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첼 아비브 《내게 너무 낯선 나》
스무 살 여름이었나, 우연히 도서관에서 anorexia 관련 책을 발견하고 놀란 기억이 있다. 나 같은 사람이 이렇게 많았구나.
학교 심리상담 센터를 찾았다. 그날도 무척 더웠다. 학위 과정 중인 것 같은 젊은 여자 상담사 앞에서 말을 꺼냈다. 관련 책을 좀 읽었고, 책에 따르면 거식증(anorexia)과 폭식증을 오가는 상태며, 행동 통제가 쉽지 않다고. 강박증이라는데 맞나요. 이따금 울먹였던 것 같다. 여자는 경청했다. 상담의 기본인 무조건적 수용과 공감의 표현이 역력했는데도 그 후 나는 상담소를 찾지 않았다. 안쓰럽다는 표정이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그 분 탓은 아니다. 그저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핍과 통제 불능을, 말하자면 정신 질환을. 소리 내어 말하는 순간 어렴풋했던 문제가 기정사실이 될 것 같아서.
이야기된 슬픔은 더는 슬픔이 아니라던가. 고통스러웠지만 인정된 문제는 차츰 해결됐다. 길고 지난한 과정이었다. 지나고 보니 잃은 것도 많았다. 중요한 시기에 섭식장애같은 일로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았다면 훨씬 생산적인 성장을 하지 않았을까. 못내 아쉽다가도 삶이 얼마나 쉽게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었는지를 떠올리면 감사해진다. 그 경험 덕분에 나는 더 많이 읽었고 더 많이 슬퍼했고 어떤 세계를 이해하려 하는 대신 인정하게 됐다.
무탈한 일상이 감사해지는 것. 그게 불행이 주는 미덕일 테다.
레이첼 아비브의 《내게 너무 낯선 나》는 정신의학적 설명의 한계에 부딪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논픽션이다. 아무리 진솔한 글이 좋아도 부끄러운 과거를 널리 알릴 필요는 없다. 실은 지금도 고민이 된다. 일기는 인스타에 쓰는 게 국룰이라지만 괜히 치부만 드러내는 게 아닐까. 하고 싶어 하는 일이지만 허울 좋은 자기 치유도, 공감받지 못하는 글을 오래 쓸 자신도 없는데.
얼마 전 세바시 강연에서 폭식증과 심리적 허기를 고백한 아나운서에 위로받은 기억이 있다. SNS에 돌아다니는 숏폼을 보니 정작 알맹이는 빠져있고 얼마나 열심히 공부해서 서울대에 입학했는지만 부각되더라. 여전히 부족하다는 결핍감, 더 나은 내가 되지 못한다는 강박, 스스로를 벌하고 후회하는 악순환. 드러나지 않지만 여전히 비슷한 문제들로 고통받는 여성들이 있을 거라고 믿는다. 이 책이 반가웠던 이유다. 거식증, 조현병, 우울증, 산후 우울증까지, 정신건강의학이 포착하지 못한 복잡한 인간성에 대한 “꼼꼼하게 연구하고 우아하게 구성된 최고의 논픽션.” “회복이 아닌 변신이 우리의 길이 된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들은 스스로를 자유롭게 해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이야기에 스스로를 가둬버린다.” p.41
언어에는 힘이 있어서 소리내어 말하는 순간 공명하며 사실에 가까워진다. 글쓰기도 비슷하다. 심리상담이 어려웠던 이유는 스스로 ‘환자’가 된 느낌 때문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책에서 저자는 정신 질환 대신 ‘정신 질환 초기 상태’에 주목한다. 그것은 ‘뭔가 강렬하게 자신을 망가뜨리는 것 같지만 아직은 자신의 정체성과 사회적 세상을 재구성할 정도까지는 가지 못한 상태’다.
“왜 어떤 이들은 정신 질환을 앓고도 회복되는 데 반해 어떤 이는 그 질환을 자신의 커리어인 양 지니고 살아가는지”에 대해 답하려면 ‘정신의학적 모델’과 사람들이 의미를 부여하는 ‘이야기’ 사이의 거리에 더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나아가 정신 질환으로 분류된 완결된 과학적 체계 바깥 가장자리에 존재하는, 드러나지 않은 정신세계와 소통할 도구로 택한 것이 글쓰기다.
가벼운 우울은 누구에게나 있다. 기질적으로 감정 기복이 큰 사람들도 있다. 모두를 조현병이나 우울증으로 정의한다면 과잉 진단된 암처럼 환자는 넘쳐날 것이다. 다양한 사례와 저자의 경험이 담겼지만 아쉽게도 해결책은 제시되지 않는다. 명상, 운동, 독서, 글쓰기. 유난스러워 보여도 루틴을 지키려는 이유는 과거의 고통스러운 상태로 돌아가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진짜 부끄러운 것은 결핍이 아니라 결핍을 방치하고 삶을 원망하는 일일 테니까. 저마다 문제가 다르듯 답도 하나가 아니겠지만, 매일 조금씩 더 단단하고 자유로워지기를 희망하며. 때로 지치고 여전히 불안한 날들도 있지만.
병에 삶을 내어주지 않고 꿋꿋하게 자기 삶을 살아낸 불안정한 영혼들의 입체적 연대기이자, 정신의학의 빈틈을 메운 언어의 성취. 때로 같은 경험을 통과한 이들의 존재는 어떤 위로의 말보다 큰 힘이 된다. 우리는 모두 매일 무언가를 극복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