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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ernoh Jun 20. 2023

십원 3

소녀시절

 정애였던 것 같다. 그 아이. 교정에 대한 기억 속 한 순간의 주인공.

하이네라는 이름의 소설 주인공 이야기를 그렇게 맛깔나게 설명해 주던 그 애. 자연 스러운 검은 곱슬머리의 컬이 마치 2차 대전 중 일기를 남긴 독일에 살던 유대인 소녀를 떠오르게 했던 아이. 잠자코 있는 려원 자신의 바운더리 영역을 벗어나게 했던 그 소녀들의 음성과 스며드는 이야기의 상상화가 본의 아니게 침묵의 려원을 끌어들였다. 소녀들의 뒤 쪽에서 교정 화단의 잡초를 맨손으로 제거하던 잡초부대원 려원은 조용한 청소시간 중에 휴식을 취하던 다른 아이들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소임을 수행하고 있었다.


 학기 초 청소 구역을 정하던 담임 선생님은

 “그리고... 운동장 주변 석가산 및 화단의 잡초를 뽑을 사람이 필요하다. 우리 반에서 맡게 됐는데...”

 아무도 손들지 않던 그때 려원이 손을 들었다. 그리고 뒤이어 두 아이가 손을 들어 세 사람의 잡초부대가 탄생했다. 킥킥거리던 다른 여고생들은 도시에서는 한 번도 해보지 않았을 일에 대해 두려움 없이 손드는 세 아이에게 장난스러운 야유를 보냈다.




 그날도 점심시간 이후 자유로운 교정에 려원은 혼자 화단의 잡초를 뽑고 있었다. 처음에는 같은 반 아이 둘이 경계석에 앉아 쉬는 것을 목도했지만 그리 아는 척하고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기에 침묵의 거리를 유지한다.

 “하이네가 하명을 바라 본 거야.”

 고개드니 떨리는 음성의 정애가 시야에 들어온다.

 아마도 하이네는 어떤 소년을 사랑하게 된 것 같고 그 소년과 만나기 위해 몰래 집을 나왔다는 추측이 성립될 지점에서 정애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왜? 그래서, 뭐? 그다음이야기가 필요했다. 본의 아니게 자신의 바운더리 안에서 이야기를 듣게 된 려원은 스토리의 무리 안에서 함께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 하이네가 어떻게 집을 나왔니?”

 하고 부지불식간에 쑥 밀고 들어갔다. 저도 모르게 민망함을 제쳐두고 어여쁜 정애의 스토리에 빨려 들어가 심장이 안달이었던 것이다.

 대뜸 뒤쪽 화단 안에서 려원이 묻자 정애는 당황스러워 말을 잇지 못했다. 이야기꾼 정애는 수줍게 미소 지으며 자신의 발화를 감싸매기만 했다. 누군가 제 3자의 경청이 몹시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화단 경계석에 엉덩이를 나란히 하고 앉아 오순도순 저들만의 이야기를 하고 있던 두 아이는 의아하게 려원을 바라다본다. 려원의 눈에 그 아이들 사이에 하이네가 함께 앉아 있었다. 결국 그렇게 갑작스러운 출현을 견디지 못한 정애는 수줍어만 하면서 자신도 아직 뒷이야기를 읽지 못했다며 더 이상 풀어주지 않았다. 다 쏟아내주지 않은 같은 반 아이에 대한 서운함도 느낄 새가 없이 뒤늦게 부끄러움에 압도되어 점심 이후의 화단 청소를 하던 려원은 두더지처럼 화단의 구멍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두 아이의 손잡고 가는 뒷모습에서 쓸쓸한 외로움을 만났다. 손바닥에 묻은 검은흙을 털어내어 보았지만 손톱 끝에 끼어버린 시커먼 배엽토의 잔재는 그렇게 쉽게 빠지지 않았다. 려원의 갈급한 외로움처럼 그저 검게 남아있었다.


 려원은 모나지도 이기적이지도 않은 너무 조용한 학생이었다. 그러나 무리에 끼이지도 않고 혼자 지내는 남다름은 오히려 주변의 아이들을 압도했다. 어느 별에서 왔을까. 려원의 창백할 정도로 하얀 얼굴은 모순적이게도 어쩌다 던지는 말끝에서 묻어 나오는 날카로운 정렬로 가까이 오지 말라는 메시지를 품고 있었다. 그 누구도 려원의 그런 의미를 알려고도 하지 않았기에 려원은 그저 자기 세상 속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때 남모르게 다가온 미풍이 려원의 곁을 돌고 있었지만 려원은 인식하지 못했다. 미풍은 려원의 뺨에 활기를 주고 나 좀 보라는 듯 가지 않고 있었다. 그땐 하이네와 정애처럼 어여쁜 소녀들의 일상탈출에만 몰두했고 그 옆에 또 다른 애청자로서 존재했던 려명에 대해서는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잠시 후 미풍은 정애의 발걸음과 함께 손잡고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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