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어김없이 뜻대로 되지 않고, 별수없이 되뇌이는 그 때 그랬더라면.
활력이 쨍하게 드리워있는 대학시절을 가까이 함께보냈던 후배를 2년만에 만나 밥을 먹었다. 이젠 나와 그 애 모두 각자 다른 방식으로 그 시절로부터 먼 발치 떨어져 있었다. 그 애도 나와 같다면 찾아오리라곤 당연히 몰랐던 직시와 타협, 수용 같은 정신없는 일들을 어찌 버둥버둥 공글리고는, 말로 낼만한 요즘 어찌 사는가를 만들어 내어 왔을테다.
그렇게 교대역 근처 밥상에 마주앉아 예전 시절에 물수제비를 하며 잔물결을 내었다.
많이 웃고 자리에 끼고 누구든 만나서 나를 떵떵대던 나날들의 파편을 둘셋씩 찬찬히 꿰어나갔다. 우리가 시간을 떠나보내고서 하는 일이란 필경 그렇다. 기억의 일치를 서로 확인하며 끄덕이고 관조하는 일말고는 별일이 없는 것이다. 늘 지금의 나는 과거에 나에게 차갑게 군다. 내 앞에서 연신 젓가락질을 하던 후배도 그러더라. 지금 이 머리로 그 때로 다시 가고 싶다. 뭐든 좀 더 잘했을텐데.
적어도 그 밥상에서는, 그렇게 그 때 그랬더라면 하는 일이 아무 의미 없는 그저 넋두리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피차 잘해보려 했던 것, 그러나 원하는 걸 꽉 쥘수록 손틈 사이로 허망히 빠져나가는, 사건의 일어나려는 줄기찬 힘에 어찌 맞서는지 무지했던 것, 시시각각 끓는 의문과 울분이 그 힘을 막을수는 없었던 것이라고 적힌 진단서 그 뿐인것이다.
삶에는 겪기도 전에 번쩍 깨우쳐지는 것이 있는가 하면, 무딘 칼로 단단한 재료를 썰듯 겪어도 겪어도 달리 깨우쳐지지 않는게 있다.
밥상에서 일어나 돌아오는 길에는 내가 무섭게 흘겨보자 제거되었던 사람과 사랑을 톺아보았다. 배신감에 가득차있을 때의 나는 갈등과 암투만 먹고 사는 인간처럼 생겨먹었다. 사람한테든 사랑한테든 매서운 말들을 휙휙 꽂고는 도망치는 그 일을 반복하고 있으니, 어쩐지 상실이 내게 무딘칼같이 느껴진다.
물론 사랑하는 것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내 곁에서 사라지게 되어 있다. 상실의 일어나는 힘을 최대한 오래 억제하는 방법은 나와 사랑하는 것 그 사이에 존재하는 관성을 잘 다뤄내는 것이다. 서로 아낌없이 주다가도 언젠가 어떤 연유로든 상대가 미울 수 있다. 문제는 그게 마치 주는것 없이 미운 것처럼 보일때다. 그럴 때 내가 배신감에 누르는 것은 멈춤 버튼이다. 있는 땔감 없는 땔감 다 모아넣어 감정에 불을 질러 활활 태우고는 도망친다. 그러나 그 때 내가 눌러야 했을 것은 일시정지 버튼. 잠깐 미울 수 있는 이 사랑이 내게 원래 주는 것들을 살펴야 했다.
겪어온 상실들을 등에 업고 지옥문의 오르페우스처럼 이제서야 쓸 수 있는 나의 상실에 대한 회고록이다. 당시나 지금이나 얼굴을 붉히도록 하는 그 붉은 감정들과 뒤따른 상실들은 어쩌면 삶 그 자체다. 삶에는 겪기도 전에 번쩍 깨우쳐지는 것이 있는가 하면, 무딘 칼로 단단한 재료를 썰듯 겪어도 겪어도 달리 깨우쳐지지 않는게 있다. 나도 내 뜻대로 안되고, 너도 내 뜻대로 안된다는 바로 그 사실. 그리하여 인생은 우리 뜻대로 안된다는 바로 그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