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 인사이트 - 애린 혹은 우령>을 보고
애린 혹은 우령, 이 작품은 과거 한국에서 장애를 매체에서 그려온 방식과 분명 다른 접근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애린과 우령이라는 한국의 두 여성 장애인을 주인공으로 삼는다. 지금까지 한국의 많은 작품에서 장애란 극복의 대상으로 여겨져왔고, 나아가 그것을 극복한 주인공들은 비장애인들에게 더 열심히 살아갈 힘을 주는 존재로 그려져왔다.
이런 서사들에 ‘장애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은 없다. 사회구성주의적인 관점으로 장애를 고찰해보자. 나는 근시에 난시를 함께 가진 사람이다. 그러나 안경과 렌즈의 도움을 통해 큰 불편함 없이 일상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기술이 발전하기 전의 사회에 살았던 이들에겐 내가 가진 시력의 문제도 장애로 여겨져왔다. 즉, 장애 또한 특정한 상황과 시간 속에서 구성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작품 속에서 허우령 씨는 시각 장애인, 문애린 씨는 뇌병변 장애인으로 소개된다. 작품 속에서 그들이 장애로 인해 일상을 살아가며 느끼는 불편함들은 어찌할 수 없는 것들도 있지만, 많은 것들이 개선이 가능한 것이다. 특히 작년부터 큰 이슈가 되어온 장애인 이동권 문제는 충분히 개선 가능한 것이다.
뇌병변 장애로 인해 휠체어 없이는 이동이 불가능한 애린 씨는 대중교통을 타고 이동하는데 불편함을 호소한다. 장애인들은 수시로 고장나는 승강기와 리프트를 마주한다. 환승이라도 할라치면, 멀리 떨어진 승강기를 찾기 위해 역 안팎을 헤매야 하기 일쑤다. 이런 사정에 수많은 장애인이 지하철 역에서 죽음을 맞이했음에도 바뀌는 것은 없었다. 그렇기에 애린 씨는 운동가로서 싸운다. 약 20살이 어리기에 바뀐 세상을 맞이했어야 할 시각 장애인인 우령 씨에게도 불편이 있다. 어느 방향으로 지하철이 향하는지 알기 위해 우령 씨는 언제 문이 열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손으로 점자를 찾아 헤매야만 한다. 지하철 벽면에 설치된 점자의 적합도는 25%에 불과하기에 그녀의 어려움은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나아간다. 이 순간은 단순히 극복의 순간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30분 가량부터 시작되는 애린 씨와 우령 씨가 지하철에서 타고 내리는 씬은 이 작품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다. 애린 씨는 이제 지하철을 타고 내리는데 아무 어려움이 없는 듯, 다른 이들처럼 핸드폰을 살피다 지하철에 탄다. 그리고 그 지하철에서 우령 씨가 내린다. 이는 마치 이동권을 위해 투쟁해온 애린 씨에게 필요한 답변으로 보이며, 그녀가 쌓아온 투쟁의 결과를 다음 세대 장애인인 우령 씨가 함께 누리며 새로운 길로 나아가는 모습으로 보인다. 사실 이는 한국 사회에서 판타지에 가까운 순간으로 보이나, 그렇기에 가장 좋았던 장면이다.
그리고 그렇게 새로운 길로 나아간 우령 씨는 이전까지는 없었던 시각 장애인 앵커에 도전하고 성취를 이룬다. 이것은 단순한 극복의 서사가 아니다. 이들이 무언가를 성취해낸 순간만이 아니라 어려움의 순간을 충분히 그려냈고, 이들의 목소리를 담아내고자 노력했기에 이 작품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현재 허우령 씨는 ’KBS뉴스12‘의 ‘생활 뉴스’ 코너를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KBS가 그녀를 채용한 것이 보여주기식이 아니라 앞으로 그녀의 활동 범위에 제약을 두지 말고 활약할 수 있게 해주길 바란다. 그리고 이런 작품들로 사회를 바꾸는데 기여할 수 있길 바란다. 그것이 공영방송이 가치를 지켜나가는 방법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