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하루를 순식간에 삭제시켜 버리는 방법

28 AUG 2025

by 게으른 곰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나는 오전 일정이 있다. 그래서 평일 중 유일하게 쉬는 월요일엔 괜히 더 게으름을 피우게 된다. 이미 토요일과 일요일을 게으르게 보냈지만, 화요일부터 시작되는 바쁜 일정을 생각하면 마지막 휴가일 같은 느낌이 든다. 하필 한 주가 시작되는, 그래서 활기차야만 할 것 같은 월요일을 나는 제일 게으르게 보내고 있다.


아침 7시, 침대에서 겨우 주방으로 나온다. 잠은 벌써 깼지만 아직 쌀쌀한 공기에 이불을 박차고 나올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제 봄이 올 때도 됐는데 새벽 공기는 여전히 차다. 잠깐 주방에 멍하니 서서 오늘 도시락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다. 김밥을 싸거나 샌드위치를 싸거나 아니면 간식 같은 도시락을 싼다.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요리할지는 여전히 나에게 제일 어려운 과제다. 아이들은 샌드위치 도시락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아마 내 샌드위치가 맛이 없는 것 같다. 샌드위치는 소스가 생명인데, 분명히 레시피대로 했는데 별 맛이 안 나는 걸 보면 빵이나 소스 둘 중 한 가지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나의 요리에 대한 열정은 딱 여기까지만 닿아서 원인 분석은 영원히 미지의 영역으로 남는다. 내가 샌드위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유도 한몫한다. 김밥을 싸는 날은 내 점심까지 넉넉하게 만들지만 샌드위치를 싸는 날엔 아이들것만 만든다. 나는 한식이 여전히 좋다.


요즘 즐겨 듣는 팟캐스트 Behind in English를 들으며 뚱땅 뚱땅 요리를 한다. 달걀 4개를 삶고, 부리또를 고구마와 함께 에어 프라이어에 돌린다. 사과를 반으로 쪼개 씨를 제거하고 바나나를 랩으로 싸 차곡차곡 도시락 통에 넣는다. 삶은 달걀 2개와 부리또, 구운 고구마, 오트밀 바, 사과와 바나나가 오늘 점심이다. 이렇게 도시락을 싸는 건 전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간식 같은 여러 가지가 식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뉴질랜드에서 배웠다. 이렇게 도시락을 싸는 날 아침은 한가하다. 휴대폰에서 흘러나오는 매력적인 로드리고의 영어를 들으며 요즘 영어 공부에 소홀한 자신을 반성하면서 어제저녁에 잔뜩 만들어놓은 카레를 데운다. 어제저녁으로 먹은 카레는 또, 오늘 아침이 된다. 카레는 맛있다. 게다가 돼지고기 대신 소고기로 만들었더니 풍미가 진하다. 아침을 먹으며 커피를 한 잔 내리면서 아이들과 오늘 학교 일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딱히 특별한 일은 없지만 둘째의 시험이 있는 날이다. 뉴질랜드는 하반기에 중요한 일정이 모여있다. 학년 말 시험을 앞두고 연습 시험도 2주 동안이나 진행된다. 9월 둘째 주부터 시작이라 요즘 우리 가족의 주요 대화 내용은 공부다. 항상 그렇듯, 엄마가 생각하는 공부와 아이들이 생각하는 공부엔 차이가 있다. 공부는 내가 하는 게 아니니 결정은 아이들이 해야 한다. 엄마와 아이들 기준 사이의 공간은 영원히 좁혀지지 않을 테지만 어쩌겠는가. 엄마의 마음을 헤아려주길 바라며 맛있는 도시락이라도 싸줘야지. 갑자기 오늘 도시락이 미안해진다. 일상적인 대화가 끝나면 아이들은 허둥지둥 학교에 간다. 집을 나서기 전 1분은 왜 이렇게 정신이 없는지, 나까지 혼이 빠져나가는 느낌이다.

아이들이 모두 등교하고 나면, 집은 참 조용하다. 나는 이 고요가 좋다. 저 멀리 차가 다니는 소리가 들린다. 바람이 나뭇잎을 건드는 소리도 들린다. 작은 소리들이 가끔 나에게 다가올 뿐, 나는 오롯이 혼자다.


아침 식사 후 마시던 커피를 마저 마시고 설거지까지 끝나면 이제 내 자유 시간이 시작된다. 어제는 분명히 책도 읽을 것이고, 밀린 창틀 청소도 할 것이고, 빨래도, 그림도 그릴 것이라고 다짐했다. 나는 도저히 이유를 모르겠는데 계획한 것들 중 한 가지도 하지 못한 채 오전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이번 주엔 갑자기 앞집 이웃이 물어볼 게 있다며 잠깐 들러도 되겠냐는 연락이 왔다. 그렇게 1시간 30분이 사라졌다. 이웃이 돌아간 후 집은 다시 고요해졌다. 노트북을 여니 어제 보다 만 영화 화면이 보였다. 할 수 없이 보다 만 영화를 다 보니 허기가 느껴졌다. 점심때가 됐다.


혼자 먹는 점심은 또 카레다. 다행인 건 카레는 맛있다는 점이다. 새로 산 닌자 믹서기 다지기 기능으로 당근과 감자를 썰었는데, 모양도 제각각인 데다가 크기도 작게 썰려서 실망했는데 오히려 더 맛있는 느낌이다. 카레 향이 재료 속까지 스며든 느낌이랄까. 카레는 몇 번을 먹어도 질리지 않는 음식 같다.

혼자 밥을 먹을 때 제일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유튜브 보기다. 그런데 유튜브를 보면서 밥을 먹었다. 그동안 내가 클릭한 동영상들과 비슷한 내용을 추천해 준다. 여기 기웃, 저기 기웃하다가 쇼츠를 눌러버렸다. 쇼츠는 동영상보다 더 나쁘다. 어쩜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가는지, 1시간이 후딱 지나가 있었다. 오후 1시가 넘어 2시가 다 돼 가니 마음이 바빠진다. 학교는 3시에 끝나지만 아이들은 4시 이후에 집에 온다. 친구와 노는 게 행복한 나이다. 유튜브에서 드디어 빠져나왔는데, 카카오톡이 울린다. 친구들이 모여있는 방이다. 다른 방 카카오톡 알림이 또 울린다. 다이어트에 대한 대화, 자식 공부, 식단, 운동 등이 주된 대화 주제다. 항상 비슷한 대화를 나누지만 영원히 질리지 않을 것 같은 카테고리다. 친구 중 한 명은 근래에 식단 조절과 운동으로 체중 감량에 성공했다. 체지방이 25%로 줄었다며 여러 가지 마법 같은 비법(?)을 전수해주고 있다. 체중 감량을 해야 하는 건 사실 난데. 뉴질랜드 3년 차, 불어난 7KG을 되돌려야 하는 시기는 자꾸 미뤄지고 있다. 마음속 일정은 2년 6개월 후쯤인데, 그전에 먼저 시작되면 좋겠다. 일단 친구가 추천해 준 Bragg Apple Cider Vinegar를 사봐야겠다. 대화 몇 마디 나누다 보면 금세 3시가 된다. 부랴 부랴 글을 쓰려고 타자를 치고 있으면 아이들이 집에 온다. 아이들이 집에 오면 조용하고 평화로운 시간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정신없이 저녁을 먹고 오전에 하려고 계획했던 일들 중 한 두 가지를 겨우 한 뒤 화요일 아침이 되도록 늦게 오길 바라며 잠자리에 든다.


이렇게 하루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시간이 왜 이렇게 빨리 가는지 모르겠다. 하루를 이렇게 보내고 나면, 그 자리에 남는 건 작은 후회와 자신에 대한 실망감, 내일은 알차게 보내겠다는 다짐, 그리고 침대의 따뜻함과 포근함이 주는 행복이다. 작은 행복이 함께라 다행이다. 화요일은 크리스와 치치를 만나는 날이다. 그들을 만나 나의 게으름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겠다. 그리고 명상 시간에 디니의 속삭임을 집중해서 들어야지, 가끔 영어가 이해가 안 되는 순간, 나의 의식이 저 멀리 우주 어딘가로 빠져나가는 느낌일 때가 있다. 내일은 꼭, 디니의 목소리를 따라가보리라. 아참, 그리고 커피는 트림 플랫 화이트를 마셔야지.


그리고 내일은 꼭! 모임 후 집에 돌아와 영어 공부와 그림 그리기를 해야지. 꼭! 꼭! 꼭!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뉴질랜드에서 아프면 생기는 일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