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AUG 2025
해가 뜬 뉴질랜드와 해가 없는 뉴질랜드는 상상 이상으로 다른 모습이다. 해가 쨍하게 뜬 뉴질랜드의 하루는 어딜 가도 천국이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셔도, 바다를 걸어도, 운전을 해도, 모든 것이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는 만족을 느끼게 한다. 반면 흐리거나 비가 오는, 햇빛 한 줄기도 구름을 뚫지 못하는 날은 완벽한 우울을 느낄 수 있다. 우중충한 하늘, 잿빛 세상, 습기, 거기에 추위는 덤이다. 비 오는 날엔 되도록 외출을 하지 않는다. 옷이나 신발이 비에 젖어 축축해지는 그 느낌이 싫다. 하지만 실내에 있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창밖에 오는 비를 건물 안에서 바라보는, 그 매력 넘치는 특별한 분위기가 좋다. 멜랑꼴랑하면서 차분하고 편안함이 만족스러운 분위기 말이다. 물론 비 오는 날과 해 뜨는 날을 선택하라면 고민도 없이 후자가 좋겠지만 비가 오는 날에 실내에서 비를 감상하는 날도 그리 싫지는 않았다. 제일 피해야 할 일은 비 오는 날 외출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약속이나 수업, 혹은 피할 수 없는 볼일이 있다면 어쩔 수 없는 외출을 해야겠지만, 그날의 행복은 외출하고 집에 돌아온 순간부터 시작된다.
뉴질랜드는, 비가 오는 날에 함께 따라오는 것이 추위다. 추위. 추움. 한국처럼 영하의 매서운 추위는 없지만 나를 둘러싸고 있는 묵직하고 축축하고 무겁게 압박하는 추위가 있다. 뼈가 시리다는 표현을 이곳에 사는 한국 사람들은 자주 사용한다. 겨울엔 많은 시간을 침대 위에서 보낸다. 집에서 유일하게 온기가 있는 장소다. 한국에서의 겨울은 밖은 추워도 집은 따뜻한 온기를 느낄 수 있는데 이곳은 오직 침대 안에서만 따뜻함을 느낄 수 있다. 히트펌프라는 집 전체를 데우는 온풍기가 있지만 내가 말하는 따뜻함과는 거리가 있다. 그것의 역할은 오직 찬 공기를 없애주는 것에서 끝난다. 바닥 난방을 하는 한국의 집에서 느낄 수 있는, 발바닥이 바닥에 닿았을 때 온몸으로 퍼지는 따뜻한 느낌과는 전혀 다르다. 그래서 침대 안에서 시간을 많이 보낼 수밖에 없다. 유일하게 한국에서 느꼈던 따뜻함과 포근함이 비슷하게나마 존재하는 장소다. 두 겹으로 겹쳐쌓은 이불을 들어 차가워진 발을 넣는 순간, 도파민이 온몸에 퍼지기 시작한다. 턱밑까지 이불을 잡아당기고 차가운 발은 자리를 이곳저곳으로 옮겨 따뜻함을 찾는다. 발이 온기를 거의 모두 되찾았을 때, 눈꺼풀은 점점 아래로 내려온다.
이때가 고비다. 하루를 이렇게 마감할 것이 아니라면 무거운 눈꺼풀을 어떻게 서라도 다시 끌어올려야 한다. 하지만 90%의 확률로 그렇게 하루가 마감된다. 겨울엔 어쩔 수가 없다. 겨울에 특히 게을러지는데 이유가 있다. 나는 겨울 내내 내가 게으를 수밖에 없는 이유로 나를 달랜다. 내가 게으른 건 어쩔 수 없는 이유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주기적으로 되뇐다.
발끝에서부터 올라온 온기가 눈꺼풀에 닿는 순간, 아주 깊은 잠에 빠져든다. 그때의 잠은 어느 때보다 깊고 고요하고 묵직하다. ‘아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있는데’라는 생각이 잠깐 들지만 한번 감긴 눈꺼풀의 무게는 내 의지로 도저히 올릴 수 없다. 자리가 불편해도 몸을 움직일 수 없고 방에 불이 켜져 있어도 불을 끌 수 없다. 가끔씩 정신이 들어 ‘불 꺼야 되는데’라던가 ‘베개가 너무 높은데’라는 찰나의 생각들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그렇게 점점.. 점점.. 깊고 깊은 잠에 잠식된다. 그리고 그렇게 하루가 끝나버린다. 겨울엔 거의 이렇게 하루가 마감된다.
글도 써야 되고 그림도 그려야 되는데.
2달, 이렇게 잠이 든 날이 많다. 뉴질랜드의 겨울은 최저 기온 6도지만 춥다. 우리나라의 온돌은 세계적으로 유일하다. 이는 고구려 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추정되는데 겨울이 긴 한반도의 기후에 맞게 발달했다. 하지만 한국보다 춥거나 한국만큼 추운 나라는 많다. 그들은 벽난로나 실내의 일부를 따뜻하게 데우는 난방을 사용했다. 우리나라 선조들의 지혜는 이렇게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특히 한국의 문화가 세계로 퍼져나가는 요즘, 외국에 사는 나는 큰 자부심을 느낀다. 한국에서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의 소중함이나 대단함을 해외에 살면서 알게 된 경우가 많다. 온돌은 대표적인 그 사례 중 한 가지다. 그 외 병원 시스템이나 배달 문화, 안전한 거리, 품질 좋고 저렴한 가격 등 여러 가지가 해당된다. 그동안 온돌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내가 뉴질랜드에 살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의미로 내게 재정립됐다. 나처럼 추위에 약한 어떤 외국 사람의 평생을 상상해 봤다.
아, 한국인이라서, 다행이다.
올해로 3년 차 뉴질랜드 삶이 진행 중이라 이곳에 많이 적응했다.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불편한 건 추위다. 온기를 품은 집에서 살고 싶다. 요즘은 해외에서 집을 지을 때 한국의 온돌 시스템을 도입하는 사례도 있다고 한다. 만약 내가 외국에 집을 지을 일이 있다면 (가능성은 없지만) 무조건 온돌을 설치할 것이다.
오늘도 차가워진 발을 데우러 침대에 들어갔다가 2시간 동안 빠져나오지 못했다. 깊은 잠에 빠지려는 그때, 둘째가 깨워 겨우 거실로 나왔다. 두꺼운 후디를 뒤집어쓰고. 이제 8월도 거의 다 갔으니 봄이 올 차례다. 아직 봄기운은 느껴지지 않지만 작년 8월 말 일기엔 봄바람이 느껴진다고 쓰여있다. 봄이 얼른 오길. 그리고 여름도 얼른 오길.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계절인 여름엔 나는 다시 한국의 겨울로 가야 하지만, 그곳엔 온돌이 있으니 큰 걱정은 없다. 겨울에도 한국엔 온기가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