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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ring Oct 22. 2023

(1-6)_문화의 깊이_(feat. 정동진역)

feat. 정동진역


우리의 살아있는 역사정동진역의... 

추모 가능성 소식을 과연 나만 안타까워하는 것일까


이렇게 소박하게 작고 아담해서 존재감이 별로 없을 수도 있으려나? 어쩌면 다른 사람들은 나처럼 이렇게 애석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그저 애써 위안해보려고 하던 와중에, 우연히 관련 소식에 대한 사람들의 댓글 반응을 발견한 적이 있다. 그런데 웬걸, 나의 심정과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 은근 많이 보이 길래 내심 위안이 되더라는. 처음에 신축 공사 관련 소식을 접했을 때, 구역사가 철거될 예정이라는 방안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하는 댓글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나처럼 현재의 정동진역을 애정하고 그리워할 사람들도 은근히 많다는 거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렇게 좋은 가치를 좀처럼 잘 보지 못하는 현상들을 종종 발견하게 되는 걸까. 조금만 오래되고 낡은 것들은 걸핏하면 없애버리고, 다시 새로운 무언가를 뚝딱뚝딱 만들어내는 모습들이 정말 너무 익숙한 풍경들이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젊은 도시의 한복판은 그런 일이 매우 흔하고, 한적한 시골이나 지방일지라도 몇 년만 지나서 다시 찾아가면(아니.. 겨우 일이 년 사이에도...) 너무 좋았던 공간들이나 카페들이 마구 사라져 있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유명 관광지라면 트렌드를 핑계로 그런 현상들이 더욱 심하고, 인적 드문 외진 곳은 순전히 또 경제성 때문에 오래가지를 못하고 마구 없어지거나 새로 바뀌어 있다.   

   

우리나라가 특히 이런 현상이 심하다는 것은 많은 이들이 비슷하게 알 것 같다. 유럽 여행을 할 때면 워낙 화려하거나 고풍스러운 건축 양식에 반하는 경우도 많지만, 더 놀라운 점은 정말 오래된 것이 많아서 낡았어도 여전히 잘 보존되어 더욱 아름다운 가치의 소중함을 드러내고 있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이에 비해 보존할만한 유적지나 건축 양식이 풍부하지 않아서 그런 현상들을 찾아보기 힘들지도 모른다는 점이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하지만, 무언가 조금만 낡고 돈이 되지 않으면 금방 없애버리고 다시 새로운 걸 뚝딱 만드는 진풍경들이 주변에서 너무 흔히 보이는 걸 보면 반드시 그런 문화적 자산의 부족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점점 더 들게 된다. 오래된 것에 대한 그런 ‘문화적 가치’의 소중함을 잘 인지하지 못해서 굳이 보존하고자 하는 마음이나 의지가 부족한 것에 더 가까워 보인다. 왜 우리는 이런 문화적 요소까지도 그렇게 돈돈돈... 거의 모든 것을 경제성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려고 하는 걸까?      



너무나 빠른 경제 성장을 단기간에 눈부시게 달성한 국가라는 그 명성 뒤에 가려져 있는 어두운 면의 실상인 걸까? 1~2점 점수 차이에 목숨 걸고 매달려야지만 대학 입시에 성공할 수 있는 경쟁 심한 나라의 대표적 쏘울인, 치열함 덕분일까? 사람한테 일분일초 숨도 쉬지 않고 일하는 기계처럼 되기를 바라는 업무 현장의 분위기 덕분일까? 



즉, 놀랄만한 경제적 급성장이 가져온 폐해인지, 입시 경쟁의 폐해인지, 기계적인 업무 현장의 폐해인지, 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저런 요인들이 서로 상부상조하면서 내재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은 맞는 것 같다. 모두 다 수치적인 요소들이지 않은가. 분량이나 결과적인 성과만 중시하고, 양질이나 과정적인 요소나 쏘울은 빠져 있는 것들이다.       




문화라는 개념을 평소에 너무 자주 들어서 익숙하기는 한데 구체적인 정의나 연상을 하기에는 애매하게 막연할 때가 있다. 이럴 때는, ‘유행과 문화와 전통’의 차이를 잠시 생각해 보면 도움이 될 수 있다. 한 사회나 한 나라가 선호하면서 따르는 ‘시간의(기간의) 차이’로 구분될 수 있는 개념들이라서 더 명확하게 이해되기 때문이다. 어떤 것에 대한 성행이나 선호가 지속되는 상태의 기간으로서, 그런 현상이 어느 정도의 기간 동안 유지되고 보존되는지 차이로 구분이 가능하다. 

이 용어들 사이에서 그런 차이가 거의 바로 감지되지 않는가? ‘유행 <문화 <전통’의 순서대로, 첫 번째의 ‘유행’은 제일 짧은 기간 동안 지속되는 현상이고, 그다음의 ‘문화’가 중간 정도의 기간이고, 마지막의 ‘전통’은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는 현상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으니깐 말이다.   



즉, 동시대 사람들이 한동안 일시적으로 좋아하면 ‘유행’이라고 하고, 여러 세대에 걸쳐서 더 오랫동안 선호하여 유지되면 ‘문화’가 되는 것이고, 그 이상으로 훨씬 오래 전의 시대부터 아주 긴 세월 동안 전해져 내려오면서 후손이 따르는 것은 ‘전통’이라고 일컫는 것 같다. 어떤 인기가요나 미니스커트 등은 젊은 세대가 한때 좋아하던 노래나 패션의 ‘유행’이라고 할 수 있고, 초가집이나 기와집의 형태는 조선 시대의 주거 ‘문화’라고 할 수 있으며, 윷놀이는 예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설날 놀이 중 하나로서 ‘전통’ 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이런 ‘뚝딱이?’ 현상처럼, 부지런하게 무언가 없애고 새로운 걸 금방 뚝딱뚝딱 만들어내는 풍경들은 무엇에 해당되는 걸까? 이런 것들을 과연 ‘문화’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런 현상들은 문화라기보다는 오히려 ‘유행’에 매우 가까워 보인다. 대표적인 유행이라고 할 수 있는 ‘트렌드(trend)’를 쫓아가느라 급급해서 생기는 현상이 아니던가. 어떤 문화적 자산에 대한 고유한 특성이나 정체성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시기의 일시적인 인기로 몰리는 현상을 더 따라가는 건축 현장의 모습이다. 진정한 문화의 모습으로 도약하기도 전에 이미 사라져 버리고 마는, 그 수많은 유행 현장들 중 하나뿐인 것이다.


그런데 이 ‘트렌드(trend)’라는 것 자체가 조금 더 길게 느껴지는 유행의 일종인 것처럼, 결국은 경제성과 또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기 있는 곳을 따라가면 돈이 따라오는 게 바로 순리라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오호라, 참 뭐든지 이렇게 경제성과 연결이 되는구나. 이리로 가나 저리로 가나, 결국은 경제성만이 최종 목표처럼 보인다. 물론 경제성도 매우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돈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나도 좋다. 없어서 문제지. 그렇게 다들 먹고살자고 하는 행위들 아닌가. 하지만 무언가 진짜로 중요한 게 빠져 있는 채로 이런 현상들만 쫓느라 급급해 보인다는 게 좀 안타까운 것뿐이다.  



    

비옥한 토지를 바탕으로 진짜 핵심 알맹이 같은 뿌리들이 탄탄하게 뿌리내려서 이런 유행을 좇는 일들이 여러 줄기로 뻗어나간 것이라면, 그야말로 경제도 활성화되어 있는 상태로서 아주 이상적으로 활기찬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근데 어째 주객이 바뀌어버린 듯한 모습으로 보인다는 거다. 문화적 자산 같은 뿌리는 거의 없는 텅 비어있는 상태에서, 어디선가 갑자기 온갖 유행의 줄기들이 마구 순식간에 생겼다가 갑자기 또 싹 사라져 버리는 듯 한 느낌이다. 뭔가 생명체의 근원인 뿌리에서 뻗어 나오는 생명의 줄기가 아니라, 그냥 공중에서 미생물들이 무더기로 출현했다가 갑자기 한 번에 확 사라지면서 공중분해 되는 듯한 현상처럼 말이다. 뿌리에서 한줄기의 생명이 뻗어 나와서 때가 되어 사라지는 것은 다음의 새로운 계절에 또다시 피어나기 위한 성장 과정처럼 경건해 보이지만, 미생물 같은 공중분해는 왠지 모를 공허함만 진하게 남길뿐이다.    

  

아, 맞다. 그래 이거구나. 유행과 문화 사이에는 분명히 ‘시간 차이’가 존재하지만 이것만으로 구분하기에는 무언가 빠져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바로 저 뿌리, 생명체의 근원이 빠져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문화적 쏘울(soul), 정체성’이 빠진 것이었다. 앞서 먼저 모래시계 사색 타임에서 ‘시간의 힘’을 깨달았던 원리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게 바로 ‘유행과 문화’의 개념 사이에서도 매우 유사하게 적용되고 있었다. 단순히 지나간 세월의 시간 차이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으로 인하여 변화하는 모래알갱이의 가치 자체가 증가하여 정체성 같은 쏘울이나 내면적 내공이 점점 더 견고하게 형성되는 과정 말이다.





나의 모래시계 시간 속도와 타인의 모래시계 시간 속도는 기본적으로 다르다. 태생적으로 매우 느리게 타고난 사람도 있어서 원체 빠른 행동 자체가 안 되는 사람도 있고, 그저 개인적인 스타일의 성향 차이라서 스마트한 지성을 타고났어도 느릴 수가 있다. 이와는 반대로, 선천적으로 그다지 똑똑하거나 꼼꼼한 건 아니지만 성격 자체가 뭐든지 빨리 해치워야지 직성이 풀리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물론 엄청 똑똑한 사람이 초스피드의 속도까지 가지고 있다면 금상첨화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런 개인적인 시간의 속도가 아니라, 나의 다음 스텝으로 전진하기 위해 모래시계를 뒤집을 때마다 그 안에 있던 모래알갱이들의 입자 상태 자체가 달라지는 현상이 더욱 중요하다고 했다. 모래알이 점점 더 작아지면서 더 고와질 수도 있지만, 반대로 원래는 매끈하게 둥근 모양의 커다란 크기였던 모래알이 파도에 부딪히면서 오히려 더 모가 난 모양으로 울퉁불퉁하게 깎이면서 작아지는 중간 과정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물리적인 요소들의 변화 효과도 있지만 그와 동시에 화학적인 요소도 변화될 수 있다고 한 것처럼, 모래알 하나의 밀도가 달라져서 내면적 쏘울이나 정체성이 점점 더 확고하게 형성되거나 겉의 질감도 단단해질 수 있다고 했다. 덕분에 모래알갱이 한 개의 시간당 역량이나 스킬 등이 좋아져서 실질적인 에너지의 가성비 향상도 가능해진다. 동일한 시간에 더 좋아진 성능이나 더 견고해진 쏘울로 더욱 발전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예전에는 매우 당황할만한 일을 마주치게 되면 그 충격으로 인하여 내부의 모래알들 전체가 사방팔방으로 마구 흔들려서 모래시계 자체가 터져버리고 폭파될 정도로 내면적 자아의 쏘울이 연약한 상태였다면, 이제는 모래알들의 자아 정체성과 쏘울이 단단해져서 겉으로 보이는 나의 모래시계는 평소처럼 차분하게 작동되고 있지만 내면에서는 그 충격을 수습하기 위해서 오히려 더 강력해진 파워로 그 순간만큼은 비상사태의 모래알들로 급변하여 더 빨라질 수도 있는 것이다. 비록 평소에 느린 사람일지라도 내재되어 있던 모래알의 내공이 발휘되어 순간적으로는 그렇게 속도가 빨라지거나 에너지가 증가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내부의 쇼크와 혼란이나 분노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처리하기 위한 내면적인 감정과 사고 흐름의 속도나 에너지의 강도일 수도 있고, 현실에서 실제로 발생한 문제들을 거침없이 처리하고 추진하는 속도나 의지의 강도일 수도 있다. 그만큼 나의 평소 속도가 빠르던 느리든 간에 설령 아무리 느림보일지라도, 자신만의 속도대로 오랜 세월 동안 모래시계를 계속 뒤집으면서 ‘시간의 힘’을 버텨온 사람이라면 자신의 정체성과 쏘울이 단단해져서 예전과는 확연히 다르게 업그레이드된 역량과 내면적 에너지를 지닐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시간당 질적(quality) 향상이 가능해질 수가 있다.    

 



개인의 모래시계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렇게 변화될 수 있는데, 어떤 하나의 사회나 커다란 국가의 모래시계라면 얼마나 그 영향이 크겠는가? 그게 바로 여기서도 아주 잘 보인다는 것이다. 유행과 문화와 전통의 차이에서 말이다. 이들 사이에는 아주 ‘큰 시간의 차이’가 있다는 그런 객관적인 사실뿐만 아니라, 그로 인하여 당연하게 자연발생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는 아주 중요한 차이가 또 하나 있다. 시간의 힘에 의해서만 축적될 수 있는, 그런 모래알갱이의 내공이자 질감 자체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 말이다. 

즉, 우리 ‘사회나 국가의’ 모래알갱이도 시간에 따라 보존될수록 가치가 증가한다는 것이다. 굳이 용어로 표현하자면, 우리 국민의 민족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 국민의 혼이라고 해야 할까나. 무엇으로 표현하든 간에, 그 실질적인 성격은 동일하다. 우리나라 국민의 정체성이 결국은 우리의 민족성이자, 우리의 쏘울(soul)이자, 우리의 혼이 아니고 뭐겠는가.      


그러니깐 유행만 수시로 발생했다가 사라지면 공허할 수밖에 없던 이유가 바로, 저렇게 우리의 근본이 되는 우리 민족만의 쏘울이자 혼에 해당하는 정체성이 탄탄하게 밑받침되어주지 못한 상태 같아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항상 수많은 유행이나 돈이 되는 트렌드에는 모두들 관심이 많고 민감해 있으면서도, 막상 우리의 뿌리에는 많이들 무관심하거나 둔감한 편이다. 나 또한 전문가가 아니라는 핑계로 평소에는 많은 관심을 가지지 못할 때가 많고 그만큼 잘 모르고 스쳐 지나갈 때도 많다. 하지만 나 같은 사람에게도 너무나 아쉬워 보이는 것은, 그런 우리 민족의 쏘울이자 정체성의 뿌리 근본이 될 수 있는 문화나 전통을 더 발굴하지는 못할망정 자꾸만 그나마 주변에 있는 것조차도 그 중요성과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없애려고만 하는 현상들이었다.

      

유행이나 트렌드에는 우리 민족이 지나쳐온 시간의 힘 뿌리가 거의 없어서 우리의 정체성과 쏘울이 아직 깊이 스며들어 있는 상태는 아니다. 더구나 유행은 특히 ‘한때’ 혹은 ‘한철’만 휩쓸 때가 많아서 우리 사회나 민족 전체가 꾸준히 좋아하거나 인정하는 현상은 아닌데도, 그저 ‘요새는 남들이’ 그렇게 하니깐 따라 하는 경우가 태반이므로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은 ‘타인의’ 쏘울과 취향을 따르는 것이지 ‘나의 혹은 우리의’ 쏘울을 따르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문화나 전통이라는 것에는 우리만의 혼이자 쏘울, 정체성이 그득하게 담겨 있어서 그런 것들이 물씬 풍겨져 나온다. 그런데 우리는 시간의 힘을 너무 간과한 나머지 그런 보물 같은 존재들의 보존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모르고, 자꾸만 쉽게 없애버리려고 하는 걸 볼 때면 문화에 대한 문외한인 나조차도 가끔씩은 가슴이 철렁할 때가 있다. 

여기 바로 내 눈앞에 있는 ‘정동진역’ 같은 아주 작은 바닷가 마을의 아주 작은 기차역, 간이역조차도 말이다. 엄청나게 대단한 역사적 사건이나 거대한 발자취가 있었던 현장까지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단순한 유행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정취를 지니고 있는 장소다. 더구나 그 히스토리도 알게 되니깐 더더욱 보존을 하지 않으면 후회할 정도의 쏘울(soul)까지 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지 않았는가.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는, 이 작은 정동진역을 그때는 문화의 차원을 넘어서서 강릉의 ‘전통’으로까지 인정해 주면서 계속 더 보존하고 따라줄지 아닐지의 그 여부는 우리 후손들의 몫일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지금 이 순간만큼은, 우리의 이 ‘정동진역’을 과거의 그저 그런 흔한 기차역 중 하나처럼 기억 속으로 사라지게 하면서 그 시절에만 잠깐 반짝했던 유행의 드라마 촬영지 건축물로만 남겨둘 것인지, 아니면 계속 이대로 보존하면서 소중한 가치를 지켜내어 결국에는 우리의 ‘문화유산’ 중 하나로 더 발전시킬 수 있을지는 후손의 몫이 아니라 바로 우리,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몫일 것이다.      


시간의 힘을 힘겹게 거쳐 온, 보존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귀중한 존재를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의 ‘문화’로 남겨둘지 아닐지는 신중하게 선택해야 하지 않을까. 단순히 시간만 흐른 것은 그냥 시간 그 자체이지만, 그렇게 흘러간 시간 동안 애써 보존하여 지켜낸 것이 있다면 어떤 특별한 가치를 더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지 않고 그 가치에 우리의 정체성과 쏘울을 부여할 수 있도록 더 오랫동안 그 가치를 소중하게 지켜낸다면, 하나의 중요한 문화로 발전되는 것도 가능한 것이다. 얼마나 오래 보존해 왔는지, 즉, 뿌리내린 시간의 깊이에 따라서 정체성과 쏘울의 깊이가 달라지고, 문화의 깊이까지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과연 ‘정동진역’에만 해당되는 것일까? 우리 자신은 어떨까? 우리 자신 또한 우리의 정체성을 잘 갈고닦아서 항상 잘 지켜낼 수만 있다면, 우리 자신 또한 ‘하나의 문화’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 문화를 지켜내는 것과 우리 자신을 지켜내는 것이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런 것들이 결코 작은 것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거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자신의 고유한 모습을 그대로 잘 지켜낸다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을 많이들 체감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것이다. 특히나, 우리나라는 개인보다는 집단을 더욱 중시하는 분위기가 짙게 깔려있어서, 아무리 열심히 잘 살고 있을지라도 자신의 내면적인 자아와 정체성을 항상 온전한 상태로 보존하는 게 쉽지 않을 때가 많다. 이렇게 우리 자신하나 스스로 못 지켜낸다면, 우리의 소중한 문화하나 우리가 스스로 못 지켜낸다면, 과연 우리나라는 우리가 잘 지켜낼 수 있을까. 그전에 이미 나가떨어질 거 같은데? 나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내공도 없는데, 어찌 그리 커다란 걸 지킬 수가 있을까?      



우리의 문화나 우리 자신의 좋은 모습을 해로운 것으로부터 소멸되거나 훼손되지 않도록 잘 지켜내는 것 자체가, 어쩌면 애국의 첫걸음일지도 모르겠다. 꼭 태극기 들고 큰소리로 싸워야지만 애국인가. 해외의 여러 다른 나라들한테, ‘우리한테도 이런 괜찮은 문화재가 있고, 우리처럼 괜찮은 한국인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자체가 일종의 애국이 아닐까 싶은데. 이게 바로 애국의 첫걸음? 애국의 첫걸음마? 아닐까. 우리의 위대한 진짜 애국자였던 조상님들한테는 너무 송구스럽고 죄송하니깐, ‘애국의 첫걸음’ 정도로만 표현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애국을 스스로 알아서 실천하겠다는데, 왜 우리 주변은, 왜 우리 사회는, 종종 이런 우리의 작은 애국심을 그리도 몰라주는 걸까. 엄청나게 대단한 독립투사나 진정한 애국자까지는 나도 여력이 없어서 거기까지는 무리일 것 같지만, 최소한 ‘괜찮은 한국인’으로는 남고 싶어서 나 하나쯤은 좀 스스로 지키고 싶다는데 말이다. 


왜 그렇게들 주변에서는 그걸 지지해주지는 못할망정, 그냥 놔두지는 못할망정, 그 작은 실천조차도 서로들 힘들게 할 때가 많을까. 주변에도 보면 그런 경우들이 종종 보이지 않는가? 서로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에서는 상대방의 고유한 자아나 정체성을 존중해줘야 하는 게 기본이어야 하는데, 그런 걸 아무렇지도 않게 경시하거나 원래부터 그런 건 없었던 것처럼 취급하는 것 말이다. 이런 작은 애국조차도 실천하지 못하게 하면서, 왜 자꾸 그렇게 커다란 나라를 위한 애국만을 강조하면서 외쳐대는지. 나는 가끔 이런 ‘언밸런스(unbalance)’함에 경이로운 감정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오오오. 놀라운 광경이로구나. 

이걸 한번 시트콤으로 만들어 봐도 재밌겠는 걸? 

아이러니를 넘어서서. 가끔은 무척이나 유머러스해! 

심심하지 않아서 좋네. 지금 여기 말이야’     



‘여긴 어디?? 나는 누구?!?!’      



나라는 과연 알고는 있을까? 

우리 개개인이 이렇게 ‘자신을 지키는 작은 애국’조차도 실천하는 게 쉽지 않은 공기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거기 공기랑 우리 공기랑은 서로 좀 많이 달라서 모르시려나?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모르실 수도 있겠구나. 

아, 그렇구나.    


 ‘거긴 어디?? 님들은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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