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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백한 책생활 Mar 23. 2024

사랑이 끝나면 무엇이 남을까

목정원 《모국어는 차리리 침묵》,《어느 미래에 당신이 없을 것이라고》

읽을 책을 고르다 보면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조금은 명확해지는 것 같다. 가끔 부족함을 메우고 싶어 읽기도 하지만 대체로 좋아하는 것을 더 좋아하려고 읽는다. 그것은 사랑에 가까워지는 일이기도 하다.


읽는 문장들은 매일 다른 모양이지만 실은 같은데


당신의 하루가 평온하기를,

스스로에게 다정하기를,

꿈꾸고 사랑하기를.


간지럽지만 대체로 뭐 이런 말의 변주다. 전에는 이런 문장에 안도하면서도 내가 사랑 타령이나 할 때인가, 죄책감과 조바심이 났는데 지금은 좀 다르다. 동동거려서 될 일 같았으면 벌써 됐겠지. 확신도 생겼다. 좋아하는 것만 좋아하고 살아도 큰일 나지 않는다는, 좋은 기분의 선순환에 대한 믿음 같은 것.




읽기는 언제나 즐겁지만 쓰기에 관해서라면 그렇지만은 않다. 쓰고 싶고 쓰고 싶지 않은 마음 사이에서 노트북을 열어 쓰레기를 쓰다 버린다. 잘 쓰고 싶을수록 더 그렇다. 누가 읽는다고. 그냥 자기만족이다. 자기만 보는 일기에도 거짓말을 하는 게 인간이라던데. 이왕이면 쓰는 자아는 나보다 괜찮았으면 싶으니까. 현실의 나는 우당탕탕이지만 읽고 쓰는 페르소나는 우아했으면 하니까. 이제 멋진 척하고 싶어도 팔로워 수에 기댈 수 없으니까.

목정원 산문집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을 처음 읽은 것은 3년 전 가을이다. 지금은 인스타그램 기록이 사라졌지만 다행히 당시 쓰던 일기장에 퇴고를 거치지 않은 문장들이 남아있는데 일부를 옮겨보면



사람이든 일이든 좋아하는 대상을 계속 좋아하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보다 하지 않아야 할 일이 더 많다. 그중 하나가 집착인데 무거워지지 말자, 집착하지 말자, 가볍게, 가볍게, 를 되뇌다 ‘가볍게’에 집착할 지경에 이르렀다. 무엇이 두려운 것인가. 무엇이 도래하기를 기다리는 것은 아닌지.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을 읽었다. 어느 문장 하나 허공에 뜬 것이 없어서 두고두고 열어보고 싶은 책. ‘생은 고통이고 죽음만이 안식일지라도, 생을 향해 걸어 나가는 일. 그 걸음을 흉내 내자 문득 어디로든 갈 수 있을 것만 같던 기분이 되살아났다. 나는 어디로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누구라도 나를 돌아보지 않을 것을 두려워 않고.’ (p.18)


공연예술이론을 가르치며 변호하고 싶은 아름다움을 만났을 때 비평을 쓴다는 저자는 ‘누군가 내게 파리에서 무엇을 했나 묻는다면 나는 그저 존재하는 일을 했다 하겠다.’고 적었다. ‘그저 존재하는 일’이 이렇게 아름다울 일인가. 생의 걸음을 흉내 낼 수 있다면 부끄럽더라도 그러고 싶었다. 그러지 못한다면 최소한 어느 미래에 덜 부끄럽기 위해, 사랑하는 일을 멈추지는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틈새와 균열 속 우왕좌왕하며 사랑한 흔적들이 결국 조립될 수 없는 파편일지라도, 그저 나의 것인 조각들이 남아있다면 그것으로 족할 것이라고. 나 또한 누구라도 나를 돌아보지 않을 것을 두려워 않고. (2021.11.)




대체 이 허세글을 쓴 것은 누구인가. 공감되는 것을 보면 내가 맞긴 맞는 듯. 그나마도 조립되지 못한 파편들은 사라진 지경이 되었고 여전히 아무도 나를 봐주지 않을까 두려우면서도 사랑으로 족하겠노라 다짐하는 호기로움까지.


3년이 지났고 다섯 살이었던 아이는 초등학생이 되었고 애정을 쏟던 책 계정을 잃었다. 전에 보지 못했던 것이 보이는 대신 조바심과 기민함이 옅어졌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책 덕분인지는 모르겠다. (독자로 나이 들어서가 아닐까)


고요히 고양되는 기분. 봄은 쉽게 오지 않고 지쳤던 지난밤, 고마운 분께 선물 받은 목정원 사진산문집을 펼쳤다 그날의 기분이 되살아났다. 그리하여 지난 산문집을 다시 꺼내고, 일기를 뒤적여 사진과 글을 찾고 기시감에 소름이 돋았는데, 이 문장 때문이다.


“촬영된 이미지를 일별 하는 것만으로도 내게 그 사진은 영영 존재한다. 한때 사랑이 있었던 것을 증명하며


ㅡ 그리하여 사랑이 끝난 뒤에, 사랑이 남을 것이다.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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