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은 《초록을 입고》
오은 시인에 따르면 작약은 신비로운 꽃이다. 꽃잎이 적든 많든 탐스럽지 않은 작약은 없기 때문이다.
“네가 심은 작약이 어둠을 끌고 와 발아래서 머리 쪽으로 다시 코로 숨으로 번지며 입에서 피어나고 둥근 것들은 왜 그리 환한 지 그게 아니면 지금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_ 유희경, 《심었다던 작약》
12년 전 나도 오월의 신부였다. 부케는 작약. 지난주의 둥근달도 작약만큼 탐스러웠는데. 환하고 둥근 것들을 떠올리니 마음이 밝아졌다. 나이 들수록 꽃과 시가 좋은 것을 알겠다. 흔한 일상을 특별하게 하는 시인의 시선에서 잃었는지도 몰랐던 인류애를 되찾는다. 누가 시를 무용하다 할 것인가.
지난 주말에는 《뒤라스의 말》을 읽으며 새삼 글쓰기를 다짐했더랬다. 관계가 아니라 글쓰기에 집중할 것. 쓰면서도 왜 하필 글쓰기인가, 했는데 오은 시인의 일기에 이런 문장이 있었다.
“인간은 혼자입니다. 저는 혼자라는 막막함 때문에 뭔가 쓰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내가 뭘 하고 사는지, 내가 어떻게 아파하는지, 어떻게 굴욕을 경험하고 어떻게 욕망 앞에 서는지를 거울에 비추는 일, 그것이 시 쓰기였습니다.”
다만 시가 산문과 다른 점이 있다면 ‘모호함’이 아닐까. 시는 잘 모르지만 나도 종종 문장 뒤에 진심을 숨긴다. 누군가는 알아봐 주기를 바라면서. 언젠가 《읽는 슬픔, 말하는 사랑》에서 황인찬 시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자신의 삶을 말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지만, 시라는 유연하고 자유로운 형식을 빌려 말하면 삶에서 해방된다고. 그것이 시의 중요한 효용이라고. 그러나 시는 어떤 효용도 갖지 않아서 역설적으로 빛나기도 한다. 효용보다 존재 자체에 빛이 있는 것들. 그런 사물은 한 글자인 이름과도 닮아있다. 시, 꽃, 달, 아마도 책.
제인 오스틴은 소설 《이성과 감성》에서 이렇게 적는다. “말이나 생각이 아니라 행동이 우리를 정의한다.” 때로 생각과 감정은 혼란스러워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은 시인의 ‘시로운 생각’이 좋았던 것도 그래서다. 시로움은 익숙한 상태를 벗어나 낯선 존재에 가닿으려는 몸짓. 몸을 움직여야 마음을 움직일 수 있고, 따라서 움직이자! 는 말은 상태를 사태로 만들고자 독려하는 말이라고. 걷고 발견하고 사색하고, 길을 잃으면 평소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그것이 쓰기로 연결된다. 그러므로 모든 쓰기는 마음을 쓰는 일이라고.
시인의 언어는 다채롭다. 우리말이 이렇게 미묘하고 아름다웠나 감탄한다. 봄이 ‘해맑아지는’ 계절이라면 여름은 ‘흐드러지는’ 계절이고 ‘넘쳐흐르는 게’ 기백이라면 ‘넘칠락 말락’하는 것은 희망이라니. 다가올 계절에는 넘칠 듯 말 듯한 희망으로 몸을 움직이고, 글을, 마음을, 사랑을 쓰자고 생각했다.
시가 무용하지 않은 것처럼 사랑도 사치가 아니다. 어제는 ‘무엇이 좋은 삶인가’라는 백영옥 칼럼에서 사랑에 관한 좋은 문장을 읽었다. 우리를 진정 행복하게 하는 것은 여러 사람과 사랑에 자주 빠지는 게 아니라 그 사랑을 오래 유지하는 것이라고. 과학적 근거도 있다. 20년 간 행복을 연구해 온 하버드 의과대학 정신과 로버트 윌딩거 교수에 따르면 좋은 삶은 좋은 관계에서 온다. 얼마나 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관계의 신뢰와 친밀함의 정도라는 것. 사랑의 시작은 설렘이지만 지속하게 하는 것은 이해와 인내다. 결혼 12주년을 맞아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다.. 이해와 인내..
오은의 5월, 《초록을 입고》 는 출판사 난다가 매달 출간하는 ‘시의적절’ 시리즈다. 열두 명 시인의 시, 에세이, 일기가 담겼다. 라인업을 보니 7월 황인찬, 8월 한정원, 12월 박연준 시인이다. 하 설렘.. 희망은 날개 달린 게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