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화가의 길목으로~!
고흐가 ‘감자 먹는 사람들’ 작품을 위해 농부의 삶을 ‘정직한 시선’으로 관찰하면서 표현하려고 했던 것을 동생 테오와의 편지에서 알 수 있었듯이, 반 고흐의 다른 스토리들도 점점 더 알게 될 때마다 그의 그림에서 느껴지던 온기와 진솔한 시선들이 어떻게 형성될 수 있었던 건지 그 배경과 원인들도 조금씩 더 알 것 같았다. 물론 어려운 사람들을 향한 선량한 마음을 태생적으로 타고났으니깐, 기본적으로는 그런 따스한 시선이 내재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마음의 작은 불씨를 점점 더 커다란 신앙심의 불꽃으로 더욱 발전하게 만들어준 계기는, 농촌과 탄광촌에서 그곳 사람들의 삶을 직접 체험해 봤던 그 시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좀 안타까웠던 점은, 고흐의 이런 진귀한 노력과 희생의 시간들은 여러 다른 놀라운 사건들에 묻혀서 별로 비중 있게 다뤄지지 않거나 가볍게 살짝 언급만 되는 식으로 거의 간과되어 있는 시기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반 고흐가 훌륭한 그림 실력과 독특한 스타일로 명성 있는 화가가 되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이와 동시에 불편한 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건, 크고 작은 개인적인 사건들이 꽤나 충격적이고 대단한 일들이 많았던 덕분에 더욱 유명세를 탈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그만큼 워낙 화젯거리가 많았던 화가였기 때문에, 진실로 빛이 비쳐야 할 만한 보석 같은 진짜 이야기들은 오히려 그런 그늘에 가려져서 막상 빛을 보지 못했던 건 아닌가 싶은 생각에 한편으로는 짠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고흐는 농부가 등장하는 그림을 제대로 그리기 위해서는, 진짜 농부처럼 생각하고 행동해야지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농부와 혼연일치가 되고 싶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농부의 힘든 노동과 일상을 직접 경험해 보면 그들의 고단한 몸과 마음을 진정으로 이해함으로써 그림도 진정성 있게 그려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고흐는 농부처럼 일을 하면서 그들의 삶을 직접 체험했으며, 농부의 삶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면서 많은 그림을 그려냈다. ‘감자 먹는 사람들’ 또한 고흐가 그렇게 농부들의 삶을 탐구하느라 농촌에 흠뻑 빠져있던 그 시기에 그려진 것이다.
고흐의 이런 열정은 탄광촌에서도 뜨겁게 피어올랐던 적이 있었다. 이때는 아직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로 들어선 시기는 아니었지만 종교인의 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전도자의 입장에서 그런 사랑과 열정의 불길이 솟기 시작한 시기였다. 그런데 고흐가 농부를 그릴 때면 농부의 모습으로 혼연일치가 되고 싶어 했던 그런 화가로서의 예술적 열정과, 탄광촌에서 매우 열성적인 마음으로 활동하던 전도사로서의 신앙적 열정이 서로 너무 닮아 보인다. 고흐는 농부든 광부든 그저, 그들의 힘겨운 심정을 똑같이 느껴보고 싶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탄광촌에서는 광부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 더욱 커져감에 따라, 그들과 혼연일치가 되어 그 고통을 함께 나누고 싶어 할 정도로 신앙심이 불타오른 것 같았다. 가진 돈과 옷을 광부들에게 다 나눠주고, 자신은 짚으로 채운 자루를 요로, 웃옷을 이불로 썼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고흐는 그저 진심으로 그들을 돕고 싶은 순순한 마음뿐이었을 거다. 그들의 삶을 실제로 체험함으로써 진정한 이해를 통한 진실한 선교활동을 하고 싶은 마음뿐이었을 거다.
너무나 아름다운 정동진한테 탄광촌의 험한 역사가 숨어있어서 놀랬던 만큼, 반 고흐의 삶에도 이런 탄광촌의 고된 역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우연히 발견하고서는 깜짝 놀랐다. 특히나 드넓은 자연을 유독 좋아하던 화가한테는, 어두운 탄광촌의 삶이 의외의 신기한 경력 중 하나처럼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화가로서의 삶이 실제로 시작되기 전의 시기였지만 말이다. 그만큼 그의 수많은 작품들 중에서도 탄광촌 그림에 대한 기억은 그때까지 거의 없어서 그랬는지, 뭔가 좀 낯설게 느껴졌던 것 같다.
탄광촌에서는 고흐가 화가를 본업으로 시작하던 때가 아니었으니깐 그곳의 실제 작품들을 많이 그리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그림뿐만 아니라 고흐가 참된 마음으로 헌신적인 노력을 했던 탄광촌 삶을 조명한 이야기들도 별로 많이 보이지 않는 걸 보면, 다른 사건들에 비해 그 시기 자체가 간과되고 있던 것 같아서 다소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정동진의 탄광촌 역사가 비록 생존형 산업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서 힘들고 고된 삶이기는 했어도 그 마을의 호황기 시절이었던 것처럼, 반 고흐의 탄광촌 역사 또한 본인 스스로는 광부들을 위한 희생적인 삶을 사느라 몸은 고단했을지언정 엄청난 열정이 샘솟아서 신앙심이 솟구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고흐의 꿈과 좌절이 모두 함께 공존했었기에, 마음 아픈 사연도 깃들어 있던 시기였다. 어쩌면 이때 발생한 그의 커다란 절망과 비극은 그 이후로 고흐의 전반적인 삶에 평생토록 큰 영향을 끼치게 된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고흐에게는 참, 얄궂은 운명의 장난이 아니었을까 싶다.
라면서 그를 해직시켰던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을 보자마자 왜 내 눈에는, 굉장히 ‘빛 좋은 개살구’처럼 보이는 변명 아닌 핑곗거리처럼 보였던 걸까. 그것도 아주 그럴듯하게 잘 포장된 개살구 말이다.
그냥 살구도 아닌 개살구.
넘치는 신앙심으로 광부들과 일심동체처럼 똑같은 삶을 살고 싶었던 진심 어린 마음 덕분에, 광부의 삶을 실천하고자 했던 행동들이 고흐 자신에게는 막상 해를 입히는 결과를 가져와버렸다. 탄광촌에서 아주 새록새록 뜨겁게 피어오르던 초심자의 순수한 열정이 점점 증폭되어 폭발하는 동시에, 곧바로 무참하게 짓눌리는 기점이 되어버린 것이다. 선교사가 되고 싶었던 꿈이 제대로 꽃 한번 피어보지 못한 채 한 번에 꺾여버렸으니, 고흐의 심정은 얼마나 통탄할 만했을까. 단지, ‘너무나 과하게 열심히 했다’는 죄목만으로 말이다. 그 시절의 교회 조직은 지금 시대보다 더욱 전통과 형식을 중시해서 위선적인 분위기가 더 짙게 깔려있었다고 한다.
과도한 진정성이 오히려 고흐가 그렇게 원했던 성직자의 꿈을 무산시켜 버렸다. 원래는 아버지처럼 목사가 꿈이었지만 신학 대학의 실패로 인해서 진학을 포기하고, 선교사가 되고 싶은 마음에 탄광촌의 선교 학교에서 활동을 시작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마저도 넘치는 열정의 방해를 받아서 선교사의 꿈 또한 수포로 돌아가 버렸으니 그 좌절감은 얼마나 더 컸을까 싶다.
게다가 좌절도 좌절이지만, 아마도 제일 참기 힘들었던 건 내적 분노와 배신감의 감정 아니었을까. 고흐 자신은 그저 진심을 다해서 어려운 사람들을 도운 것뿐인데 도리어 그런 과잉된 진심 때문에 그렇게 열망하던 종교인의 꿈이 좌초되어 버렸으니 말이다. 고흐 입장에서는 분명, 황당할 정도로 어이가 없는 걸 넘어서서 기가 막히는 분노의 심정이었을 것 같다.
다른 일반적인 조직도 아니고 신성한 종교를 대표하는 교회 조직한테서, 그런 제도권의 위선과 이중성을 목격했으니 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으리라. 천사처럼 선량한 마음을 추구하는 그런 교리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던 교회 집단의 실체를 알게 되었으니 그 실망감과 허탈함은 더욱 컸을 것이다. 고흐 자신처럼 헌신하고 희생했던 진짜가 오히려 겉치레를 더욱 중시했던 가짜 조직에 의해서 물러나야 했으니, 그 울분감은 또 얼마나 더 했을까 싶기도 하다. 이런 격앙된 심정들이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도 고스란히 느껴지는 걸 알 수 있다. 그렇게 인연이 닿기를 소망했던 교회에 대한 반감과 증오, 끓어오르는 적개심과 무력한 분노 등의 다양한 감정들이 뒤엉켜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선교위원회는 반 고흐가 선교자로서 좀 더 품위를 갖추고 격식 있는 교양적인 삶의 모습을 보여주기를 내심 바랐을 것이다. 그들이 그때까지 누리고 있던 부르주아 계층에 대한 평판이 손상될 것을 우려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목사 신분에 맞게 행동하지 않고 노동자들과 똑같이 되고 싶어 했던 고흐는 그런 허례 의식과 고상한 허영심을 채워주기에는 역부족인 인물이었으니, 어쩌면 선교위원회 입장에서는 그의 해직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르겠다. 내적인 진심보다는 그런 포장된 외적인 요소를 훨씬 더 중시하는 집단이었다면 말이다. 막상 탄광촌의 광부들은 처음에는 다른 성직자들과 달랐던 고흐를 이상하게 여겼어도, 결국 나중에는 그의 진심을 알아보고는 마음을 열고 따랐기 때문에 그를 잃게 되어 슬퍼했지만 이미 소용이 없었다.
하지만 정동진이 석탄 산업의 소멸 시기에 그 위기를 잘 극복하여 다시 새롭게 부활했던 것처럼, 반 고흐 또한 탄광촌에서 그 시기에 마주했던 엄청난 좌절의 위기를 새로운 방향으로 잘 극복하여 다시 일어서게 된다.
자신의 무너진 꿈을 다른 방향으로 돌려서 회복한 것일까. 자신의 신앙적인 꿈을 포기할 수는 없었기에, 어쩌면 그 중간 길목에서 꿈에 좀 더 다가가기 위한 도구의 방법과 수단만 바꾼 것인지도 모르겠다. 전통적인 교회 조직의 허울뿐인 시스템을 벗어나서 자신이 진정으로 추구하고자 했던 가치를, 차라리 그림을 통해서라도 실현하고자 하는 작은 몸부림의 시작이었을 테니 말이다. 성직자로서 교리와 선교 활동 등을 통해 어려운 사람들을 구원하면서 진실한 신앙심을 추구하고 싶었지만, 선교사의 꿈이 좌절된 것뿐만 아니라 교회라는 커다란 조직 내의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시스템에 절망했기에 고흐는 결국 그림을 그리는 일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비록,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인한 서글픈 선택이었겠지만 말이다.
어쩌면 이 또한 그가 짊어질 수밖에 없었던 운명 아니었을까.
‘그래도 이렇게 힘겹게 출발하던 가련한 화가에게 조금은 덜 배고픈 운명을 주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하늘이여~! 안 그래도 처음부터 빈손으로 시작하여 가난했던 화가에게 더욱더 궁핍해지는 운명을 선사하셨던 것은 너무 가혹했던 것 아닌가요.’
그렇다. 내가 다 야속해질 정도로, 우리의 고흐는 그 이후로도 계속 엄청나게 굶주리는 고된 예술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었다. 에구, 애달픈 사람.
정동진은 그래도 탄광촌의 역사 이후에 화려한 관광 산업으로 부활을 했던 덕분에, 생존이 위태위태하던 그 힘겨운 석탄 산업을 드디어 벗어날 수 있었다. 한때는 드라마 인기로 인하여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 정도로 주요 관광 명소가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고흐의 부활은 조금 달랐다. 탄광촌의 고된 역사를 거친 직후에 부활을 하기는 했지만, ‘동진이’처럼 빛나는 화려한 부활이 아니라 더 배고픈 고통을 겸비해야 하는 부활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난에 찌든 화가의 삶이 시작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고흐는 작업을 통해서 자신이 그토록 소망했던 가치를 추구할 수 있었기에 그림을 그리는 순간만큼은 행복할 수 있었다. 어렵고 힘든 사람을 돕고 싶었던 마음을 화가로서 그림을 통해, 그런 구원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표면적으로 물질적인 측면에서는 성공한 부활이 아니었지만, 내재적으로 자신이 원하던 가치의 측면에서는 성공한 부활에 가까웠다.
고흐는 목사나 선교사라는 직업 자체가 싫었던 게 아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오히려 그들이 하는 일을 소망하고 열망했었다. 성직자들이 하는 일 자체는 존경하거나 숭고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화가가 되어서도 그림 작업을 통해서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을 향한 그림을 꾸준히 그리지 않았는가.
이런 면에서 보면, 고흐의 신앙심은 여전히 그대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테오에게 남긴 글들을 보면, 그림 작업을 할 때마다 얼마나 이런 신앙심에 가까운 고결한 마음이 있었는지 더 잘 느낄 수가 있다. 자연에 대한 사랑은 물론이요, 인간에 대한 애정과 연민이 거의 모든 그림을 그릴 때마다 스며들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만큼 ‘인간 고흐’ 자체는 여전히 그대로였던 것이다. 다만 ‘성직자 고흐’ 대신에 ‘화가 고흐’로서, 직업적 정체성만 변화됐을 뿐이었다. 고흐가 성직자의 길을 가지 않았다고 해서 무신론자로 오해하는 이들도 있던 것 같지만, 그가 등을 돌린 이유는 교회 조직에 대한 혐오 때문이었지 신앙심 자체에 대해서 마음이 떠난 것은 아니었다. 교회라는 조직 시스템에서는 그 내부에 이미 형성되어 있던 위선적인 분위기를 따라야 했으므로, 진정한 신앙심을 발현시키는 데 있어서 한계가 있다는 걸 느꼈기 때문에, 차라리 진정성 있는 쏘울이 가득한 그림을 통해서 힘겨운 사람들을 구원해 주는 편이 훨씬 더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고흐라면 분명, 시스템의 제약 없이 순수한 영혼을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그림 작업들을 통해서 일종의 신앙심을 발현하는 것이 더 의미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결국 고흐의 그런 견고한 순수 의지들은 그림들을 통해서 표출될 수 있었다.
이렇게 돌고 돌아서 뒤늦게 화가의 길로 정착하게 된 고흐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내적 갈등들로 괴롭거나 고통스러웠을까. 특히나, 신성하게 여기는 그런 가치를 추구하던 집단 조직에 대한 내적 혼란이 발생했으니 더욱 심란하고 힘들었으리라. 고흐가 너무나 소망하던 가치들과(ex) 신앙심) 너무나 배척하던 가치들이(ex) 위선) 서로 뚜렷하게 상반되어 같은 조직 내에 복잡 미묘하게 자리 잡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의 심정은 얼마나 더욱 복잡 미묘했을까. 겉으로는 신앙심을 추구하고 있던 조직이, 속으로는 위선을 추구하고 있지 않았던가.
이렇게 뚜렷하게 상반되는 가치들의 공존 때문에 힘들어했던 고흐의 그런 고통은, 그의 수많은 자화상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왠지 나도 그런 감정이 뭔지 알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대부분의 자화상 그림들은 마치, 그동안 고흐가 느꼈을 힘겨움과 괴로움들이 누적되어 있는 것 같은 분위기를 물씬 풍기기 때문이다.
단 하나, 마지막 자화상을 제외하고 말이다.
**P/S: 매거진 <정동진>의 원본 글 '#다양한 문화의 비밀'의 일부분을 분리하여 구성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