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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OE Feb 05. 2023

서늘하고 건조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연대를 말하기

드라마 스페셜 <양들의 침묵>을 보고

이 작품은 진급을 앞둔 여군 최형원이 중령의 성폭력 사실을 알게되면서 벌어지는 일련의 상황들을 그려내는 작품이다. 성폭력 사건이 극의 갈등을 만드는 중심축이 되는 만큼, 자극적인 작품이 되기 쉽지만 이 작품은 쉬운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 성폭력 사건은 인물들의 대화와 전후 상황을 그리는 이미지로 암시되는 정도이다. 대신 이 작품은 사건을 알면서도 진급을 위해 누구의 편에 서야할지 고뇌하는 최형원의 모습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사건 이후 제대로 된 일상을 영위하지 못하는 임 소위의 모습이 눈에 밟히는 동시에, 진급을 원한다면 입을 다물라는 장 중령의 언사는 그녀를 갈등하게 한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최형원의 과거 회상씬이었다. 과거 대학 시절 육상부였던 최형원은 현재와 비슷한 위치에 처한다. 그녀는 코치가 자신의 후배에게 성폭력을 행사한 뒤 침묵을 요구하는 순간을 우연히 목격한다. 이때도 그녀는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침묵할 것인가. 목소리를 낼 것인가. 그 순간, 그녀는 목소리를 내기로 선택한다. 실력이 좋아 뽑힌 대표 자리를 뺏겠다는 위협에 그녀는 코치실의 창문 밖에 온힘을 다해 달리는 선수를 바라본다. 대사 없이도 그녀의 내적 갈등을 보여주는 컷이다. 그녀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최형원은 본 것을 못 본 체 할 수는 없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코치에게 후배에게 사과하라고 소리 친다.

드라마 스페셜 <양들의 침묵> 캡처


체육계와 군대는 위계질서가 강하고 남성이 많은 집단이다. 그렇기에 실제로 수많은 성폭력, 위계폭력 사건들이 일어났다. 사건화된 것만 해도 떠오르는 사건들이 적지 않지만, 아마 수면 아래에 묻힌 사건들도 많을 것이다. 그로 인해 죽음을 선택한 여성들도 있다. 이런 사건들을 떠올리며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이 작품을 시청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달랐다. 손을 내밀어주는 이들로 인해, 같이 잘 살겠다고 말해주는 이들로 인해, 임 소위는 다시금 힘을 낸다. 그들의 연대가 나에게도 와닿았기에, 어쩐지 눈물이 났다. 펑펑 울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이런 연대를 다룬 픽션이 나와줘서 기뻐서 운 것 같다. 나에게는 피해자가 연대를 선택한 이가 상처를 받지 않고 잘 사는 이야기가 필요했다.


이 작품은 서늘하고 건조하면서도 무척이나 좋았던 작품이다. 드라마 스페셜이기에 할 수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도 들었고. 이 작품의 각본은 강한 작가가 썼다고 한다. 굉장히 섬세한 작가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의 다른 작품인 <나의 가해자에게>도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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