능하다. 나 홀로 무언가를 바라보는 것, 바라볼 수 있는 것, 바라보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사회와 제도에서 벗어나, 산이 우리에게 내려주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겠는가?
잘하고 있어요/ 우리 모두 좋아해요/ 쉴 새 없이 글과 사진을 올리고/ ‘좋아요’ ‘싫어요’에/ 사람들은 깊이 더 외로워진다/ 모두에게 쌍수로 환영받거나/ 영혼까지 거부되는 일이 어디 있는가/ 뒤통수 뒤끝 손가락질에 마음 쓰지 말라/ 따스한 사람이 곁에 있어도/ 땅거미 지는 저녁나절 막막함처럼/ 지지도 배척도 이별도/ 언제나 어디서나 있는 법이니/ 굳이 좋은 사람이 되지 말라/ 홀로 꼿꼿이 남의 시선에서 풀려나/ 떠드는 소리 참말인가/ 지금 가는 길 너의 길인가/ 네 안의 깊은 속 고요의 울림에/ 귀가 아니라 무릎을 꿇고/ 번다煩多 광장을 떠나 침묵 안에 거하라//<스스로를 경계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