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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마냥 Jun 05. 2022

골짜기는 오늘도 소란스런 아침이다.

(비 오는 아침, 마당 끝에 핀 꽃)

좋아진 세월인지 무심한 세월인지 궁금한 아침이다. 창문 너머엔 굵직한 비가 내리는데 소리는 없다. 두툼한 이중 창이 생각마저 멎게 하는 세월이다. 빗소리가 듣고 싶어 얼른 창문을 열었다. 오래전 초가지붕 위에 길게 늘어진 감나무, 빗방울이 머물다 떨어지는 소리가 듣고 싶어서다.   


창문을 열자 정다운 빗소리가 넘어왔다. 오래 전의 그 소리는 아니지만 푸근한 빗소리는 맞다. 고개를 들어 얼른 바라본 앞산, 뿌연 안개가 넘어왔다. 빗소리와 안개가 어우러진 조합, 어느 곳에서 이런 풍경을 만날 수 있을까? 조용한 산동네의 모습이다. 한참을 바라보고 있는 산동네, 조용한 풍경 속에 능숙한 소리들이 스며든다. 우선은 몸집을 불린 도랑물 소리다.


시골집을 마련하는데 대단한 역할을 한 작은 도랑이다. 뒤뜰을 너머 산을 오르는 곳엔 작은 옹달샘이 있었다. 산토끼가 찾는 옹달샘이다. 사시사철 끊임이 없는 옹달샘, 옹달샘을 넘은 물이 아기자기한 선을 그려 나갔다. 가느다란 산속엔 가재가 있고, 분홍 꽃이 핀 고마니 풀이 그득했었다. 오래 전의 도랑을 만나고 싶었던 시골집을 만난 것이다.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의 도랑에서 나는 소리다. 사시사철 끊임없는 도랑물이지만, 밤새 내린 봄비가 몸집을 불려 놓았다. 옹알거리던 도랑물이 힘을 얻은 모양이다. 어느새 콸콸은 아니지만 비슷한 소리로 스며든다. 그 사이에 이웃집 닭이 또 참견을 한다. 아무 때나 끼어드는 무법자다. 

앞산에 안개가 내렸다.

동이 트자마자 긴 울음으로 존재감을 나타내는 수탉이다. 새벽 5시도 되기도 전이다. 초저녁부터 잠을 청하고, 새벽빛을 알아 채린 이웃 친구다.   


저녁 숟가락을 놓으신 어머니, 고단한 하루를 마감하신다. 농사일로 고단함을 이길 수 없는 노구를 뉘여야만 했다. 서둘러 잠을 청하신 어머니도 새벽이면 일어나셔야 했다. 부지런함이 아닌 고단한 삶의 탓이었으리라. 고담함을 덜기 위한 초저녁 잠은 새벽잠을 물릴 수밖에 없었다. 아침 닭소리가 불러준 오래전 기억이다. 수탉이 울고 나면 암탉들의 차례다. 꼬꼬댁 거리는 암탉 소리가 빗소리에 불쑥 스며든다. 빗소리가 여전히 추적거리 때, 산새 소리가 빠질 리 없다. 연초록 앞산에 뿌연 안개와 어우러진 아름다움이다. 여기저기서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오늘도 새벽부터 할 말이 많은 산새들이다. 유연한 음률로 오르내리는 높낮이는 여전히 신비롭다. 어떻게 저런 소리를 낼 수 있을까? 연신 들려오는 저 소리는 다시 한번 들어보라는 앙코르 소리다. 여전히 신비함만 주고 간다. 처마 밑을 오고 가는 산새들도 바쁘다. 먹을거리를 찾아가기도 하고, 이웃동네 마실을 가기도 하나보다. 먼 길을 가다 쉬는 곳은 연초록 나무 위다. 편안한 연초록을 무대 삼아 살아가는 산새들이다. 초록 위에 집을 짓고, 연초록을 무대 삼아 하루를 살아간다.   


인간이 흉내 내지 못할 소리가 또 들려온다. 신기한 산새 소리가 빗소리와 어우러진다. 빗소리 속에 구구대는 닭소리가 도랑물과 놀고 있다. 느닷없이 수탉이 방해를 한다. 긴 울음으로 존재감을 확인하는 사이에 이웃이 일어났나 보다. 

작은 도랑에 병꽃이 피었다.

닭장으로 달려가 모이를 주는 소리다. 닭과 말을 주고받는다. 잘 잤느냐는 이웃의 말이 정스럽다. 닭과 주고받는 소리가 사람과 나누는 소리다. 처음엔 사람과 나누는 소리인지 알았다. 여전히 닭과 주고받는 소리가 들리는 사이, 사나운 소리가 들려온다. 이름만 아름다운 산까지 소리다. 어느 이웃이 마음을 상하게 했나 보다. 무섭고도 공격적인 소리로 이웃을 위협하는 소리다. 이사를 오면서 처음 만났던 산까치, 대단한 욕심쟁이임을 알았다. 처마 밑에 집을 짓지 못하게 하면 사정없이 공격을 하곤 했다. 기나긴 싸움 끝에 산속으로 물러가긴 했지만 아직도 찝쩍거리는 산까치다. 추억거리는 빗소리는 여전하다. 


연초록 위에 내리는 골짜기 빗소리가 정겨운 풍경이다. 참나무 잎은 아직 연초록인데, 벚나무는 조금 진해졌다. 엊그제 바람에 날려버린 꽃가루를 잊었는지 어느새 초록으로 옷을 해 입었다. 순식간에 변해가는 골짜기다. 하얗게 꽃을 피운 조팝나무가 풍성하다.   


조팝나무가 꽃을 피우면 농사일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못자리를 하고 고추모를 심으며 시작되는 농사철이다. 긴 논둑을 정리하고 잔잔한 물을 모아야 했다. 일 년을 책임질 모를 길러야 하기 때문이다. 하얀 조팝나무가 꽃을 피웠고, 그 위에 봄비가 내린다. 올망졸망 하얀 꽃에 내리는 봄비, 마냥 정겨운 모습이다. 그 사이 많은 산새들이 깨어났다. 무슨 소리인지 지껄이는 산새들이 날아간다. 하늘에 둥근 곡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사이에 셋방 식구들이 찾아왔다. 처마 밑 식구들이다. 

손녀의 화단에 꽃이 가득

봄이 되었으니 알을 낳고 새끼를 부화해야 한다. 새벽부터 바지런을 떠는 이유이다. 처마 밑을 연신 드나든다.

검불을 물어 나르고, 연신 지껄이는 소리가 정겹다. 시끄러움도 어느새 정겨움으로 바뀌는 골짜기의 삶이다. 

연초록이 내려앉은 골짜기의 아침, 조용한 앞산에 소리가 가득해 좋다.  


정겨운 도랑물이 저음으로 무게를 잡으면 긴 소리로 수탉이 골짜기를 깨운다. 여기에 산새들이 산을 오가며 지휘를 한다. 높이 올랐다 내려가고, 신비한 소리로 조율한다. 가끔은 심술쟁이 산까치가 훼방을 놓지만 골짜기의 어울림을 깨지는 않는다. 암탉이 구구 거리며 모이를 찾으면, 이웃이 얼른 달려간다. 가끔 연초록이 바람에 몸을 털면, 머물던 빗방울이 몸서리를 친다. 연초록에 스며든 골짜기 소리들이 오늘따라 평화스러운 아침이다. 평화가 여기에 가득 모인, 골짜기의 비 오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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