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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마냥 May 25. 2022

아직도 굴뚝엔 연기가 피어오른다.

(연기 나는 골짜기)

배산임수, 골마다 집들이 들어서 작은 동네가 자리 잡은 골짜기의 형상이다. 햇살이 가득한 양담말과 윗말이 있고, 음지에 자리 잡은 음담 말이 있었다. 너나 할 것 없는 초가지붕이 이마를 맞대고 있고, 초가지붕 위로는 거대한 감나무가 넘실거렸다. 봄부터 겨울까지 초가지붕을 지켜주는 감나무다. 감나무 밑으로 붉은 흙으로 발라진 벽, 뒤꼍으로는 어김없이 시커먼 굴뚝이 자리 잡고 있었다. 허름한 철사줄로 묶여 위태롭게 버티고 있는 굴뚝, 사시사철 뿌연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사람이 살고 있음을 알려주는 거룩한 굴뚝이었다.


햇살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가까스로 굴뚝에선 연기가 피어오른다. 옹기종기 식구들이 모여 먹을 밥을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서둘러 많은 보리쌀이 섞인 쌀을 씻어 밥을 지어야 했다. 부족하지만 다정함이 묻어 있는 솥엔 언제나 어머니의 손길이 닿아 있었다. 모두가 삶을 지탱하기 위해 허름하지만 굴뚝에 연기를 피워야 했기 때문이다. 봄부터 가을까지 등짐을 지어야 했고, 아궁이를 넣어줄 나무를 해야만 했다. 모락모락 연기가 피워 오를 굴뚝을 채워야 하기 때문이다. 단순한 굴뚝 연기가 아닌 삶의 한이 담긴 굴뚝 연기다. 가을을 넘어 긴긴 겨울이 지나고 정월 대보름이 되었다.

한가한 들에는 모를 심었다.

지난가을, 아끼고 아껴 남겨 놓은 쌀을 씻었다. 일 년 농사를 잘 되게 해 달라는 치성을 올리기 위해서다. 붉은팥을 삶고, 쌀을 씻어 시루떡을 해야만 했다. 커다란 솥에 떡시루를 얹고 불을 지핀다. 은근하면서도 따끈한 불을 지피면 굴뚝이 반응을 한다. 푸르면서도 검은 연기가 피어오른다. 온 동네의 굴뚝이 바쁜 정월 대보름이다. 붉은팥을 넣은 떡시루를 대청에 놓고 치성을 올린다. 아들, 딸 잘 되라는 주문과 함께 빠질 수 없는 것이 풍년을 비는 것이었다. 일 년 농사가 실해야 정다운 굴뚝에 연기를 피울 수 있다. 끊임이 없는 굴뚝 연기를 위한 농사철이 시작된 것이다.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는 굴뚝, 정답기도 하지만 살아 있음의 표시이기도 한 것이다.


굴뚝 연기를 만난 지는 꽤 오랜 세월이 흘러갔다. 그리움 속의 굴뚝이 되어 사진에서나 만나는 굴뚝이다. 다시 만날 수 없었던 굴뚝 연기, 시골로 보금자리를 옮기면서 만나는 행운을 얻었다.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골짜기에 자리를 잡은 지 몇 년이 되었다. 동네 입구에 들어서면 멀리 아담한 산자락이 동네를 에워싸고 있다. 여기에 동네가 자리 잡은 것이다. 동네로 들어서는 입구엔 외딴집이 한채 있다. 산 자락 밑으로 아담하게 자리 잡은 외딴집이다. 외딴집에서 늘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다. 지나는 길을 멈추고 바라본지도 몇 년이 흘렀다. 봄부터 겨울까지 늘 있는 굴뚝 연기다. 저 집은 어떤 집일까?

찔레꽃이 한창이다.

검은 연기로 얼룩진 부엌이 있고 부뚜막이 있으며, 아궁이가 있을까? 검은 연기가 가득한 부엌에 찬장이 있을까? 찬장에는 간장 종지와 하얀 사기그릇이 몇 개나 있을까? 찬장 위에는 작은 개다리소반(狗足小盤)이 엎어져 있어야 제격이다. 다리가 개다리를 닮았다 하여 개다리소반이라 하는 어머니 부엌의 기억이다. 깨끗한 부뚜막 위엔 행주가 놓여 있고, 커다란 솥뚜껑은 언제나 윤기가 흘렀다. 물로 닦고, 기름으로 윤을 내는 어머니의 정성이 서려 있기 때문이다. 때마다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솔잎을 때기도 하고, 장작을 지피기도 했다. 가끔 아궁이가 막히지만 어김없이 정다운 소리가 들렸다. 아궁이를 뚫으라는 정겨운 소리였다.


허름한 자전거 뒤엔 긴 철사줄이 사려져 있고, 끝에는 아궁이를 뚫을 철사가 엉켜있다. 자전거를 탄 아저씨, '뚫어!'라는 소리를 연신 내지른다. 이 집, 저 집에서 손짓하면 아궁이에 낀 재를 털어내는 아저씨다. 굴뚝으로 시원한 연기가 피어나게 하기 위함이다. 시원하게 구들장 밑을 뚫고 장작을 지핀 아궁이, 붉은 불덩이가 남았다. 어머니가 불덩이를 섣불리 허비할 리가 없다. 된장을 끓이는 뚝배기가 놓이고, 귀한 고등어가 구워져야 했다. 가끔은 고소한 기름이 발라진 김이 구워져야 했다. 추억 속의 어머니 부엌의 그림이다. 다시 만날 수 없는 그 부엌을 상상하게 해주는 굴뚝의 연기를 바라본다. 소중하게 만난 도심 속의 굴뚝 연기다.

논자락엔 모가 가득하다.

아내는 가끔 어떤 집일까 궁금해한다.  연기 나는 저 집은 어떻게 생겼을까?  어머니의 부엌과 같을 리는 없지만 사시사철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은 정겹기 한이 없다. 한 번 찾아가 볼까? 몇 번이나 생각해 봤지만, 그만 두기로 했다. 소설에서 만나는 상상력이, 영화 한 편이 망쳐 놓는 경우가 있다. 소설 속의 끝없는 상상력을 한 장면이 흩트려 놓고 말았다. 상상 속 부엌이 보고 난 후의 실망을 감당할 수 없어서다. 아직도 상상 속 부엌에서 굴뚝으로 연기를 밀어내고 있다. 멀리서 바라보는 굴뚝 연기, 서서히 해가 저물어가는 산골짜기 풍경이다. 아직도, 어머니의 굴뚝에선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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