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프랑스
잠이 오지 않는다.
새벽 세 시쯤 떠진 눈이 다시 감기지 않는다. 현재 시각 오전 5시 36분.
나는 골동품 가게 구석의 진열품처럼 방 안에 박혀 있다. 방은 더블 침대 하나가 겨우 들어갈 정도다. 역시 파리다.
북부역에 도착한 것은 어제 정오 무렵이었다.
묵직한 배낭과 20kg짜리 캐리어가 이번 여행의 동반자다. 이동이 많은 일정이라 최대한 짐을 줄였는데도 감당하기가 쉽지 않다.
리허설 장소로 가기 위해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지긋지긋한 파리 지하철. 탈 때마다 새로운 퀘스트를 던지며 전투력을 상승시킨다. 어찌나 시설이 좋은지. 더러운 환경은 차치하더라도 에스컬레이터는커녕, 있는 엘리베이터마저도 고장 난 경우가 허다하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짐짝을 이고 지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자 육두문자가 절로 새어 나왔다.
몇 번의 탄식과 개탄, 여러 번의 청소년 청취 불가의 분노를 터뜨리고 나서야 나는 겨우 지상으로 빠져나왔다.
포르 드 팡탱 역 앞에 섰다. 주위를 둘러보니 왼편에 자리한 미색 건물이 눈에 띈다. 낯이 익었다. 자세히 보니 파리 고등음악원이었다.
3년 전, 그곳에서 오디션을 봤다.
세 시간 기차를 타고 헤이그에서 파리까지 달려온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15분.
그 짧은 시간 안에 지휘자에게 나의 모든 것을 보여줘야 했다. 그가 바쁜 시간을 쪼개 나를 만나야만 하는 이유를 증명해 보여야 했다.
수업 중이던 세바스티앙은 약속 시간보다 조금 늦게 오디션 장소에 도착했다. 세바스티앙 도세는 프랑스 고음악 연주단체 ‘앙상블 코레스퐁당스‘의 리더다.
나는 몹시 긴장했다. 평소 동경하던 음악가에게 내 목소리를 들려줄 수 있다는 사실이 꿈같으면서도 두려웠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걱정되지는 않았다. 어디서 나온 자신감인지, 나는 왠지 모를 확신에 차 있었다. 한심한 프랑스어 실력이 조금 부끄럽긴 했지만,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유창한 언어보다 나의 음악과 아티스트로서의 매력이 그가 나를 선택할 이유가 될 거라 믿었다.
그리고 꿈은 현실이 되었다. 재작년부터 진행 중인 바흐 칸타타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나는 ‘앙상블 코레스퐁당스‘와 함께 노래하고 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오늘만 벌어진 에피소드 일부만 나열해도 시트콤 한 편이다.
“리허설 장소: Philharmonie de Paris, SR4”
하.
이니셜리즘이 익숙한 이곳 사람들을 생각하면, SR이 연습실을 뜻한다는 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이 거대한 필하모니 건물 안에 연습실이 어디 붙어있는지 알 길이 없다. 당장 아티스트 출입구 찾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다.
안내 직원에게 물어보니 건물을 나와 왼편으로 가라고 했다. 금방 찾을 거라 했는데 왜 내 눈에는 도통 보이지 않는 것인지. 짐짝 친구들을 끌고 필하모니 주변을 세 바퀴나 돌았다. 쌀쌀한 파리 날씨에 챙겨 입은 히트텍이 땀으로 축축해졌다.
결국 포기.
“JE NE TROUVE PAS!“
안내데스크로 돌아와 두 손과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쿨한 유럽식 제스처를 흉내 낸 것이었다. 그러나 얼굴은 전혀 쿨하지 않았다. 오히려 난감함으로 심히 일그러져 있었다.
다행히 한 직원이 아저씨가 직접 안내해 주겠다고 나섰다. 무거운 가방을 들고 낑낑거리는 타지인이 꽤나 딱해 보였던 모양이다.
입구까지 걸어가는 동안 그는 간단한 호구조사와 방문 목적을 곁들인 스몰 토크를 시작했다. 필하모니가 워낙 넓어서 초행에는 누구나 헤맨다는 위로의 말도 건넸다. 프랑스어를 잘 못하는 나를 배려한 속도와 리듬이었다. 경직되었던 마음에 연화제가 스몄다.
마침내 출연자 입구다. 이제 다 왔다. 됐다.
반가운 마음으로 회전문을 돌아 로비에 들어섰다. 그런데 이번엔 보안 검색대가 내 앞을 가로막는다. 가방 검사를 하는 모양이었다. 치안 문제 때문인 것 같았다. 역시 파리다.
보안 여직원이 나를 향해 손을 들었다. 다가가자 검지손가락 끝으로 내 가방과 탁자를 번갈아 가며 가리켰다. 여기 올리라는 뜻이었다. 시키는 대로 여행 가방을 탁자 위로 들어 올렸다. 육중한 무게 때문에 날개뼈 뒤쪽이 욱신거렸다.
“오픈.”
명령조인 그녀의 태도에 미간이 일그러졌다. 밖에서 만났다면 큰 덩치고 나발이고 저 무례함에 대한 참 교육을 시전 했을 것이다. 물론 여기서는 그럴 수 없다. 쫓겨나지 않으려면 복종해야 한다.
비밀번호를 맞추고 지퍼를 열었다.
“오픈.“
알았다고요.
가방 상부를 들어 올렸다. 거대한 입을 열자 짐 맨 위에 개어 놓은 나의 분홍색 몽키 잠옷이 깜찍한 자태를 드러냈다.
“오, 농. 세 빠 그라브. 오께이. 고.”
나의 세련된 잠옷 취향에 적잖이 당황한 모양이었다. 못 볼 걸 본 듯 고개까지 돌리며 가라는 손짓이다.
우씨. 제대로 보지도 않을 거면서 왜 열라고 한 거야. 가방을 다시 바닥으로 내렸다. 날개뼈 뒤쪽이 또 한 번 욱신거렸다.
그때 뒤에서 나지막이 들리는 ‘살뤼‘.
돌아보니 동료다. 한껏 톤을 높여 그의 인사에 화답했다. 매우 반가운 척했지만 실은 별로.
심지어 아까부터 내 뒤에 서 있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일부러 아는 척 안 했다. 재작년 여름, 그는 내가 보낸 문자를 씹은 적이 있다. 덕분에 나는 공연장 언덕배기를 두 번이나 왔다 갔다 했다. 나쁜 놈.
리허설 장소에 짐을 내려놓고 복도 끝 창가의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무릎은 아래로 늘어뜨리고, 팔과 어깨는 양옆으로 길게 폈다. 관절이 맞춰지는 소리와 함께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왔다. 목 뒤와 날개뼈, 허리, 종아리까지 — 안 쑤시는 곳이 없다. 장시간 비행과 기차여행 탓이었다.
이럴 때일수록 잘 먹어둬야 한다. 배낭을 열어 도시락을 꺼냈다.
간장에 절인 계란 두 개, 오이 반 개 그리고 딱딱한 식빵 한 장이 오늘의 점심이다. 헤이그에 있는 동안 머물렀던 친구네 집에서 싸 왔다. 염소 치즈를 곁들인 크레프에 비하면 형편없지만, 15유로를 아꼈으니 괜찮다.
도시락을 비울 때쯤, 웃음소리와 함께 복도 끝으로 동료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리허설 시간이 가까워진 것이었다.
여기저기서 비주가 오갔다. 작년 여름 바흐 투어를 마치고 약 6개월 만에 다시 만나는 얼굴들이다. 서툰 프랑스어지만 반가운 마음에 나 역시 열심히 인사를 주고받았다.
“지, 사바? 너 이번에 솔로 하지? 네 노래를 듣게 되어서 기뻐. 많이 기대하고 있어.”
헙.
수석 바이올리니스트의 한마디에 온몸이 굳어버렸다.
왜 기대하지. 기대하면 안 되는데. 실망할 텐데. 실망하면 안 되는데 — 불안병, 걱정병, 안달병이 또 도지기 시작했다.
슬그머니 자리를 빠져나와 화장실로 도망쳤다. 문을 잠그고 변기 위에 걸터앉았다.
긴장된다. 긴장된다. 어떡하지.
아니야, 감정에 휘둘리지 말자. 이유를 짚어보자.
내가 긴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솔로를 해서일까? — 아니다.
솔로 무대를 통해 잘 보이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냉정이 필요하다.
내가 지금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조수미가 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이번 무대를 망친다면? 이 연주를 마지막으로 이 앙상블과의 인연은 끝날 수도 있다. 그럼 세상이 끝나는 것인가? 물론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다.
일명 ‘조수미 논법‘이다. 긴장될 때마다 꺼내 쓰는 나만의 멘탈 특효약이다.
몇 번의 심호흡과 섀도복싱으로 불안의 찌꺼기를 마지막까지 털어냈다. 원투원투. 한결 개운하다. 가벼운 마음으로 해우소 문을 열었다.
첫 리허설, 나쁘지 않았다.
음악이 시작되자마자 모든 신경세포가 깨어나며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이른 봄날 개울가에 맺힌 살얼음이 물에 실려 내려가듯, 나의 모든 감각도 음악 속으로 천천히 녹아들었다.
역시 음악이 모든 문제의 해답이다. 느낌이 좋다. 이대로 쭉 내일 연주까지 가 보는 거다.
그런데 지금 몇 시지.
아이패드 화면에 6시 48분이 떠 있다.
창문 너머로는 차에 시동 거는 소리와 보도블록 위를 걷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거리를 메우기 시작했다. 하루의 시작이다.
앱으로 확인해 본 오늘의 스케줄.
9:00 호텔 체크아웃
10:00 오전 리허설 @필하모니 파리
13:00 점심
14:00 오후 리허설 @필하모니 파리
17:30 파리 샤를 드골 공항 이동
20:00 코펜하겐 경유 그단스크 비행
00:00 그단스크 도착
01:00 호텔 체크인
길고 피곤한 하루가 예상된다. 눈을 감았다. 귀를 파고들던 소음들이 하나둘 멀어지고, 나는 어둠 속에서 담대해졌다.
살아남으리라. 주문을 외워본다. 나는 강하다. 나는 뷰티풀하다. 나는 할 수 있다.
일단 컨시어지부터 다녀와야겠다. 어제부터 뜨거운 물이 안 나온다. 그런데 그 프런트 직원, 영어 못하는 것 같던데. 아까 체크인할 때 보니 잘 못 알아듣는 것 같았다. 일니야 빠 도 쇼…하면 되나. 아니, 물은 여성명사라 쇼드인가.
다시 주문을 외우자.
나는 강하다. 나는 뷰티풀하다. 나는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