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행복한 자아!
만약에 고흐가 상류층 사람들을 위한 그림만 그렸다면, 과연 저렇게 사람들이 그림의 가치를 바라보지 못했을까. 아니. 저 능력을 그런 데다가 썼었더라면, 어쩌면 완전히 그 시기의, 그 세기의 평가 자체가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그때의 동시대에서는 말이다. 훨씬 더 빨리, 훨씬 더 많은, 인정을 받았을 수도 있었을 테니깐.
하지만, 반 고흐의 시선이 남다른 이유가 바로 이런 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다 가치가 높다고 생각하고 당연히 그렇게 알고 있는 ‘상류층’의 아름다운 미적 가치만을 전달하는데 주력하지 않았다는 점 말이다. 아니 오히려 대부분은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아서 그들의 가치를 잘 모르고 지나치는 ‘서민층’의 평범하고 소박한 일상을, 왜곡하지 않고 아주 따스한 시선으로 있는 그대로의 소중함을 전달하려고 노력했다는 그런 점 말이다. 김소연 건축가가 다양한 계층의 삶이 존재하던 흔적과 공간을 소중히 여겼던 것처럼, 반 고흐 또한 가난해서 힘겹고 어려운 삶에 대한 소중한 가치를 하찮게 여기지 않고 값지게 바라보았던 그런 따스한 마음과 시선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은 예전의 ‘농촌 계몽 운동’과는 조금 다른 방향의 ‘계몽가’들처럼 보인다. 보통은 ‘계몽’이라고 하면 더 많이 알고 더 배운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가르쳐서 깨우치는 행위로써, 위에서 아래의 수직적 방향으로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일 것이다. 이렇게 좋은 지식과 높은 가치를 제대로 더 알리고자 하는 것들을 기본적인 계몽이라고 할 수 있을 테고 말이다.
하지만 꼭 대단히 높은 가치나 특급 지식까지는 아닐지라도 소중한 가치가 내재되어 있는 것을 아예 발견조차도 못해서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비록 작은 가치일지라도 볼 수 있도록 눈을 뜨게 해주는 것 또한 일종의 아주 귀한 계몽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현대 시대에는 수평 방향에서 서로 다양한 가치를 깨닫게 되는 과정도 일종의 계몽이라고 할 수 있는 만큼, 예전의 수직 방향을 ‘역으로’ 바꿔보는 것 또한 어쩌면 요즘 시대에 진정으로 필요한 계몽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즉, 지금의 구역사(舊驛舍) 정동진역의 소중한 가치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 주변의 지역 사람들 로컬 주민들이나 관광객들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국가 예산 및 정책을 결정하는 관계자 분들은 막상 그 가치의 소중함을 모르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니깐 구역사(舊驛舍) 정동진역 폐쇄 혹은 신역사(新驛舍) 신설과 같은 의사 결정을 쉽사리 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국민과 시민들의 아주 소박한 일상과 주변 풍경의 소중한 가치를
더욱더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눈과 안목이 더 필요하지 않으실까.
그런 분들이 더욱 절실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설마 우리들만, 그런 분들이 좋은 혜안을 가지길 원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데 그런 계몽은 위에서 아래로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그런 의사결정을 하시는 분들이, 설마 그런 가치를 알고 있는데도 일부러 무언가 없애려고 악의로? 굳이 그런 결정을 하시는 걸까? 뭐, 아주 최악의 경우에는 그럴 수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꽤나 많은 경우에는 아마도 우리가 사는 일상적인 삶의 현장과 보통 사람이 사는 공기의 어려움을 접해보지 못해서, 잘 모르니깐 그러는 경우가 다반사일 것이다. 즉, 이런 경우에는 오히려 아래에서 위로 하는 계몽이 필요한 것이고 말이다.
모르는 것은 죄가 아니다.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한테 알려주면 되는 거니깐. 그래서 앞의 글에서, 내가 살고 있는 여기가 어디인지? 나는 누구인지? 종종 헷갈린다고도 했지만, 그와 동시에 그런 분들이(ex) 의사결정자) 살고 있는 거기는 어디인지? 그런 곳의 공기는 어떠한지? 그들 또한 누구인지도 모르겠다는? 그래서 동시다발적으로 더 혼란스럽다는? 조크 아닌 조크를 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경우들은 아래에 있는 평범한 우리가 위에서 결정하시는 분들한테 자꾸만 알려주지 않으면 아마도 절대 모르고 쓱 지나치는 경우들이 아주 흔하게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비일비재하게 말이지. 직접 삶에서 부딪히고 마주하는 사람들이 제일 잘 아는 경우니깐 말이다. 그만큼 우리가 사는 보통의 삶에 대한 소중함과 힘겨움과 어려움을 좀 제대로 알아줄 수 있도록 ‘아래에서 위로의’ 역방향의 계몽이야말로, 이 시대에 진정으로 필요하고 값진 계몽이 아닐까 싶다.
(특히, 이 시대에 말이다. 지금처럼 혼란스러운 과도기에 가까운 이런 시기에 말이다.)
우리의 반 고흐가 이미 오래전에 그런 계몽을 아주 훌륭하게 여러 그림을 통해서 그런 시도를 했듯이 말이다. 다만 살아생전에 그런 빛나는 계몽 활동 같은 그림 작품들이 인정을 받지 못해서 너무 안타까운 마음이 가득할 뿐이다. 그런 흔치 않은 귀한 시선을 가지고 있었던 반 고흐가 막상 그 시대에는 전혀 인정받지 못해서 굶주림에 시달리고 고생을 했던 것처럼, 어쩌면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세상도 진짜 저렇게 괜찮은 사람들이 어딘가 어둠 속에 갇혀서, 그 시대의 반 고흐처럼 하루하루 시들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전혀 가치 있게 대우받으면 안 되는 사람들이 오히려 반대로 떵떵거리고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가슴 아픈 비극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우리 스스로가 가치를 더 바라볼 줄 아는 안목을 키워야 하는 건 아닐까.
우리 스스로가 ‘계몽인’이 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이유들이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닌가 싶다. 다른 사람들한테 무언가를 알리고 전달하는 거국적인 ‘계몽가’까지는 아닐지라도, 항상 조금이라도 더 깨어있고 싶은 마음으로 어둠보다는 빛을 볼 줄 아는 시각과 안목을 가질 수 있도록 나 스스로 노력하는 ‘계몽인’ 말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 정동진역을 지키는 것과 나 자신을 지키는 것은 절대로 작은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아니, 절대로 작은 일이 아니다. 반 고흐도 저렇게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은 엄청 힘들어하다가 가지 않았는가. 끝끝내 제대로 지키지 못하지 않았는가. 가난한 사람들의 쏘울은 그 거룩한 그림들로 구원했으면서, 끝끝내 자신의 쏘울은 그 거친 세상으로부터 구원하지 못했다. 끝까지 지켜내지는 못했다.ㅠ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계몽은 했으면서, 자신을 위한 계몽은 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역방향의 계몽이 중요한 것이다. 나처럼...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의 삶도 소중한 것을 꾸준히 알려하니깐 말이다. 하루하루가 어렵고 힘겨운 삶이라고 해서 경시되어야 하는 게 아니라, 그만큼 더욱 소중히 여겨져야 한다는 인식을 공유하고자 노력하는 게 중요하니깐 말이다. 가냘픈 생명력으로 버티고 있는 삶이라서 더 대단한 거라는 인식! 적어도 그 시대의 동시대 사람들만이라도 이런 인식을 가지고 고흐의 그림과 삶의 가치를 그때 제대로 볼 줄만 알았더라면, 그렇게 보석 같은 시선을 가진 그런 예술인을 그리 허망하게 보내야만 했을까.
결국. 정동진역도. 나도. 끝까지 지켜봐야 하는 것이다. 시간의 힘은 보존의 가치를 낳고, 보존의 힘은 역사와 문화의 가치를 만들어 내서, 하나의 고유한 쏘울(soul)이자 정체성으로 발전될 수 있다. 이런 것들은 결국 나만의, 우리만의, 독특하고 고유한 상징성과 매력으로 발현될 수 있는 것이고 말이다. 우리의 혼(쏘울)을 지닌 문화의 힘이 곧 우리만의 매력이 아니고 뭐겠는가.
그렇게 끝까지 지켜낸 문화들은 궁극적으로 우리만의 문화재가 된다. 국가가 지정해 주는 여부와 무관하게, 그런 형식적인 문제들을 떠나서, 우리 가슴에 남아있는 하나의 소중한 문화재가 되는 것이다. 우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지 않은가. 우리 오늘부터 더 잘 지켜보자. 나에게 소중한 문화라면 그게 뭐든 간에 말이지.
이렇게 서로가 각자 다른 고유의 문화일 뿐이다. 그래서 서로가 존중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서로가 다르면, 서로가 틀리다고 비방을 하려고 하는 것일까. 서로 다른 것을 그저 인정을 하면 되는 것뿐인데 말이다. 굳이 상대방이 일방적으로 선호하거나 따르라고 강요하는 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뭐가 문제인가? 그저 서로가 상대방 문화의 그 존재를 인정해 주면 되는 것인데 말이다. 서로 각자가 ‘다른’ 문화일 뿐이다. 어느 누가 다른 누구한테, 틀리다고 단정할 만한, 그럴 수 있는 판단 기준이라도 있는가?
문화는 다양하면 다양할수록 오히려 풍성하게 좋은 문화인 것이지, 하나 같이 획일적으로 동일한 문화처럼 매력 없는 것이 또 있을까. 여러 계층이 모여 있는 두꺼운 문화에서 더 깊이가 느껴지고, 여러 성향이나 특성이 모여 있는 넓은 분포의 다양한 문화가 더 매력적인 것처럼 말이다. 세월의 깊이뿐만 아니라 다양성의 두께와 넓이까지 어우러지면 그들만의 독특한 매력을 지니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다수와 다르면 틀렸다고 단정 짓고 비방하는 문화가, 너무 오랫동안 당연시되어 와서 그런 의식이 밑바닥에 짙게 깔려있는 것 같다. 서로가 서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그런 이상한 집단 문화 말이다. ‘다름’과 ‘틀림’은 분명 엄연히 다른 것인데 말이다. 어떠한 도덕적인 인식이나 법률적 기준과 관련된 것이라면, 그런 것들은 기준점을 중심으로 옳고 그름의 구분이 가능하기 때문에 ‘틀리다’ ‘잘못됐다’라는 판단 여부가 성립될 수 있지만, 어느 누가 문화에 대해서 ‘틀린 문화’ 혹은 ‘잘못된 문화’라고 표현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도덕이나 법률과 관련된 것들은 타인에게 피해를 끼칠 수 있기 때문에 ‘틀리다, 잘못이다’라는 판단 여부가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서로 다른 것 일뿐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라면, 그저 ‘다른 문화’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도덕적 인식의 기준도 서로 다를 때가 있어서, 도덕의 범주가 아니라 문화의 범주로 넣어야 할 때도 많아지고 있는 이 시대에는 더욱더 그럴 것이다. 예전에는 도덕적이지 않다고 했던 것들 중에서, 지금은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 도덕적인 것들도 얼마나 많아졌는가. 이 또한 시대별, 사회별로 기준과 잣대가 달라질 수가 있는 것인데, 전혀 도덕이나 법률적인 측면의 성격이 아니라면 더더욱 문화적인 범주로 분류하여 서로 인정하고 존중해줘야 하는 것 아닐까.
그만큼 ‘틀렸다, 잘못됐다’라는 그런 잣대를 문화한테 들이대는 것 자체가 어불 성설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서로 ‘다른 문화’라는 것을 인식하고 인정할 수 있는 것뿐이지,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한테 서로 ‘틀린 문화’라고 비난하면서 억압하거나 탄압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나의 개인적인 선호나 취향에 따라서 내가 더 좋아하고 더 따르는 문화는 있을 수 있지만, 별로 내가 선호하는 문화가 아니라고 해서 그런 것들을 ‘틀린 문화’라고 표현하지는 않는다. 서로 ‘다른 문화’가 존재한다고 생각할 뿐이지.
즉, 우리는 서로의 ‘다름’을 각자 지니고 있는 ‘나만의 문화’로서 서로 존중할 필요가 있다. 그런 것이 결국 이 사회의.. 이 나라의.. 다양한 문화의 생명력이 되는 것일 테니깐 말이다. 이런 사회적인 문화가 조성되어 기본 밑바탕이 되어야지, ‘나의 문화’가 지켜질 수 있으므로 궁극적으로는 나의 소중한 ‘자아 정체성과 쏘울’도 보존되어 유지될 수가 있는 것이다. 나의 자아와 정체성이 지켜질 수 없으면, 나의 ‘행복’도 지킬 수가 없다.
결국은 이 모든 것들이 나의 행복과, 그리고 우리의 행복과 연결된 것이다.
다양한 문화가 인정되고 존중받을수록, 그 사회 안의 다양한 자아(自我)들이 숨을 쉴 수가 있어서 다양한 모습의 우리들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 배척받는 문화가 많을 사회일수록 우리의 행복 또한 배척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면, 나와 다르다고 해서 상대방의 문화를 함부로 짓밟는 시대착오적인 행동은 쉽게 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 당장은 나의 문화와 행복이 운 좋게 지켜진다고 해서 그런 사회를 방치하고 방심했다가는, 나중에 언제 어디서 또 나의 자아와 행복이 침범당하고 무너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다.
다양성이 거의 부정되어 존재하지 않고 배척과 몰이해가 많은 사회 문화일수록 그럴 확률은 훨씬 높기 때문에, 나의 행복만 무조건 안전할 수 있는 확률도 그만큼 줄어든다고 봐야 하니깐 말이다. 의외로 행복은 이렇게 서로 연결되어 있을 때가 많다. 그만큼 아예 기본 텃밭 자체를 다양한 비료가 들어가 있는 양질로 가지고 있는 사회가 제일 좋은 것 아닐까. 나의 행복 뿌리와 줄기가 무럭무럭 자랄 수 있도록.
반 고흐도 평생에 걸쳐서 자신의 자아 정체성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했던 인물이다. 그런데 결국에는 화가로서도 그런 자신의 소울과 자아를 끝내 지켜내지 못했고, 그만큼 불행했기 때문에 결국에는 자신을 끝까지 지킬 수 없어서 그렇게 허망하게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일 테고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밤은 유독 이 노래의 가사가 더 가슴에 와닿는 느낌이 드는 것 같다.
Don McLean (돈 맥클린)의 'Vincent(빈센트)'
스테리 스테리 나잇~~~
(Starry Starry Night~~)
이렇게 아름다운 선율로 시작하는 노래에서.
다른 가사들 중에서도, 다음의 이 두 마디의 가사는.
내 가슴을 조용히 찌르는 듯한... 아름다운 비수 같이 들려오는 것 같다.
(Now, I understand what you tried to say to me...)
(And how you suffered for your sanity...)
(And how you tried to set them free...)
우리 반 고흐의 맑은 쏘울을 기리는 이 노래가.
오늘따라 더 슬프고 청아하게 들리는 건.
나만이 느끼고 있는 환청이 아니겠지.ㅠ
그대들도 이 느낌을 꼭 한번 느껴봤으면 좋겠다.
‘나’라는 인간문화재를 위해서라도.
**P/S: 매거진 <정동진>의 원본 글 '#다양한 문화의 비밀'의 일부분을 분리하여 구성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