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반 고흐의 계몽
정동진역의 소멸 위기가 너무 안타까운 마음에 얼마 전 관련 소식을 몇 개 찾아보다가, 나의 이런 심정과 비슷한 기사를 우연히 발견했다. 그런 좋은 뉘앙스의 기사를 겨우 하나 간신히 찾은 것 같았다.
너무 공감할 수밖에 없는 문구도 거기서 만날 수 있었다.
건축가 김소연은 책 ‘경성의 건축가들’에서 이렇게 말한다.
보존할 가치는
번듯하게 잘 지은
상류층의 건물이나
건축 양식을 잘 표현한
건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계층이 먹고 자고 일하고
투쟁하고 죽어 간 공간에도 있다.
보존은 문화의 두께이고,
문화는 다양성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문구에서 김소연 건축가의 지혜와 혜안이 느껴졌다.
건축물 자체에 대한 어려운 지식 관련 설명이나 화려한 건축 양식 기법에 대한 감상과 평가 등에서 우러나오는 지성미도 물론 멋진 것이겠지만, 그와는 또 다른 차원의 아름다움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에 대한 혜안과 감성을 더 깊이 느낄 수 있는 문구였다. 담담하게 자신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표현한 것처럼 보이지만, 여러 계층별 삶에 대한 진정성 있는 따스한 시선이 느껴지는 동시에 문화에 대한 통찰력도 함께 담겨있다. 그녀의 시선에 의하면 정동진역 또한 지역 주민들의 소박한 간이역일지라도 우리 문화의 다양성을 높여줄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소프트 스킬’ 타입의 지혜와 혜안을 지니고 있는 건축가라서 그런지, 건축물들을 향한 관점 또한 그 건물들이 보존하고 있는 ‘소프트 스킬’ 유형의 가치를(정체성, 역사성, 분위기 등) 매우 소중하게 바라보고 있는 게 느껴진다.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의 시선이 소중한 가치를 바라볼 줄 알아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해 내기도 하고 그것들을 보존하고자 하는 의지들도 발현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가치 있는 것을 바라볼 줄 모르면 뭐가 가치 있는지조차도 보이지가 않기 때문에, 결국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고운 모래알들처럼 수많은 가치들을 모두 놓쳐버리게 된다. 이 얼마나 아까운 자산들이고, 얼마나 애석한 현실이란 말인가.
문맹(illiteracy)이라는 게 꼭, 한글만 몰라서일까. 글자를 볼 수 없는 것에만 해당되는 걸까. 한글 이외에도 소중한 것들이 주변에 얼마나 많은데, 아예 인식조차도 못하고 깨어있지 못하면 그 또한 문맹이랑 뭐가 다를까. 그런 것들을 조금이라도 바라볼 줄 알고 공유하고자 하는 마음과 움직임이 바로 ‘계몽’인 거지 뭐, 엄청나게 대단한 것만이 계몽일까 싶다. 예전에 우리 조상님들이 문맹인 사람들에게 한글을 알려주는 ‘농촌 계몽 운동’을 했다는 사실이 지금 이 순간 퍼뜩 떠오르는 거 보면 말이다.
이런 면에서 김소연 건축가는 건축가답게, 내가 너무나 안타까워하고 있던 그런 정신과 문화의 가치를 건축물들을 통해서 진정성 있는 메시지로 전달하고 있는 ‘계몽가’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런 소중한 메시지나 깨달음을 전달하는 경로나 방법이 꼭 건축가를 통해서만 가능한 걸까? 농촌 계몽 운동처럼 시대적 지식인이나 엘리트들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이런 ‘계몽’ 활동들은 그때처럼 꼭, 한글 같은 어떤 ‘지식’의 전달만을 의미하는 걸까?
요즘은 미디어 수단의 발달로 어떤 지식이든 인터넷 등을 통하여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만큼 앞으로는 양적인(quantitative) ‘지식’보다는 지혜나 통찰 같은 질적인(qualitative) ‘가치’들이 더욱 중요해지는 현대시대를 살게 될 가능성이 높아질 것 같다. 알고 있는 지식의 ‘분량’보다는 깨달은 가치의 ‘깊이’가 더 값지게 될 수도 있겠다는 의미다.
따라서 계몽을 '지식의 전달'로만 정의하면서 너무 좁게 한정 지을 필요도 없을 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요새는 원하는 지식을 공유할 수 있는 방법과 경로들이 많아졌기 때문에 반드시 지식인이나 엘리트 집단 같은 위의 계층에서 아래의 일반 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활동만을 계몽이라고 단정 짓기에는 무리인 시대처럼 보인다.
더구나 과거의 농촌 계몽 운동처럼 가슴 따스한 엘리트들이 자발적으로 발 벗고 나서서 좋은 활동들에 앞장서는, 그런 훈훈한 풍경을 보기 힘든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느낌은 비단 나만의 느낌만은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도 스스로의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여러 종류의 지식을 얻을 수 있게 되었으니 서로가 그럴 필요성도 많이 느끼지 못할 테고 말이다.
게다가 각자의 앞가림만 하기에도 너무나 급급한 시대가 되어가고 있어서, 예전에는 아무리 철밥통으로 안전하게 무장했던 지식인 계층의 직군이었을지라도 이제는 언제든지 AI의 공격 같은 미지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은 각각의 계층이 느끼고 있는 불안감의 종류와 결이 다를 뿐, 어쩌면 우리는 모두 가냘픈 날갯짓으로 허덕이고 있는 연약한 존재들이라는 측면에서 매한가지나 다름없는 세상의 한복판에 서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점점 지식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고, 이는 실질적으로 계층의 경계 또한 내재적으로는 무너지게 하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 물론 형식적으로는 계층의 구분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고 앞으로도 사회구조상 그런 구분이 완전히 사라지는 건 쉽지 않을 테니 겉으로는 유지가 되겠지만, 과거 시대보다는 지식 공유 같은 현상 등으로 그런 실질적인 갭(gap)의 차이가 줄어들고 있어서 미래 시대에는 더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점이 예측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계몽의 형태는 무엇일까?
어떤 것들을 서로 공유하고 알고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일까?
앞서 생각해 본 것들을 고려한다면,
이에 대한 정답은 의외로 어렵지 않게 나오는 것 같다.
우선, 예전처럼 단순 ‘지식’의 전달보다는 다양한 시각으로 인식되거나 새롭게 깨닫게 되는 ‘가치’를 공유하고 알리는 것이 현시대에 더욱 어울리는 계몽일 것 같다. 그리고 계몽의 형태 및 방향들도 현대식으로 맞게 다소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수직적 방향의 계몽만이 아니라 수평적인 형태를 포함하면서 여러 방향으로 서로 간에 오고 가는 다각도의 방향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지식 및 가치의 공유 형태라면, 어떤 방향의 활동이든 간에 현시대에 적합한 다양한 유형의 계몽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활동들은 서로의 지적인 풍요를 더욱 풍성하게 채워줄 뿐만 아니라, 혼자서는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새로운 측면에 대하여 의식의 성장 및 확장을 할 수 있게 해 주므로, 진정으로 값진 ‘가치’를 발굴하거나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현대적 계몽’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분야에서든지 문외한들한테는 잘 보이지 않는 소중한 가치를 발견하여 함께 알고자 한다면, 그런 가치 있는 시도와 의지들을 모두 다 일종의 계몽 활동들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중에서도 다 같이 커다랗게 함께 하는 것은 ‘계몽 운동(enlightenment movement)’으로 표현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거대한 집단 움직임만을 대단한 것처럼 여긴다면 개개인들이 언제 어디서든지 소규모 형태로 할 수 있는 작은 ‘계몽 활동(enlightenment activity)’은 또 가볍게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작은 ‘계몽 활동들’ 하나하나가 모여야지만, 결국은 개개인 마음에서 진짜로 우러나와서 따르게 되는 더욱 이상적인 ‘계몽 운동’의 거대 집단도 가능한 게 아닐까. 연역적 계몽 무브먼트(movement)만이 아니라, 귀납적 계몽 활동(activity)의 씨앗들이 어떤 면에서는 더 의미 있을 수도 있다는 거다.
그래서 꼭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그저 자신의 전문 분야나 관심 분야에서 다른 일반인들보다 가치 있는 것을 더 볼 수 있는 경우에, 이에 그치지 않고 그런 소중한 가치를 함께 알고자 하는 마음으로 하는 활동이라면 그 자체로서 모두 충분히 의미 있는 계몽일 테니깐 말이다. 우리가 모든 전 분야에서 통달하거나 깨달은 성인(聖人)이 아닌 이상, 아무리 스마트한 사람일지라도 어떤 특정 분야에서는 문맹일 수도 있는 법이다. 즉, 누구나 언제든지 성장할 수 있는 존재로서 항상 계몽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므로, 우리는 그런 중간 과정에 서있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태다. 다만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계속 더 나아갈지... 스톱할지... 홀딩할지...’
김소연 건축가처럼 다양한 계층에 대한 가치를 귀하게 여겼던 이들 중에서도, 이러한 ‘계몽가’처럼 느껴지는 사람이 문득 한 명 더 떠올랐다. 그가 남긴 작품들의 예술적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던 동시대의 ‘가치 문맹인들’ 덕분에, 살아생전 거의 인정받지 못했던 비운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도 바로 이런 따스한 시선을 가지고 있던 사람 중 하나였다.
반 고흐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전체적으로 유독 더 두드러지는 점이 있다. 특히, 인물화나 인간 삶을 표현한 그림에서는 마치 그들이 진짜로 살아있는 듯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그림 속의 사람들이 바로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혹은 내가 거기 삶의 현장으로 빨려 들어가서 바로 옆에 있는 것 같은 그런 생생한 기운 말이다. 그리고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 풍경화나 사물을 표현한 그림에서도 마찬가지로 비슷한 결의 느낌이 있다. 경이롭고 아름다운 자연을 매우 생동감 있게 잘 그려내고 있다는 것이다.
생물체인 사람이라면 실제로 살아 숨 쉬는 듯한 ‘생명력’이라고 할 수 있겠고, 생물이 아닌 자연이라면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동감’이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결국은 둘 다 비슷한 결의 느낌 아닌가. 그래서 그런지 어떤 자연 풍경의 그림들은 마치 고흐의 복잡 미묘한 감정 상태를 반영하듯이 마구 움직이면서 요동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몽환적인 분위기를 풍기기도 한다. 자신의 그런 비통하고 슬픈 감정을 알아봐 달라고 호소하는 듯한 그런 느낌처럼 말이다.(아마, ‘별이 빛나는 밤’의 그림을 보면 그런 감정을 더욱 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반 고흐의 그림은, 사람이든 자연이든 꼭 살아있는 것 같은 ‘생명력’을 지니고 있어서 더 따스한 시선을 품고 있는 것일까? 우선 기본적으로는 그런 ‘생명의 기운’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전반적으로 깔려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온기 있는 시선이 우러나오는 게 맞을 것이다. 생명체라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귀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애정하는 마음이 밑바탕 되어야지만 그런 시선들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흐의 그림들을 좀 더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이런 근본적인 생명력으로 인해 파생되는 디테일함이 더 느껴지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생명력이라는 가치에 대한 진실한 애정을 품고 있기 때문에, 생명체인 인간에 대한 사랑 또한 매우 진정성이 있는 게 보인다. 어떤 조건이나 환경과는 무관하게 선입견과 편견을 배제하고 그저 살아 숨 쉬는 인간 자체로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깊게 사랑하고자 하는 시선들이 그의 온갖 그림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김소연 건축가가 상류층의 화려한 건축물의 가치만을 중시했던 것이 아니라 그 외의 다양한 중산층 및 하층민이 살았던 삶의 흔적이 있는 모든 공간들도 중시했던 것처럼, ‘반 고흐’도 아주 힘겹게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소중히 여기면서 그들을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림들을 많이 그렸다.
그런 서민층의 삶을 그려낸 반 고흐의 그림들을 보면, 마치 그들의 고통과 아픔을 같이 느끼고 있는 듯한 애정 어린 시선들이 보인다. 그들의 어려운 삶에 대한 애환과 어두운 심정을 공감하는 것 같은 그런 분위기나 디테일한 느낌이 그림 전체에서 물씬 풍겨져 나오기 때문이다. 비록 겉으로는 보잘것없어 보이는 소박한 일상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가난한 삶과 힘겨운 노동에 대한 가치를 알아보는 반 고흐의 여러 작품들 중에서도, 그의 이런 시선을 매우 잘 느낄 수 있는 작품들 중 하나가 바로 그 유명한 ‘감자 먹는 사람들’ 일 것이다.
근데 참 신기하게도, 예전에 난생처음으로 나 홀로 해외여행 중이었을 때 미술관을 관람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반 고흐 미술관’이었다는 사실이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그때는 고흐에 대해서 잘 모르던 상태여서 그랬던 건지, 별다른 느낌이나 특별히 기억나는 건 많지 않았다. 다만 그때나 지금이나 반 고흐에 대한 개인적인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널리 알려진 사건 한두 개 정도만 얼핏 들은 게 있던 것뿐이었다. 고흐의 작품들은 그가 죽은 후에야 뒤늦게 인정을 받아서 유명해졌고, 자신의 귀를 자른 소동이 한번 있었다는 것 정도 말이다.
그런데 그림의 조예가 그리 깊지 않았던 일반인인 나한테도, 그때의 반 고흐 그림들은 어딘가 모르게 다른 화려한 예술가들과는 좀 달라 보이는 게 있기는 했다. 전체적으로 고흐만의 특유의 색깔이 느껴졌다고 해야 하나? 뭔가 좀 특화된 것 같은 느낌이 있기는 했는데, 나중에서야 알게 된 거였지만 서민들 삶에 초점을 맞춘 그림이 많다 보니깐 초짜인 내가 보기에도 그런 특화된? 면이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내 머릿속에 이렇게 떠오른 반 고흐를 다시 만나고 싶어서, 나는 관련 책을 몇 권 빌렸다. 고흐만의 그런 특유의 분위기와 인상들이 아직도 그 느낌 그대로일지, 오랜만에 내가 직접 느껴보고 싶은 마음이 문득 들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고흐에 대한 수많은 배경 지식과 작품 관련 설명들은 애써 뒤로 한 채 일부러 읽지 않고 순전히 그림만 먼저 감상해보았다. 그와 관련된 너무 많은 이야기들이 있는 것 같아서, 처음에는 그의 작품들을 어떤 편견도 없이 있는 그대로 그림 자체만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인간 고흐'의 모습을 만나기 전에 먼저, '화가로서의 고흐'는 어떠했는지 진짜 온전한 그 모습만을 바라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게 작품만 집중해서 바라봤는데도 여전히 그런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고 따스한 시선들도 여러 그림 곳곳에서 느껴지는 걸 보아하니, 어떤 스토리에 의한 고정관념으로 형성된 느낌이 아니라 진짜로 그런 고흐의 마음과 시선이 그림 자체에서 우러나오고 있다는 것을 더 알 수가 있었다.
‘감자 먹는 사람들’ 또한, 어떠한 배경 지식 없이 처음에는 오로지 그림만 봤는데도 농부들의 소소한 삶에 대한 진솔한 표현과 깊이 있는 시선이 충분히 느껴졌던 작품이다. 이런 걸 보면 마치 그림 내면의 안쪽까지 고흐의 진정성과 인간미를 담은 시선들이 깊숙이 스며들어서 자연스럽게 그런 느낌들이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고흐의 전반적인 작품에서 그의 이런 시선들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지만, 더욱더 잘 느껴지는 경우는 바로 다른 화가의 그림들과 비교 가능한 때이다.
하나의 묶음처럼 대응될 수 있는 비슷한 두 개의 그림들을 나란히 비교해놓고 보면 고흐만의 시선이 더욱 잘 느껴진다. 동일한 대상을 그린 것이지만 서로 다른 화가들이 그린 그림에서는, 그 화가들만의 고유한 특성과 시선이 유독 더 잘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장프랑수아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과 폴 고갱의 ‘밤의 카페(지누 부인)’를 각각 고흐의 그림들과 나란히 비교하여 감상해 보면, 개인적으로 나는 고흐 그림에서 사람 냄새가 유독 더 많이 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위의 두 개 그림은 모두 <씨 뿌리는 사람>이지만, 왼쪽은 장프랑수아 밀레의 작품이고 오른쪽이 반 고흐의 작품이다. 밀레는 평소에 고흐가 존경하는 화가 중 하나였으므로, 밀레의 모작도 많이 그린 편이다. 그래서 두 개의 그림을 얼핏 보면 비슷한 느낌이 많이 나는 것 같지만, 그림 속의 주인공인 ‘씨 뿌리는 사람’을 번갈아 가면서 동시에 감상해 보면 뭔가 미세한 느낌적인 차이가 있다는 걸 감지할 수가 있다.
밀레 그림 속의 농부는 굉장히 씩씩한 기운과 함께 매우 호방하게 씨를 뿌리면서 어딘가로 행진하는 듯한 기개도 우러나오는 느낌이다. 마치 아주 중요한 임무를 비장하게 수행하고 있는 군인이나 영웅 같은 분위기가 전체적인 느낌에서 새어 나오고 있다. 그 시대의 다른 그림들과는 달리 농부처럼 평범한 사람이나 노동 같은 작은 일상도 그림의 주제로 시도했다는 측면에서는 분명히 긍정적인 영향도 있었던 것 같지만, 어찌 보면 고된 노동으로 힘겨운 농부의 삶을 너무 미화시키는 측면도 없지 않았을 것 같다.
하지만 이에 반해, 고흐의 작품은 밝은 자연 풍광을 바탕으로 전체적인 분위기에 맞게 농부의 발걸음도 평소 노동의 일상처럼 움직이고 있다. 보다 더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부각되어 있어서 우리 삶에 좀 더 가까이 존재하는 ‘진짜 농부’ 같은 인간적인 모습의 느낌이다. 고흐가 아무리 농부들을 사랑했을지라도, 굳이 그들의 고단한 삶을 미화시키거나 포장하면서까지 애써 꾸미려고 한 듯한 시선은 다른 그림들에서도 거의 보이지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시도를 했더라면, 그들에게 진정한 위로가 되기 힘들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와는 반대로, 또 다른 방향의 미묘한 시선 차이가 나는 그림들도 있다.
위의 그림 두 개는 모두 ‘지누 부인’이 등장하지만, 같은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느껴진다는 것을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측의 고갱 그림에서는 카페 주인답게 마음이 넓어 보이는 단골집 아줌마 같은 푸근한 분위기라면, 좌측의 고흐 그림에서는 그런 카페 주인의 모습은 거의 알아채기도 힘들 만큼 무언가 사색에 빠져있는 분위기가 우러나오는 여인 한 명 그 자체의 모습에 가깝다. 같은 여인일지라도 어떤 부분에 더 초점을 두느냐에 따라서 그림의 분위기나 시선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므로, 두 화가 모두 각자의 관점에서는 나름의 인간적인 모습을 담은 그림들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고갱은 카페 주인으로서의 인간적인 모습을 담은 것일 테고, 고흐는 진짜 한 여인으로서의 인간적인 모습을 담은 것일 테니깐 말이다.
다만 같은 인간적인 모습일지라도, 고갱의 그림에서는 지누 부인이라는 사람 자체를 바라보는 시선보다는 업종이나 직업적인 모습과 시선이 좀 더 덧씌워진 느낌이 든다면, 고흐 그림 속 지누 부인 모습에서는 그저 그 사람 자체에서 우러나오는 본연의 느낌과 매력을 그대로 담아내고자 하는 시선이 보인다. 고흐 그림 속 여인은 좀 더 깊은 눈매를 지니고 있고 그런 내밀한 내면의 모습에서 흘러나오는 지성미로 둘러싸인 듯한 아우라를 풍기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솔직히 두 여인의 얼굴선 자체도 달라 보이지 않는가.
고갱 그림의 여인은 다소 넙데데하고, 고흐 그림의 여인은 살짝 갸름하다. 나의 내면에서 상대방을 어떻게 인식하고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즉, 그 시선에 의해서 기본 얼굴형까지 다르게 보이는 효과도 있다니. 어쩌면 성형 수술의 주된 효과도 단지 자기만족의 효능만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한테 아름다워 보이고 싶은 게 진짜 목적이라면, 차라리 ‘타인들, 그들의 시선’을 성형 수술시키는 게 더 빠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지금 얼핏 스쳐 지나가는구나. 큭.
이렇게 고흐는 아마도 그림의 대상이 누구든 간에 신분이나 계층에 따른 색안경을 쓰지 않고, 그 사람 자체에 대한 본질적인 느낌에 충실하여 가능한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밀레 그림과의 비교에서도 알 수 있었듯이 반 고흐는 누구든 간 애써 신격화하면서 위로 끌어올리고 싶어 하지도 않았지만, 그와 반대로 어떤 조건이나 환경에 얽매여서 누구든 간에 심리적 계급화를 설정하여 아래로 끌어내리고 싶어 하지도 않았던 인물 같다.
그래서 그런지 고흐 ‘그림 속의 인물’들은 대체로 왜곡되지 않고 그 사람 자체로서 거의 실존 모습 그대로 최대한 살려내는 느낌으로 표현된 것 같다. 고흐 ‘그림 속 사물이나 자연’에서 느껴지는 생동감은 무생물에 생물의 영혼을 입혀야지 가능한 거니깐, 아무래도 화가의 감성과 감정이 반영되어서 살아 숨 쉬는 느낌이 나오게 되는 면이 있는 것 같지만 말이다.
나중에서야 몇몇 작품은 관련된 일화가 궁금해서 동생 테오(Theo)와 주고받은 편지를 몇 개 읽어봤다. 고흐의 전반적인 생애 스토리도 조금 더 찾아보았다. 그런 흔적들을 살펴보니깐, 내가 그동안 느꼈던 고흐의 진솔한 시선들이 형성된 과정과 그 이유를 조금은 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감자 먹는 사람들’ 작품에 대하여 테오에게 쓴 고흐의 편지 내용만 봐도, 농부의 삶에 대한 가치를 알아보는 속 깊은 마음과 시선이 느껴진다.
내가 <감자 먹는 사람들>에서
정말로 보여주고 싶었던 건,
이 농부들이 램프 불빛 아래서
집어먹는 감자가 바로
그들의 손으로 땅을 일구고
수확해서 식탁에 차린
것이라는 사실이었어.
말하자면 손으로 하는 노동을,
그들이 정직하게 일해서 얻은
정직한 식사를 보여주고 싶었다.
우리 같이 ‘좀 배웠네’하는 치들과는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말이야.
그래서 난 사람들이 이 그림을 보고서
그저 ‘예쁘네, 잘 그렸네’하고
말하는 게 정말 싫다.
고흐가 <감자 먹는 사람들>의 그림을 통해서 전달하고 싶었던 것은, 다른 일반적인 풍경화들처럼 '미적인 아름다움의 가치'가 아니라 농부들의 ‘정직한 노동의 가치’였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의 그림을 보면서 마치 풍경화나 정물화를 바라보듯이 ‘예쁘네.’라고 하는 단순한 미적 감탄사만을 내뱉는다면 당연히 실망할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자신이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을 사람들이 실제로 보고 있지 못하는 모습이니깐, 아무리 칭찬의 표현일지라도 고흐라면 싫어했을 만하다. 비록 가난하고 소박한 농부들이지만 그렇게 정직하게 일한 대가로 스스로 얻은 정직한 식사를 하고 있는 농부들의 삶도, 얼마나 소중한 가치가 있는 건지를 자신의 그림을 통해서 보여주고 싶었을 텐데 말이다.
그림 속 인물들도 무덤덤하고 차분한 분위기지만 그런 자신들의 정직한 노동의 가치를 알고 있는 것처럼, 그 대가의 식사 앞에서 내추럴한 당당함과 우직함이 느껴지는 듯하다. 어쩌면 자급자족의 삶이야말로 자신이 일한 땀방울만큼 딱 맞게 대응하여 얻을 수 있는 아주 정직하고 정확한 삶이 아니겠는가. 내가 일한 만큼 그대로 비례하여 먹을 수 있는 양식을 얻고, 내가 땀 흘리지 않으면 그만큼 딱 먹을 양식이 줄어드니깐 말이다.
반 고흐는 농부들의 그런 정직하고 진솔한 삶에서, 정직한 노동과 정직한 식사의 가치를 알아본 것이다. 그의 정직한 시선으로 말이지. 다른 보통의 사람들은 잘 알아채기 쉽지 않았을 그런 일상의 소박한 가치도 귀한 ‘틈새 가치’처럼, 잘 발견하여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었던 건 반 고흐의 재주와 능력이니깐 가능했던 게 아닐까. 뭔가 잘 어울려 보이지 않는가?
정직한 노동
정직한 식사
정직한 시선
마치, 정직의 3종 세트처럼 보인다.
고흐가 정직한 시선을 가지고 있었기에, 정직한 노동과 정직한 식사의 가치를 알아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