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다싱국제공항, 중국
북위 약 39.5도. 여기는 베이징 남단에 위치한 다싱 국제공항이다.
나는 암스테르담행 CZ345편 탑승을 기다리고 있다. 지난 1월에도 이곳에서 같은 비행기를 기다렸다.
고환율과 주머니 사정을 생각해 면세점 쇼핑은 건너뛰었다. 대신 채광이 잘 드는 통창 앞에 자리를 잡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중이다.
다싱 공항은 베이징의 두 번째 국제공항이다. 2019년에 문을 열었지만, 한동안은 코로나로 이용객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체감상으로는 거의 새 공항이나 다름없다.
천장을 향해 버섯 모양으로 퍼진 회백색 기둥과 보송한 카펫이 그 인상을 더욱 또렷하게 만든다. 공항 서비스 역시 다른 중국 공항에 비해 매우 좋은 편이다.
통창으로 베이징의 봄 햇살이 스며든다. 제법 강하다. 화면 위로 반사된 빛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잠시 눈을 감았다.
슬슬 실감이 난다. 나는 지금 유럽으로 가고 있다.
갑작스러운 결정도 아니고 처음 있는 일도 아니다. 그런데도 갈 때마다 마음이 들뜬다.
왜일까.
방문 목적은 ‘연주 활동‘이다. 그러나 공연으로 돈을 버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쓰는 쪽에 가깝다. 이번에도 비용을 줄이기 위해 친구 집을 전전하며 샌드위치로 끼니를 때울 예정이다. 점점 더 버거워지는 시차 적응도 걱정이다.
유럽에 대한 막연한 동경 역시 휘발된 지 오래다. 인생의 4분의 1 이상을 독일과 네덜란드에서 보냈다. 실제 유럽 생활은 영화 속 낭만과는 거리가 멀다. 복잡한 정치, 경기 침체, 이웃 나라의 전쟁, 까다로운 이민과 난민 문제. 지금 그곳이 마주한 현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나는 기꺼이 고국을 뒤로하고 떠난다. 이방인이 되는 이 길을, 다시 가는 중이다.
이방인. 그래, 어쩌면 이방인이 되고 싶어서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릴 적부터 그랬다. 주류에 섞이기보다는 아웃사이더로 비껴 서 있는 것이 속 편했다.
서로 ‘핑크’와 ‘옐로’ 파워레인저를 맡겠다며 다투던 유치원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블루(트리켈라톱스)’만을 고집했다. H.O.T., god, 신화로 들끓던 중학교 교실에서도 나는 Westlife와 문학 선생님에게 심취해 있었다.
비껴 서 있던 순간들은 사라지지 않고 축적되었다. 그리고 지금의 나, 이방인의 삶을 즐기는 자아를 빚어냈다.
혹시 주류로부터 도망가고 싶은 것은 아니겠지.
아니다. ‘무명 씨’가 되는 것은 싫다!
두뇌가 명석한 나, 뚱뚱하지 않은 나, 아픈 곳 없는 나, 음악적인 나, 독립적인 나, 위기 해결 능력이 뛰어난 나, 그래서 무엇이든 해내는 강한 나 — 사실은 누구보다 돋보이고 싶다. 그러나 소란스럽지 않게, 조용히 잘난 사람이고 싶다.
망상이다. 알고 있다. ‘돈은 많은데 안 유명했으면 좋겠다’는 한 배우의 농담 같은 헛소리다. 비웃어도 괜찮다. 현실 도피라 비난해도 상관 없다.
피곤한 천국인 고국의 삶에 쉼표를 찍은 것만으로도 일단 만세다. 한국에서의 나는 슈퍼, 초초초 초자아였다. 더 많은 연주와 강의로 바빠져야 하는 와중에도 늘 여유로워 보여야 했고, 누구에게나 친절해야 했다.
그런 일상에서 벗어나 누리는 이방인의 자유라니. 너무 소중해서 심장이 쫄깃해질 정도다. 게다가 동경하는 음악가들과 바흐의 음악까지 할 수 있다. 완전 메르시 보꾸, 멸치볶음이다. 성난 망아지 같은 이드의 고삐가 제대로 풀리는 순간이다.
한편 매번 비뚤어진 욕망과 괴짜 같은 이상 사이를 오가는 나의 에고, 이 불쌍한 에고는 또 에고고 연거푸 한숨이다. 엉뚱한 공상은 그만두고 아이패드를 접으란다. 어깨너머로 돌아보니 탑승이 시작되었다.
출발이다. 히히. Bon voy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