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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미술쌤 옐로 Oct 09. 2021

글을 그리면서 그림을 쓴다

09. 스케치북 한 장 두 장의 성실함


뭔가가 쉽게 되지 않을 때 변명거리를 찾게 된다. 그림 그릴 때 제일 많이 들을 수 있는 변명거리는 재능이 없다는 것이다. 재능이 중요한 부분도 있지만, 전부가 아니라는 뜻을 전해도 처음엔 별 소용이 없다.

“선생님은 잘하니까 이 마음 모르겠지만, 진짜 재능 없는 것 같아요.”

“저랑 안 맞나 봐요. 그림은 재능 있는 사람이 해야 하는 게 맞나 봐요.”

과연 그럴까? 그 마음 충분히 공감은 하지만 모른다거나 재능 있어야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나는 늘 재능 있는 사람을 부러워하고 동경해 왔다. 어쩌면 평생 재능이라는 것에 갇혀 지낼지 모른다. 다만 내색하지 않을 뿐이다. 재능보다 중요한 걸 알면서도 그것을 변명거리로 삼아 함부로 꺼내는 것이 이제는 부끄럽기 때문이다.

“만약 제가 잘하는 것이라면 더 많이 그려봐서 그럴 거예요.”

“누군가 재능 있어 보인다면 그만큼 노력한 걸 알아주셔야 해요.”     



물론 무조건 열심히 하라는 뜻은 아니다. 금방 지치기 때문이다. 배움에도 요령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요령도 시간이 필요한 게 사실이다. 지치지 않을 정도로 꾸준히 하는 방법은 같은 입장인 분들과의 공유가 중요한 것 같다. 그림으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이런 과정이 더 즐거울 때도 있다. 안된다고 생각했던 부분이 비슷할 땐 속상한 마음이 가라앉는 것 같고, 그래도 내가 낫다 싶으면 아무렇지 않은 일이 되기도 한다. 때로는 그중에서 조금 수월하게 표현되었던 내용을 서로 조언하기도 한다. 작품에 대한 공감도 중요하고, 작품 하는 과정에 대한 공감도 중요하다. 혼자 끙끙대는 것보다는 누군가와 속 시원하게 대화하는 게 훨씬 도움이 되는 건 나도 마찬가지다.


올 초부터 시작한 꽃 그림 모임이 있다. 매주 수요일 저녁 줌으로 만나 다양한 식물과 표현 방법에 대해 알아간다. 일주일간 그린 그림을 공유하며 의견을 나누는 방식이다. 바쁜 일정이 이어지다 보니 정해진 날이 금방 돌아와 버린다. 시간을 쪼개 그리다 보면 작업량이 많지 않지만 할 이야기는 넘쳐난다. 모임 취지는 내년까지 식물 연구를 해서 꽃 그림 작업 북을 제작하는 것이었는데 잠시라도 그림을 그리는 것 자체가 되기도 한다. 미술을 전공하고 평생 그림을 그리고 살아왔어도 그림과 떨어져 지내야 할 시간이 찾아오는 경우가 있다. 몸에 익은 일이라 언제든 쉽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마음과 어떻게 무엇부터 시작할지 모르겠다는 마음이 오랜 시간 오갔다. 행동으로 이어지기까지 마음 준비가 필요했고, 목적이 필요했다.      



모임이 시작되면 꽃 그림 정도야 얼마든지 그릴 수 있을 거라고 여겼지만 만만치 않았다. 예뻐서 그리던 꽃에서 알리고 싶어 그리는 꽃이 되자 머뭇거리게 된다. 자료조사를 하고 특징을 꼼꼼히 파악하지 않으면 꽃잎 한 장 그리는 것조차 어려웠다. 이 형태가 맞는지 아닌지 구분해나가는 과정은 스케치 선을 처음 배울 때만큼이나 오래 걸리기도 했다. 시간에 쫓기고 대상의 특징 때문에 헤매다 보니 자연히 일주일 작업량이 맞나 싶을 만큼 진도가 나가 있다. 붓을 들 때마다 그림이 뚝딱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 서로 민망해하며 변명의 시간을 갖는다. 너무 피곤해서 잤다는 말은 내가 제일 많이 하는 변명이다. 체력적 한계에 대해 늘어놓으며 몇 시간 잤는지로 마무리하는데 매번 들어줘서 다행으로 여긴다. 다들 인내심이 좋은 것 같다. 그밖에 애들 챙기고 손님이 찾아오거나 며칠 여행을 가는 등 다양한 레퍼토리가 반복되다가 꽃 그림 대한 이야기로 옮겨 간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반복되는 변명 중에 그 누구도 재능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없다.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의 힘을 말이다. 설사 진도가 살짝이 아니라 전혀 나가지 않았다 해도 포기하거나 쉬지도 않는다. 허허 웃어넘기며 다음에 더 열심히 해 보겠다는 같은 약속을 한다. 누군가는 그림을 그릴 줄 아니까 그럴 수 있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재능을 갈구하는 마음은 똑같다고 본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금보다 잘 그리고 싶다. 그런 열정이 있기에 몇 시간씩 그림 앞에 앉아있게 한다. 스케치북 몇 권씩을 소비하고 쌓아둔 캔버스 개수가 늘어가는 것이다. 스케치북 한 장 두 장 채우며 시간을 보낸 사람들은 시간의 힘을 믿는다. 처음 스케치북과 나중의 스케치북을 펼쳐 몇 장만 비교해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출발점이 어디였는지 지금 어디까지 왔는지 말이다.      



마음속으로 재능에 대한 열등감이 있을 수 있다. 심지어 나는 여러 개나 된다. 글 서너 줄로 한 시간씩 쓰고 지우기를 반복할 때마다 글쓰기 재능이 없는 것 같다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우울해진다. 하지만 고민할 부분은 늘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에 대한 부분이었으면 한다. 살다 보니 뭔가가 쉽게 되면 이상할 때가 많았다. 세상엔 진짜 공짜가 없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었다. ‘시간과 정성을 들이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결실은 없다.’라는 그라시안의 말처럼 설사 재능이 있더라도 성실함이 받쳐주지 않으면 좋은 그림이 나오지 않는다. 단 한 번의 결석도 없이 매번 수업에 참여하시는 분들이 있다. 내 눈엔 그분들이 제일 잘 그린다. 덕분에 나도 발전하고 있을 것이다. 스케치북 한 장 두 장의 시간을 겹겹이 쌓아가는 성실함을 눈으로 보고 있으니, 겉으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내적인 단단함이 함께 발전하는 건 당연한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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