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람마냥 May 27. 2022

자연인 주는 신비함에 하루하루가
감사한 골짜기다.

(정원에서 만난 봄, 말발도리)

오랜만에 느긋한 일요일이다. 언제나 무슨 일인가 있었던 일요일, 오늘따라 앞산엔 안개가 가득하다. 부지런한 이웃집 닭이 목을 길게 늘이고 있다. 동료 닭이야 자든지 말든지 밝은 빛이 오고 있다는 것을 열심히 알리려나 보다. 아직 동네 지킴이는 묵묵히 새벽을 즐기고 있는 골짜기, 오늘도 어김없이 잡초와 전쟁을 벌여야 한다. 돌아서면 키를 키워버린 잡초들, 크는 것이 주업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작은 뜰에는 붉고 화려한 꽃들은 자취를 감췄지만 어느새 은은한 꽃들이 대세다. 화려함보다는 잔잔한 하얀 꽃들이 여기저기에서 불쑥불쑥 꽃을 피운다. 해발 300m 정도로 주변보다 200여 m가 높은 지역에 있는 골짜기다. 


온도가 적어도 3~4도는 차이나는 덕분에 에어컨이 필요 없고, 모기 걱정도 않는 곳이다. 고랭지 배추가 자라도록 서늘한 공기에 늘 상쾌하다. 겨울에는 추위가 좀 걱정이지만 한없이 살기 좋은 곳이다. 봄부터 곳곳에서 꽃이 피기 시작하면 꽃구경을 하고 난 후, 꽃이 질 무렵 이 골짜기엔 꽃이 피기 시작한다. 세상 꽃구경이 끝날 듯하면 우리 동네 꽃을 구경하면 되는 골짜기다. 우선은 벚꽃이 그러하고 개나리가 그랬다. 지금 이 골짜기엔 아카시 꽃이 한창이다.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이팝나무가 꽃을 가득 실었다. 주변 지역의 꽃을 구경하며 아끼고 아낀 골짜기 꽃을 볼 수 있어 좋다. 은은한 꽃을 보며 잡초와의 전쟁을 또 시작했다. 

이층 서재 앞에 핀 하얀 아카시 꽃

크는 것이 주업이 잡초, 햇살이 뜨겁기 전에 해결해야 한다. 서서 보는 잔디밭과 앉아서 보는 잔디밭은 전혀 다르다. 시력조차 침침한 늙어가는 청춘, 안경을 끼었어도 서서 보면 푸른 잔디밭이다. 하지만 앉아서 보는 잔디밭엔 자디잔 풀들이 가득하다. 언제나처럼 아내도 덩달아 따라나선다. 잔잔한 풀과의 전쟁을 하는 아침, 아무 생각이 없다. 아무 걱정도 생각도 없는 아침이다. 수채화를 하는 시간과 풀을 뽑는 시간은 똑같다. 아무 걱정도 없고 생각이 없어 좋다. 수행하는 자세로 아침 공기를 즐기면 된다. 서서히 잔디밭을 점령해 나가는 사이 암탉도 움직이기 시작한다. 동네 지킴이도 매칼없이 한 번 짖어 준다. 시골 동네 자연 극장의 막이 오르는 순간이다. 서서히 아침 햇살이 산을 넘어와 골짜기를 비춰준다. 


잡초와의 전쟁을 멈춰야 할 때가 됐다. 따끈한 햇살 속에 전쟁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서서히 햇살이 산을 넘는 순간 다시 공격을 개시해야 한다. 서둘러 잔디밭에서 퇴각하며 텃밭으로 전쟁터를 옮겼다. 잡초를 뽑고 물을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을 흠뻑 줘야 토마토가 열매를 붉힐 것이고, 푸르른 채소가 정신을 차릴 것이다. 푸르른 고추를 바라봐야 하고, 옆자리에 도라지도 무시할 수 없다. 잔잔한 흰 꽃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뒤뜰에서 향기를 뿜어내는 더덕도 무시할 수 없다. 보는 것만으로도 싱그러운 식구들, 여기저기서 봐달라고 손짓을 한다. 서둘러 물을 주는 사이 하얀 꽃이 눈에 들어온다. 하얀 꽃은 앞산에서도 불쑥 튀어나왔다. 

서늘한 지역이라 아직도 꽃을 망설이고 있는 금계국

하얀 아카시 꽃이 향기를 뿜어 내고 있다. 다른 곳에선 이미 볼 수 없는 꽃이 맑은 흰색으로 나타났다. 저렇게 하얀빛이 어떻게 나올 수 있을까? 초록색으로 가득한 이층 서재 앞에 불쑥 나타난 것이다. 여기에 자리 잡길 얼마나 잘했던가? 벚꽃이 자취를 감추고 야광나무가 존재감을 드러냈었다. 야광나무가 자취를 감추자마자 나타난 하얀 꽃이 찔레나무였다. 지난해 칡넝쿨과 환삼덩굴로 기를 펴지 못했던 찔레나무다. 어느 날 장화를 신고 긴 옷으로 무장한 아내, 용감하게 온갖 덩굴과 전쟁을 벌였다. 적벽대전만큼이나 험난한 전쟁터에 온갖 덩굴들이 자리를 잡았었다. 기어이 승리를 쟁취하고 귀환한 아내 덕에 하얀 찔레가 방긋 웃고 있는 아침이다. 식물의 생명력이 참 모질기도 하고 신비스럽다. 극성스러운 금계국 이야기다.


지난해 몇 포기의 금계국이 자리를 잡았었다. 마당 둘레에 심은 구절초 기세에 눌려 사라진듯한 금계국이었다. 일 년간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금계국이 잔디밭 가장자리로 가득 자리를 잡았다. 구절초가 방심하는 사이에 불쑥 올라와 공격을 개시했다. 어마어마한 대군을 이끌고 잔디밭 가장자리를 점령하고 말았다. 얼마나 많은 숫자인지 구절초도 어리둥절한 형국이다. 너무 많아 뽑아낼 수도 없고, 그냥 둘 수도 없는 금계국이다. 아내는 그냥 두란다. 여름을 장식해 줄 꽃이려니 생각하란다. 너무 많은 금계국을 그냥 두기로 했지만 주변의 꽃범의 꼬리와 싸움이 될까 걱정이다. 곳곳에 세력을 넓혀가는 꽃범의 꼬리가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꽃범의 꼬리와 금계국이 한판 대전을 벌일 기세다. 그 사이 하얀 꽃이 배시시 웃으며 나타났다. 

때죽나무(snow bell) 꽃이 하얗게 피었다.

저 꽃이 무엇이더라? 많은 꽃들로 머리가 복잡해진다. 지난해에는 알았었는데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세월의 힘이야 어쩔 수 없는 노릇 아닌가? 서둘러 정신을 차려보니 말발도리의 하얀 꽃이다. 꽃이 지고 난 열매가 말굽에 끼는 편자 모양이라 하여 말발도리라 하는 꽃이다. 작은 키지만 하얀 꽃으로 몸을 감추고 빛을 발하고 있다. 앞산에 하얀 아카시 꽃과 대적할 만한 맑은 하양이다. 잔디밭 가장자리가 하얗게 빛을 발하고 있는 사이, 불두화가 꽃을 드러냈다. 꽃모양이 부처님 머리 모양을 닮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역시, 하얀 꽃으로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껑충한 키에 하얀 꽃으로 치장한 불두화 꽃이 작은 바람에 일렁이고 있다. 오래전, 어머니의 화단에도 있었던 꽃이다. 


말발도리보다는 큰 키에 하얀 꽃을 달고 있는 만첩 빈도리 꽃이 하얗게 피어났다. 말발도리와 비슷하지만 줄기 속이 비어있다고 해서 빈도리요, 꽃이 겹쳐 핀다고 하여 만첩까지 붙어 있는 만첩 빈도리다. 이름도 알기 어려운 만첩 빈도리도 무시할 수 없는 하얀 꽃이다. 껑충한 키에 하얀 꽃을 복스럽게 달고 있는 아침이다. 하양이라면 무시할 수 없는 때죽나무도 꽃을 피웠다. 때죽나무, 잎과 가지를 짓이겨 냇물에 풀어놓으면 물고기들이 떼로 죽었다고 하여 떼죽나무가 때죽나무로 변했다는 나무다. 영어로는 Snow bell로 종모양의 5 각형 꽃이 매달려 있는 모양이 종과 같다 하여 붙여인 이름인가 보다. 하늘가에 살랑거리는 때죽나무 꽃이 하양으로 화답하고 있다.   

홍화 산사나무

서서히 하얀 도라지가 꽃을 피우고, 고추마저 하얀 꽃으로 으스대고 있다. 하얀 꽃으로는 우물가 보리수 꽃도 무시할 수 없었는데, 이젠 꽃을 지우고 붉은 열매를 맺으려 한다. 마치 붉은 열매가 붉은 꽃 모양으로 달리는 보리수나무다. 우물가에 심은 앵두나무도 하얀 꽃의 흔적을 지웠으니 빨간 앵두를 고대하고 있다. 여기에 붉은  꽃이 다시 나타났다. 키가 커다란 홍화 산사나무다. 분홍빛에 붉음을 조금 먹은 홍화 산사나무, 손녀의 화단을 지키는 나무다. 하양으로 물든 화단을 붉음으로 어울림을 주는 홍화 산사나무가 꽃으로 화답한다. 잔디밭의 잡초와 일전을 벌이려 나온 아침이다. 풀을 뽑다 눈길을 잡은 것은 골짜기에 피기 시작한 하얀 꽃들이다. 붉기도 하고 노랑으로 단장한 꽃도 아름답지만, 하양으로 맑게 단장한 꽃도 숭고함을 전해주는 자그마한 정원이다. 무념무상으로 꽃을 만나고, 잔디를 밟으며 맑은 공기와 함께하는 아침은 고요하기만 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직도 굴뚝엔 연기가 피어오른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