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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ring Apr 02. 2024

(1-9)_반고흐 자화상의 시선들

feat. 진짜 고흐를 찾아라!




뭐랄까.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이 등장하는 대부분의 고흐 그림들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시선과는 매우 다른 온도를 지닌 반대의 시선들이, 다양한 자화상에서 각기 다른 모습으로 보이는 것 같다. 마치 세상을 향한 그의 시선에서 우러나오는 온도처럼 느껴진다. 고흐의 자화상들은 전체적으로 어둡고 침울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어딘가를 공허하게 응시하는 듯한 눈빛도 있고, 엄청 심각하거나 경직되어 있는 모습으로 보일 때도 많다. 역시 고흐는 자신의 모습조차도 전혀 미화하고 싶지 않았던 듯하다. 아름다운 자연 풍광의 그림들과는 달리 자신의 모습은 이렇게 음울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것도 거의 있는 그대로 담은 걸 보면 말이다.

      

교회 조직 시스템 밖으로 나와서 고독한 예술가의 길로 들어섰으니, 엄청난 가난의 연속이 시작되었다. 항상 배고픈 일상에 허덕였던 것도, 저렇게 어두운 자화상들의 원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다행히도 동생 테오의 금전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할 수는 있었지만, 화가라는 직업을 마음 편히 하기에는 전혀 넉넉하지 못한 형편이었다. 무엇보다도 화가로서 성장하기 위해서는 모델 비용 자체가 기본적으로 큰 부담으로 작용하는데, 반 고흐는 미술 교육을 정식으로 받은 상태도 아니었고 꽤나 늦은 나이에 시작을 하게 되었으니 그림 연습을 위한 모델 비용 자체가 매우 절실한 상태라서 더더욱 가난에 쪼들릴 수밖에 없었다.  

  


형편이 이러하다 보니 자신을 모델로 쓸 수밖에 없었고, 그림 연습을 위해서 수없이 많이 등장시킨 모델이 바로 반 고흐 자신이었던 것이다. 결국, 저렇게 수많은 자화상을 그리게 된 배경이 ‘가난’ 때문이었는데, 그 ‘가난’ 덕분에 대부분의 자화상 결과물들이 더욱 어둡고 쓸쓸하게 그려졌을 것 같은 쌍방적인 ‘인과 관계’가 참 아이러니해 보인다. 너무 씁쓸하게 안쓰러울 정도니 말이다. 


말 그대로 저 자화상들의 실상은, 엄청난 ‘생존형 화가’의 아등바등한 성장기에 탄생한 ‘성장형 작품’들의 시리즈 나열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더 정확히는, ‘생존형 셀프 성장용’ 작품들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미술을 배울 돈도 없고 늦게 시작한 그림 공부라서 거의 순전히 독학으로 할 수밖에 없었기에 주구장창 자신만을 모델로 하면서 셀프 학습을 할 수밖에 없었던 과정의 결과물 말이다. 더구나 배고픈 배를 움켜잡고 눈물 젖은 빵으로 간신히 버텨가면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치던 예술가의 고군분투로 남겨진 작품 시리즈였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고흐 스스로가 이렇게 점점 더 가난한 화가의 삶을 살게 된 덕분에 그의 그림에 주로 등장하던 가난한 서민들에 대한 삶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었고, 이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또 하나의 좋은 밑거름이 되어줄 수 있었다는 것이다. 

화가로서는 참 좋은 영양분이라고 할 수 있었겠지만, 그저 인간 고흐의 개인적인 삶의 측면에서는 참 뼈아픈 현실이 아닐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이중적인 현실이 참 애석할 정도로 아이러니해 보였다. 고흐는 원래 애초부터 힘든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연민의 감정이 넘쳐나던 사람이었는데, 본의 아니게 자신 또한 가난에 허덕이는 삶을 살게 되었으니 거의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애틋하게 바라보게 되는 시선이 형성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화가가 되기 전에 탄광촌 사람들의 삶을 직접 경험하고자 했던 그 애씀과 희생 또한 고흐의 그림 속 따스한 시선으로 충분히 녹아들어 갔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농부나 광부의 삶을 실제로 체험하는 것 자체도 굉장히 헌신적인 노력이 분명하지만, 실제로 자신의 삶 자체가 가난에 시달렸던 것은 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욱 현실적인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고흐가 예전에 직접 체험해 봤던 노동자들의 삶이든, 자신의 실질적인 가난의 삶이든, 모두 다 화가로서는 좋은 시선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준 엄청난 밑거름이자 비료가 되어 주었을 것이다. 비록 고흐 자신은, 너무 괴로운 고통과 그것들을 맞바꿔야 했겠지만 말이다.ㅠㅠ     


사회적 시스템 밖으로 나와서 혼자만의 힘으로 자신이 추구하던 소중한 가치를 실현하고자 했으니, 이렇게 지독한 가난에 시달렸던 것은 물론이고, 무명 화가로서 그림 작업에 몰두하느라 항상 고립된 생활을 하다 보니 고흐는 정신적으로도 많이 황폐해져 갔던 것 같다. 재정적인 어려움이 지속되면서 현실적인 문제에 시달리게 되면 원래 멀쩡하던 사람도 그리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데다가 고흐는 탄광촌에서의 꿈이 좌절된 적이 있지 않은가. 그런 내적 고통과 상처들이 회복되기도 전에 바로 이어진 삶 또한 금전적인 어려움으로 인한 장기간의 빈곤함이었으니, 보통 사람들도 견디기 힘든 삶이었을 것이다. 

반 고흐가 정신적 발작 증상이 있었다는 사실에는 많은 이들이 솔깃하는 것 같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던 그 전의 이런 사유들은 많이 조명되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탄광촌 관련 스토리가 많이 보이지 않았던 것 보면 말이다. 어쩌면 고흐는 그저, 그때 그곳의 희생양이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탄광촌의 어린양.  




이렇게 고흐의 아픈 사연들을 알게 될수록, 그의 자화상들이 더욱 예사롭지 않게 보였다. 

저렇게 어둡고 쓸쓸해 보이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겹고 궁핍한 사람들에 대한 고흐의 시선은 그렇게 충만한 따스함으로 가득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자신의 자화상에서는 정반대로 심각한 인상과 함께 경계심으로 가득 찬 시선들이 많아 보인다. 마치 자신의 진정성을 왜곡하고 천재성을 제대로 바라봐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원망과 적대심에서 우러나오는 시선처럼 말이다. 탄광촌에서 좌절된 성직자의 꿈뿐만 아니라, 전혀 팔리지 않는 그림 작품들 덕분에 화가로서의 꿈도 좌절의 연속이었을 테니깐.     


그런데 그 수많은 자화상들 중에서도, 탄광촌의 스토리처럼 덜 알려진 자화상이 하나 있는 것 같다. 그래도 서적 자료들에서는 좀 보이는 것 같지만, 원래는 전시용 작품이 아니라 개인 소장용 목적의 자화상이라고 한다. 고흐가 어머니에게 드리려고 그렸던 마지막 자화상이라서, 전시용이 아니라 개인 소장품이 된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평소에 고흐의 모습으로 자주 보이던 다른 여러 버전의 자화상들에 비해서는 잘 보이지 않았던 그림 같다. 근데 더욱 신기했던 건, 이 자화상만 다른 그림들에 비해서 분위기가 유독 다르다는 점이다. 즉, 내가 원래 알고 있었던 고흐의 모습처럼 보이지 않았다는 거다. 평소에 주변에서 흔히 보이던 그런 고흐의 모습과는 많이 동떨어져 보였다. 



'어이 고흐는그 고흐가 아닌데?' 


'내가 알고 있던 고흐의 모습이 아니잖아?'



그런데 나는 왜 이 그림을 보자마자 순간적으로, 이런 생각이 또 문득 스쳐 지나갔을까. 


원래 고흐의 진짜 모습은, 이 그림이 아닐까?’


우리에게 평소에 수시로 보였던, 아니 방금까지도 봤었던, 그런 다른 자화상들의 모습이 진짜 고흐가 아니라, 마치 이 그림만 진짜 고흐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순간 퍼뜩 지나가는 것이었다. 왜 그랬나 했더니, 잠시 후에 그 이유를 바로 알 수 있었다  




'맞다시선.' 


'저 시선이 유독이 자화상 하나만 다르잖아.'



대부분의 다른 자화상에서 보이던 고흐의 시선처럼 딱딱하게 굳어있거나 매섭게 경직되어 있지 않았다. 

자화상이 아닌 고흐의 다른 그림들, 즉 풍경이나 농부들의 그림들에서 느낄 수 있었던 바로 그 시선이었다. 


농부와 광부들의 삶을 인간적으로 바라보던 그 순수하고 정직한 시선. 

그들의 힘겨운 노동을 깊은 애정으로 바라보던 그 따스한 시선. 

그 시선들이 바로, 이 자화상에서 보이는 것이었다. 

유독, 이 자화상 하나에서만! 


눈매와 눈빛 자체가 다르지 않은가. 고흐가 원래 가지고 있었던 본연의 자기 시선이 유독 이 자화상에서만 느껴진다는 것은, 결국 이 자화상만 제일 진짜 고흐처럼 보이는 이유와 뭐가 다르겠는가.

      


아니, 그럼 고흐는 지금까지 자신의 모습을 왜 그렇게 심각하게 엄한 모습으로만 가득하게 그렸을까. 

설마, 우리의 고흐가 거짓 시선으로 그린 걸까? 노우. 아니. 이 그림은 어머니에게 드리기 위해서 그렸던 마지막 자화상이다. 즉, ‘어머니를 향한 시선’인 것이다. 평소의 모습처럼 세상을 향한 시선이 담겨 있지 않은 자화상인 것이다. 그만큼 원래 본연의 고흐가 지니고 있는 자아와 쏘울의 모습에 가장 가까운 작품이 되어준 게 아닐까.      


대부분의 자화상들은 무엇보다도 가난한 삶 덕분에 어두운 분위기에 휩싸인 것 같기도 했지만, 특히 고흐의 시선들이 대체로 방어적이거나 경직된 듯한 느낌이라서 더 인상적이지 않았던가. 지금껏 세상에 대한 수많은 좌절로 인해서 생겨버린, 고흐의 ‘세상을 향한 시선’ 같았다.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들은 마치, 나의 다른 모든 것들은 좌절시켰을지라도 신앙심과 진정성으로 가득한 나의 진짜 자아와 쏘울(soul)만큼은 뺏기지 않으려는 몸부림의 일종처럼 미리 경계 태세를 하는 듯한 방어적인 모습 같았다. 자신의 그것만큼은 지키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로 가득 찬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 마지막 자화상에서는, 그런 두려운 경계심과 완강한 방어막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 평온해 보인다. 평소의 고흐답지 않게 말이다. 어머니는 세상 사람들처럼 자신의 진정성을 왜곡하거나 자아를 빼앗을 사람이 아닌 걸 알아서 마음이 너무 편안해진 걸까. 아니면, 이 세상에서 자신이 해야 할 소명을 이제는 다 했다는 것을 미리 직감한 것일까. 자신에게 주어진 화가로서의 소명을 다 마쳐서 느껴지는 평온함과 안도감인 걸까. 아니면 지금껏 달려온 그림 작업에 대한 세상의 반응이 없어서 이제는 그만하고 싶다는 허탈감인 걸까. 그림 아닌 다른 세상으로는 뛰어들 엄두도 나지 않아서 저렇게 무력한 평화로움처럼 보이는 걸까.    

 

고흐의 진짜 감정이 뭐였든 간에, 나는 이 마지막 자화상 속의 고흐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하니, 가슴속에서 잔잔한 애잔함 같은 것이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아이고, 고흐 아저씨... 그동안 너무 수고 많았을 것 같네요.ㅜㅜ
당신의 진짜 모습은 이 그림처럼 순수하고 선량한 영혼 같아 보이는데, 
그 맑은 쏘울로 지금껏 이 각박한 세상이랑 홀로 고군분투했다면, 엄청 힘들고 고독했을 것 같네요.
지금껏 홀로 버티느라 얼마나 애썼을까요...ㅠ’



아니... 다른 자화상들과는 달리 이것만은 어둡지 않고 그래도 제일 환한 느낌의 괜찮은 그림인데 나는 왜 이런 정반대의 온화한 분위기에서 갑자기, 그동안 그가 겪었을 모든 애환과 고뇌와 아픔이 한꺼번에 확 몰려오는 느낌이 들었을까. 아무리 유명한 다른 그림들보다도 이 자화상 그림 한 장에서 왜 그런 오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던 걸까. 고흐가 짊어지고 있었을 삶의 무게감이 묵직하게 흘러내려서, 내 가슴속의 슬픔 버튼까지 지그시 눌러버린 것 같았다.

   

이런 사람이 세상의 그늘에 의해서 자신의 빛을 너무 어둠 속에 가두기만 하고 떠난 것 같아서, 왠지 모르게 자꾸만 가슴 한구석이 시린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이렇게 소중한 사람의 가치를 잘 알아보고 지키기 위해서라도, ‘가치 문맹인’이 되지 말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때 반 고흐를 잃은 것은, 그 시대의 비극인지도 모른다. 동시대 사람들이 그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해서 결국은 끝내 싸늘한 주검으로 하늘로 보내야 했으니 말이다. 자신 주변의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 그들의 가치를 고흐는 알아봐 주었는데 정작 그들은 고흐의 가치를 알아봐 주지 못한 것이다.



**P/S:  매거진 <정동진>의 원본 글 '#다양한 문화의 비밀'의 일부분을 분리하여 구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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