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증의 헤이그 — 알리와 놀라운 샌드위치의 세계

@헤이그, 네덜란드

by 고음가수

나의 알리스 레바니즈 인크레더블 샌드위치.


그동안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네가 그리울 때마다 구글 맵 리뷰를 스와이프 하며 그 아름다운 자태를 훔쳐보곤 했다. 어서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리고 오늘, 마침내 실물 영접이다.


묵직한 빵을 들어 올렸다. 아직 따뜻했다. 들뜬 마음으로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오물오물.


가장 먼저 씹히는 건 얇고 담백한 빵이다. 곧 그 안을 채운 가지와 콜리플라워가 인사를 건넨다. 적당히 구워 아삭함이 살아 있다. 이어 악수를 청하는 건 고소한 팔라펠과 부드러운 후무스. 병아리콩으로 만든 두 재료 덕분에 모든 맛이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여기에 상큼한 윙크를 날리는 석류 소스는 화룡점정이다. 약간의 산도가 침샘을 자극해 목넘김을 한층 부드럽게 만든다.


아, 정말 기가 막힌 맛이다.



눈을 반쯤 뜬 채 세 입까지 천천히 음미했다. 모든 감각이 깨어난다. 한데 모여 춤까지 춘다. 몸은 어느새 이 완벽한 순간의 일부가 되고, 세상에는 샌드위치와 나만 남는다. 이제 속도를 늦추는 건 불가능하다. 나는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이거지, 이거.



급한 허기가 가시고 나니 피가 도는 느낌이다. 저작운동에만 몰두하던 감각이 서서히 턱에서 풀려났다. 그제야 시선이 창문 밖 풍경으로 향했다.




오늘 헤이그 날씨는 흐림. 다행히 비는 오지 않는다. 행운이다.


이곳의 3, 4월 날씨는 거의 호러다. 유학 시절을 돌이켜 보면 정말 그랬다.


아침 8시, 나의 정신은 수면에서 각성 상태로 전환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눈은 떠지지 않는다. 눈꺼풀이 전자레인지에 돌린 찹쌀떡처럼 축 늘어져 있다.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지대가 낮아서 그런 건가. 누가 그런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다.
— 하여간 아침부터 저기압이다.

오른편 창문으로는 둥근 해 대신 구름 낀 뿌연 하늘이 스멀스멀 기어 들어온다. 그 음산한 기운은 축축한 손을 뻗어 베개를 적시고 내 뺨까지 더듬어 온다. 빨리 일어나 학교에 가라는 것인지, 아니면 계속 누워 학비나 축내라는 것인지, 그 의중을 알 수가 없다.
— 정말 모르겠다.

아니, 내가 지금 이 나라에 얼마를 쏟아붓고 있는데. 학교는 가야 한다. 대충 씻고 현관문을 나섰다.

학교는 자취방에서 자전거로 10분 거리다. 스포크에 걸린 자물쇠 쪽으로 몸을 굽혔다. 그 순간 툭. 툭툭. 정수리 위로 빗방울이 떨어진다. 왓 더.
— 또 오는 거냐.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빗방울은 곧 빗물로 변한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 시야 확보를 위해 눈가를 몇 번 훔쳤다. 도착해 보니 소매가 누렇다. 오랜만에 찍어 바른 화장이 녹아내린 것이었다. 아, 이거 어제 빤 옷인데.
— 기가 막힌다.



이런 날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반복되었다.




고국이었다면 등심가스와 쫄면 세트, 달달한 크림 라떼로 울적함을 달랬을 것이다. 그러나 네덜란드에서는 꿈도 못 꿀 일이었다. 맥도날드 블랙커피 한 잔 값도 7,000원에 육박한다. 미친 물가다.


소소한 맛집 투어가 경제 활동의 동력이자 유일한 낙이었던 내게는 너무 가혹한 환경이었다. 나는 대부분의 끼니를 흰 빵과 땅콩버터, 삶은 달걀로 때웠다.



빈곤한 식생활은 두 번째 학기, 어린이집 점심시간 보조 교사 일을 시작하면서 조금씩 나아졌다.



멘탈의 안녕과 우울감 타파를 위해,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외식을 하기로 결심했다. 빠듯한 생활비를 고려하여 몇 가지 규칙도 정했다.


음료와 팁을 포함한 총 식사 비용이 12유로를 넘기지 않을 것

외식 횟수는 일주일에 한 번으로 엄격하게 제한할 것

예기치 않게 두 번 이상 외식할 경우, 그 횟수만큼 다음 주 외식을 금할 것



관건은 메뉴 선택이었다. 매장 내 식사 시 음료를 필히 주문해야 하는 레스토랑은 목록에서 가장 먼저 탈락했다. 카페 역시 자연스레 순위에서 밀려났다. 케이크가 아무리 먹고 싶어도 커피 없이는 무리였다.


그러다 눈을 뜬 곳이 샌드위치 가게다.


생각해 보면 샌드위치보다 유럽스러운 음식도 없다.


독일의 빵집에는 아침마다 다양한 곡물 빵에 햄과 치즈, 오이, 토마토를 끼운 샌드위치들이 가득하다.


레시피대로 정직하게 만들어진 샌드위치 행렬과 주문에 맞춰 민첩하게 빵을 꺼내는 아주머니의 손놀림은 매우 ‘독일스러운’ 풍경 중 하나다.



프랑스의 샌드위치는 바게트를 중심으로 다양한 재료의 변주가 돋보인다.


버터와 뒷다리햄만을 넣은 ‘잠봉 뵈르’, 염소 치즈 위에 꿀을 뿌린 ‘셰브르 미엘’, 사과와 호두를 곁들인 ‘브리 바게트’ 등 — 골라 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샌드위치는 잠봉, 말린 토마토, 루꼴라를 넣은 ‘메디테라네’다. 새콤짭조름한 말린 토마토와 향긋한 루꼴라의 조합은 긴 기차 여행의 지루함을 덜어주는 별미다.



이에 반해 네덜란드의 샌드위치는 미안하지만 뭐랄까, 근본 없이 중구난방이다.



허옇고 말랑한 빵에 생선 튀김을 얹은 ‘키블링 브로트헤’. 식초에 절인 청어와 오이, 양파를 끼워 먹는 ‘하링 브로트헤’. 아, 정체불명의 소시지를 끼운 요상한 샌드위치도 기억난다. 솔직히 모두 돈 주고 사 먹기 민망한 맛이었다.



안 되겠다 싶어 시야를 넓히기로 했다.


제일 먼저 간 곳은 헤이그 차이나타운의 중식당. 하얀 빵에 고기와 채소를 채운 ‘바오 번’은 한국인에게 꽤 익숙한 맛이었다.



다음 깃발은 수리남 식당에 꽂았다.


수리남. 남미 북부에 위치한, 아직은 낯선 나라다. 네덜란드와는 식민지 역사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음식 역시 여러 나라의 영향을 받아 복합적이다. 아프리카와 남미의 토착 문화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인도, 인도네시아, 중국의 맛이 뒤섞여 있다.


대표 메뉴는 ‘킵 케리 브로트헤’. 삼발 소스를 바른 말랑한 빵 위에 커리로 졸인 닭고기를 올리고 오이 슬라이스로 마무리한 샌드위치다. 투박하지만 묘하게 어울리는 맛의 조합은 그들의 굴곡진 식민지와 이민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정신없이 먹다 보니 샌드위치를 든 오른손이 너무 가볍다.


어느새 알리스 레바니즈 인크레더블 샌드위치는 마지막 한 입만 남겨 두고 있다. 아니, 벌써 다 먹었다니. 맛있는 음식이 주는 쾌락은 강력하지만 지나치게 짧다.



마지막 조각을 입에 털어 넣었다. 아쉬운 마음에 부스러기만 남은 접시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이 아름다운 음식을 전해 준 나라는 레바논이다. 지금 레바논은 중동에서 벌어진 전쟁의 긴장 속에 있다.


건물 위로 떨어지던 드론과 미사일, 일상이 파괴된 사람들의 눈물, 각국 지도자들의 날 선 발언을 담은 뉴스 영상들이 뒤엉켜 접시 위로 떠올랐다.


문득 이 가게를 소개해 준 배신자 전 남자친구의 얼굴도 스친다. 네덜란드인인 그는 현재 두바이에 살고 있다.




트레이를 정리하고 가게 밖으로 나왔다. 배부르다. 소화도 시킬 겸 바닷가에나 가볼까. 익숙한 길이니 페달을 부지런히 밟으면 15분 정도 걸릴 것이다.


날은 여전히 흐리다. 그래도 비는 아직이다.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난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다.




Ali's Lebanese Incredible Sandwiches

Regentesseplein 228, 2562 EZ Den Haag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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