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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OE Apr 07. 2023

‘시원‘한 사적복수의 불가능성에 대하여

드라마 <더 글로리>를 보고

<더 글로리>는 학교 폭력을 소재로 삼은 모종의 사회고발극이다. 이 작품은 학교 폭력의 가해자들이 피해자의 고발에도 불구하고 법적 처벌을 받지 않는 사회, 즉 한국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이는 사적 복수의 당위가 되며, 복수를 행하려는 자 동은이 이 작품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가해자들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에 집중하는 것이 파트 1의 이야기라면, 파트 2는 그 죄에 대해 어떤 복수를 동은이 감행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렇기에 김은숙 작가는 파트 2를 홍보할 때 이런 말을 했다. 보시는 시원한 재미를 기대해 달라는 말. 홍보를 위한 말인 것은 알지만, 시원한 ’사적 복수‘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솔직히 이 복수는 찝찝하다.


이것은 단순히 동은의 복수가 사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은 아니다. 선생에게도 법적으로도 도움을 받지 못한 어린 동은이 이런 복수를 꿈꾼 것의 당위는 이해한다. 게다가 그다지 정치적으로 올바른 작품에 애정이 없는 나도 꽤나 그녀의 선택과 그에 따른 결과들에 통쾌함을 느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찝찝함을 자아냈을까. 고민 끝에 나는 이 복수의 방법론에 문제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먼저 자본의 문제다. 그녀의 복수는 분명 돈으로 이루어진다. 연진을 꿈으로 삼고 그녀를 추락시키기 위해 악착 같이 모았다는 그 돈. 과외 학생의 성희롱적 발언까지 감내하며 모았을 돈이 적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 돈으로 복수의 도구들을 구매한다. 집과 차, 그리고 타인의 노동력까지. 사실상 동은은 복수를 외주화 한다. 가해자들이 돈으로 자신의 죄를 묻었듯, 동은은 돈으로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는 복수를 한다.


사실 이런 복수가 가능한 이유는 돈만은 아니다. 이 작품 속 등장인물은 너무나 악하다. 입체성 없는 악함. 서사 전개의 용이함을 위해 선과 악의 대결구도를 만들어 놓은 것은 이해한다. 하지만 자신만을 알고 선이라곤 전혀 존재하지 않는 인물들이 서로를 파멸시키는 과정은 너무나 쉬운 선택이다. 인간이 끔찍한 이유는 악한들에게도 이해할 수 있는 선함이 있기 때문이다. 연진이라는 주연에게는 그나마 딸인 예솔에 대한 특별한 감정을 부여하긴 했으나, 이들의 입체성이 여기까지인가 싶어 아쉬운 감정이 많이 들었다.


다음으로 복수 방식의 문제다. 이 작품의 제목인 <더 글로리>는 영광이라는 뜻이다. 동은이 연진에게 행하고 싶은 복수의 형식은 사회적 죽음이다. 즉 연진이 가진 영광을 앗아가는 것이 동은의 목표가 되겠다. 이 드라마는 연진의 영광을 앗아가기 위해 어떤 방법론을 쓰는가. <‘더 글로리’의 복수는 가해자의 성별에 따라 어떻게 달라졌는가>에서 사과집은 이 작품에서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복수의 방식이 현시대 한국의 디지털 성범죄와 닮아있다고 지적한다. 연진의 학폭 영상, 사라의 섹스 비디오, 그리고 분실된 혜정의 핸드폰 속 사진까지. 이들은 남성 가해자들과 다르게 죽지는 않았지만, 동은에 의해 사회적 죽음을 맞이한다. 이 복수의 방식은 현실에서 여성들이 불법 촬영 영상들로 죽어나가는 시대에는 너무나 부적절하다. 오늘도 죄 없는 여성들은 ‘그런 영상’들로 죽음을 선택하거나 고민한다. 사실 그런 이야기까지 나아갈 것도 없다. 이 작품에서 작품을 위해 과감히 노출을 선택한 한 여성 배우만 해도 연기력이 아닌, 몸매로 평가를 받고 성희롱적 댓글들을 받고 있다. 나는 여성들에게 실제로 가혹한 현실을 안다. 그렇기에 이런 복수의 방법론에 감히 공감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이 장애를 다루는 방식도 문제적이다. <더 글로리> 파트 2의 포스터는 감상자들의 열광을 이끌어낸 바 있다. 포스터에 복선이 있었다는 이유에서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시는 ‘남의 불행에 크게 웃던 그 입’을 잃게 된 혜정이다. 게다가 이 작품은 앞서 또 하나의 피해자인 소희의 어머니는 청각 장애를 가지고 있어, 슬픔을 배가시킨 바 있다. 혜정의 이야기는 다른 대안을 제시하기는 어려워 마냥 비판을 할 수는 없겠다. 찝찝하지만 이런 전개가 서사적 완성도를 높인다는 방어가 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를 ‘불쌍하게’ 만들려고 장애인으로 설정하는 건 이제 너무 게으른 설정이 아닐까.


비판 일색인 글을 썼지만, 나는 이 작품을 재미있게 봤다. 평소 김은숙의 글이 내 취향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이번 작품은 재밌어서 며칠 만에 봤기 때문이다. 정말 별로인 작품이면 이렇게 많은 말이 나오지도 않을 텐데, 재밌는데 아쉬운 부분들이 마음에 걸려서 오랜만에 긴 글을 쓰게 되었다.


작품을 다 보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동은은 앞서 말했듯, 직접 폭력을 행사하는 복수에는 나서지 않았다. 그리고 가해자들의 인생에 치명적인 상해는 서로가 서로에게 입힌다. 그렇기에 동은은 언뜻 무결해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동은은 알고 있다. 동은은 이제 한편으로는 피해자이자 가해자이기도 사람이다. 그렇기에 행복을 위해 복수를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 것일 테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절대로 돌아갈 수 없을, 피해 이전의 삶이다. 이 복수는 꿈이 있던 동은의 열여덟의 삶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기 위한 것이다.


이 작품은 통쾌한 복수극으로 소비되기도 하고, 그걸 유도하도록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분명히 성공했다. 그러나 나는 이 작품이 오락물로 소비되지 않길 바란다. 결국 이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누군가에게는 평생 상처로 남을 학교폭력이 더 이상은 존재해서는 안 되며, 피해자를 위한 제도적인 지원이 분명히 갖춰져야 한다는 것일 테다. 할 말은 더 많다. 하지만 끝도 없을 것 같으니 여기서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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