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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마냥 Jun 02. 2022

붉음이 가득함은 계절의 환희였다.

(화단에서 만난 붉음, 붉은 병꽃)

골짜기는 오늘도 어김없이 평화스럽다. 먼산에서 들리는 뻐꾸기 소리 여전하고, 말 많은 참새들은 처마 밑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앞 산에 하양이 뉘엿뉘엿 저물어 갈 무렵, 그 자리엔 푸름이 깊어만 간다. 거무스름한 녹음이 연초록을 물들였고, 푸른 소나무는 송화가루를 연신 흩뿌리는 골짜기다. 이름만 예쁜 산까치는 벚나무에 매달려 허기를 달래느라 여념이 없고, 서서히 봄이 저물어가는 골짜기에 여름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다. 한 낮엔 덥다는 말이 쌀짝 나오려 하는 골짜기다. 


서늘한 바람에 이끌려 나선 현관엔 오늘도 어지럽다. 집을 지으려 참새가 물어 온 지프라기에 온갖 검불이 가득하다. 내 집인지 새집인지 알 수 없지만 새들의 등살에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새를 쫓으려 열심히 돌아가는 바람개비는 어느덧 새들의 동무가 된 지 오래다. 조용한 골짜기가 살아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보여주는 바람개비가 되고 말았다. 봄철에 이르러 피었던 갖가지 꽃이 자취를 감추었다. 꽃이 진 자리엔 곳곳에서 열매를 맺기 위해 분주한 골짜기다. 수돗가엔 보리수가 열매를 맺었고, 토마토도 큼직한 열매를 키워가고 있다. 서서히 푸름이 붉음으로 물드어 가는 골짜기, 여기에 진한 붉음이 찾아왔다. 

단풍나무

분홍빛 하양으로 꽃을 피웠던 병꽃나무였다. 하지만, 여느 병꽃나무와 다르게 우두커니 서 있던 병꽃나무가 붉은빛 꽃을 피웠다. 분홍빛 하양과 다름을 보이기 위한 붉은 꽃을 피운 병꽃나무다. 자잘한 하양 빛 병꽃나무와는 꽃의 크기부터 다르다. 짙은 분홍빛에 물든 붉은 꽃을 큼직하게 피운 것이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붉은 꽃이 정원을 비추는 사이, 공작단풍도 붉음으로 옷을 해 입었다. 초봄에 초록으로 시작한 옷이 어느새 붉음으로 물을 들인 것이다. 살랑이는 바람 따라 옷깃을 여미며 붉음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병꽃나무야 며칠이면 꽃을 지울 테지만 공작은 가을까지 마당을 지켜줄 소중한 손님이다. 붉음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붉은 단풍나무가 여기저기에서 손을 들고 있다. 몇 년 전에 고향집 언덕에 있던 단풍나무를 이식해 놓은 것이다. 어린 시절이 그립고 잎이 아름다워 몇 그루 옮겨 심었다. 작은 언덕에서 자리를 잡아 열심히 살아온 단풍나무다. 아직은 어리지만 세월이 더 가면 엄청난 위엄을 보여줄 단풍나무다. 공작단풍의 잔잔한 붉음에 비해 진한 빨강 잎이 아름다움을 과시하고 있다. 곳곳에 심어진 단풍잎이 아침 바람을 맞이하고 있는 사이, 낮은 키를 자랑하는 패랭이 꽃이 진함을 과시하고 있다. 패랭이를 닮았다는 패랭이 꽃이다. 

패랭이 꽃

꽃 모양이 오래전 민초들이 쓰던 패랭이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생명력이 강해 돌 틈에서도 싹을 틔우는 대나무란 석죽(石竹)이라고도 불리는 꽃이다. 진함의 정도는 빨강이라고 해야 맞을 듯한 진한 빨강이다. 진한 빨강은 가을녁의 코스모스에서 만날 수 있고, 가을날 마당 위를 맴도는 고추잠자리에서도 만날 수 있는  빨강이다. 어떻게 저런 빨강이 나올 수 있을까? 붉음을 훨씬 지나, 진한 빨강으로 색을 칠한 패랭이가 잔디밭 가에 자리 잡고 있다. 시골집을 마련하고 지인이 선물해준 패랭이 꽃이다. 골짜기에 여름이 깊어지면 빨강은 여럿이서 찾아올 것이다.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식구들이 많기 때문이다.


빨강 중에도 진한 빨강을 자랑하는 장미가 있지만, 아직도 서늘한 골짜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수돗가에서 자리 잡은 수줍은 장미, 꽃 몽우리를 맺고 있지만 망설이고 있다. 이웃동네는 빨강으로 치장한 장미가 담벼락에 올라 붉음을 자랑하고 있고, 여기저기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언젠가 모두가 꽃을 지울 무렵에 슬그머니 나타나 꽃을 보여줄 생각인가 보다. 서서히 꽃을 피울 자세를 잡고 있으니 한껏 기대하고 있는 장미다. 붉음에는 보리수 열매를 무시할 수 없다. 초봄에 하얀 꽃으로 뒤덮은 보리수나무, 어느새 꽃을 떨구고 푸른 열매를 가득 맺고 있다. 어떻게 저리도 많은 열매를 맺고 있을까? 서서히 붉음으로 물들일 태세인가 보다. 

공작 단풍

수돗가에 그늘을 주는 보리수 열매의 빨강은 대단하다. 햇살이 찾아오고 거센 여름이 지나면 빨강 열매가 가득할 것이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붉음, 한바탕 붉음의 잔치를 고대하고 있다. 여기에 작은 텃밭의 토마토가 서서히 준비하고 있다. 울퉁불퉁한 근육으로 살을 찌우며 기회를 엿보고 있는 텃밭이다. 뒤 울의 텃밭 고추는 또 어떤가? 하양으로 꽃을 장식한 고추다. 빨강으로 익어가는 고추가 있을 무렵엔 하늘에도 빨강이 있다. 가을을 불러오는 진한 빨강 코스모스가 춤출 무렵에 찾아오는 고추잠자리다. 마당 위를 뱅뱅 돌며 혼을 빼앗아가는 고추잠자리, 언제나 나른함과 가을을 알려주는 손님이기도 하다.


봄이 점점 익어가는 날, 뜰 앞엔 붉음이 찾아와 잔치를 벌였었다. 잔잔한 꽃잔디가 사방으로 꽃을 피워 흥청거렸고, 빨간 영산홍이 가득한 정원이었다. 진한 튤립이 꽃을 피워 손녀의 화단을 가득 메웠었다. 튤립이 꽃을 감추면서 금낭화가 꽃을 달고 일렁였었다. 한바탕 꽃 잔치가 지나고, 다시 푸름을 이겨낸 붉음이 가득한 골짜기의 한적한 마당이다. 서서히 이 붉음도 저물어가면 여름은 한 복판으로 자리할 것이다. 비바람을 견디며 여름을 넘긴 푸름은 검푸름으로 물들 것이다. 잔잔한 잔디밭에 붉음이 가득한 아침나절, 새들은 알을 낳고 부화를 위해 오늘도 분주하기만 한 골짜기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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