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뉴질랜드에서 아프면 생기는 일 1

17 AUG 2025

by 게으른 곰

둘째는 말썽꾸러기였다. 팔에도, 다리에도 깁스를 했었다. 팔다리가 성 할 날이 없었지만 대체적으로 건강한 아이였다. 음식 알레르기도 없고 주기적으로 복용해야 하는 약도 없었다. 다만 눈썹이 눈 안쪽으로 자라 위치를 교정해 주는 수술을 했고 심장 부정맥 때문에 처방된 철분제를 복용했었다. 그래도 크면서 이런 것들은 점점 괜찮아졌고, 운동을 좋아하는 건강한 아이로 자랐다.


이제 고등학생이 된 둘째는 6월 말쯤 갑자기 얼굴에 울긋불긋한 발진이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엔 여드름인가 싶었다. 일주일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한참 사춘기를 보내는 중이라 여드름이 오래가나 하고 생각했다. 색도 그리 진하지 않았고 범위도 넓지 않았다. 곧 남편이 뉴질랜드에 올 예정이라 약국에서 피부 연고를 사달라고 부탁했다. 남편은 12일 동안 우리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돌아갔고, 남편이 사 온 연고는 효과가 없었다. 문득 GP(General Practitioner, 가정의. 1차 진료를 담당하는 의사. 뉴질랜드는 각자의 GP를 정한 뒤 건강에 문제가 있을 땐 예약 후 방문해야 한다.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2-3주까지 기다려야 할 때도 있다. 그래서 감기로는 병원에 가지 않는다.)에게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2주가 넘게 얼굴 발진이 있었던 적은 없었다. 게다가 여드름이라고 하기엔 그동안 봐왔던 모양과 조금 달랐다. 피부가 붉게 변해있었는데 여드름 발진과 모양이 달랐다. 예약을 위해 병원에 전화를 했는데 둘째의 GP가 휴가 중이라 2-3주 뒤에나 가능하다고 했다. 아프거나 급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병원을 가기로 마음먹었으니 빨리 가고 싶었다. 다른 의사 선생님이 일주일 뒤 예약이 가능하다고 해 그분으로 예약을 했다.


0817.jpg 얼굴 홍반이 심해져 요즘은 마스크를 끼고 다닌다. 다행히 체력은 여전히 좋다.

GP를 만나러 갔을 때도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잡곡밥 때문에 발진이 생겼나 하는 생각을 막연하게 하고 있었다. 둘째가 어렸을 때 현미밥을 먹고 피부 발진이 있었던 게 기억났다. 그땐 알레르기 약을 먹고 금방 좋아졌다. 처음 만나는 젊은 의사 선생님은 우리에게 여드름 연고와 약한 스테로이드 연고, 그리고 피부가 가려울 때 먹는 알약을 처방해 줬다. 음식 알레르기는 아닌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둘째 얼굴을 사진 찍어 시니어 의사에게 보여주고 의견을 물을 예정이라고 했다. 그때도 나는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다. 스테로이드 연고를 바르면 금방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2일 뒤, GP에게 전화가 왔다.


‘둘째 사진을 본 시니어 의사가 루푸스 증상이 보인다고 피검사 의뢰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피검사를 전문의(Specialist)에게 보내 응급 진료를 요청했습니다. 가까운 Lab에 가셔서 피검사를 진행하세요.’


루푸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단어다. 루푸스를 검색했다. 자가면역질환이라고 한다. 전신홍반 루푸스, 자기 몸의 세포와 조직까지 공격하면서 염증을 일으키는 병이다. 그중 대표적인 증상이 얼굴에 나비 모양 홍반, 햇빛에 민감해지는 발진과 관절통이다. 그 외에 빈혈, 신장염, 흉막염, 피고 발열, 탈모 등의 증상들이 있다고 한다. 둘째는 얼굴에 나비 모양으로 홍반이 있다.

이럴 수가. 나도, 남편도 이 나이가 되도록 별 탈 없이 살았는데 갑자기 웬 루프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의사가 의뢰한 피검사와 소변검사를 하기 위해 집 근처 Lab에 방문했다. 뉴질랜드는 GP가 혈액 채취를 하지 않고 따로 정해져 있는 곳에 다시 방문해야 한다. 다행히 집 근처 작은 상가가 모여있는 곳에 Lab이 있었다. 11가지 피검사를 하는데 든 비용은 NZ$478이었다. 우리는 외국인이기 때문에 의료 혜택을 못 받는다. 그래서 GP를 만나러 갈 때도 NZ$155를 낸다. 영주권자나 시민권을 소지하고 있는 사람은 NZ$20 정도라고 한다. 소변 검사는 NZ$73을 냈다. 루푸스인지 아닌지를 밝혀내는데 NZ$706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돈이 문제가 아니다. 루푸스라는 말을 전해 들은 남편은 그날부터 심각한 얼굴로 수시로 전화를 걸어왔다. 둘째는 얼굴 홍반 외에 다른 증상은 없다. 잘 먹고, 잘 뛰어놀고, 잘 잔다. 그래서인지 나는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왠지 루푸스가 아닐 것 같았다. 그럴 리가 없다.


며칠이 지난 뒤 Public Hospital(공공병원, 3차 진료를 하는 곳, 우리나라의 대학병원과 같은 개념)에서 이메일이 왔다. 피검사 결과 응급 진료가 불필요하다고 판단되어 진료 의뢰가 취소됐다는 내용이다. 역시, 루푸스가 아닌가 보다.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GP에게 전화가 왔다. 다시 스페셜리스트에게 응급 진료를 의뢰했고, 추가 피검사와 소변 검사를 다시 해야 한다고 한다.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루푸스가 맞는 걸까? GP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 번의 피검사와 두 번의 소변검사를 더 진행했다. 진행될수록 검사 항목은 늘어났다. 두 번의 피검사와 세 번의 소변검사에 NZ$1000이 들었다.


검사 후 GP도, 공공병원에서도, 감감무소식이다. 검사를 진행할수록 여러 가지 이유로 한국이 그리웠다. 언어도, 처리 속도도,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그동안 병원에 지불했던 병원비도, 모든 게 아쉬웠다. 일주일이 지났다. 여전히 소식이 없다. 도저히 기다릴 수 없어 GP가 있는 병원에 전화를 했다. 전화를 받은 분에게 GP와 진행 사항에 대한 통화를 할 수 있냐고 물으니 그것도 진료의 일부분이라 같은 비용이 들고 예약도 다 차 있어 일주일 뒤에나 가능하다고 했다. 답답하다. 진행 절차를 전혀 모르는 나는 그럼 그냥 마냥 기다리고만 있어야 하냐고 물었다. 그분은 다시 연락을 주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뉴질랜드 의료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기 때문에 질문이 많았다. 내가 물어볼 수 있는 곳이 이곳밖에 없었다. 잠시 후 전화가 울렸다. GP가 3주 정도 후에 공공병원에서 연락이 올 거 같다고 했다고 한다.


‘3주요? 3주 후에 스페셜리스트를 만날 수 있는 건가요?’라고 다시 물으니 그건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했다. 더 짧을 수도, 더 길 수도 있다는 말과 함께 통화가 끝났다.


통화를 마친 뒤, 여전히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기다림의 시간이 시작됐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뉴질랜드에서 만난 친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