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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용 Jul 11. 2020

스토너

타인의 인생


  요즘 끊임없이 자문하는 말이 있다. ‘나는 나를 잘 알고 있을까?’ 사람은 누구나 자아의식을 가지고 있고, 이를 토대로 자신의 존재를 자각한다. 하지만 외부 요인으로 인해 새로운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거나, 타인으로부터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평가를 받게 되면, 회피하고 부정하거나, 이를 받아들이며 혼란에 빠지기도 한다. 나 자신을 생각할수록 무지 상태가 심화될 때, 소설과 글쓰기는 자신을 객관화 시키고, 타인의 평가에 객관적인 잣대를 내밀 수 있는 힘을 주며, 무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소설은 타인의 인생을 간접 경험하고, 이해심을 높이는 데 도움을 주는 훌륭한 매체이다. 소설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유추하며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타인을 이해하는 통찰력을 갖는다. 

  소설 ‘스토너’는 특별할 것 없는 한 사람의 인생을 잔잔하게 우리에게 전달한다. 그의 인생을 특별하다고 말하기 힘들다. 일반 소설의 주인공처럼 굴곡 있는 삶을 산 것도 아니고, 이렇다 할 충격적인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학문에 열정을 갖고 교수가 되었지만, 학생들에게 교육자로서 인정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또한 첫사랑과 결혼에 성공했지만, 한달 후에 그 사랑이 실패했음을 깨닫고, 후에 가르치던 학생과 진실된 사랑에 빠진 사람이기도 하다. 이 책의 옮긴이는 그의 인생을 실패한 인생이라 평했지만, 이 글의 작가는 그의 삶을 성공한 삶이라고 평했다. 이렇듯 그의 인생은 가치판단을 어디에 두는가에 따라 판단의 여지가 많다. 모순적인 그의 인생을 통해, 작가는 그의 인생에 대한 가치판단의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듯하다.


  나는 스토너의 인생을 성공에 가까운 삶이라고 평하고 싶다. 인생은 여러 번의 굴곡점을 갖는다. 고난과 역경이 부재한 삶이 없듯이, 행복이 부재한 삶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두 상황의 뗄 수 없는 관계 탓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를 어떻게 마주하고 극복하는 지가 그 사람의 인생을 판단할 수 있는 잣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소설 속 스토너는 얼핏 보면 실패한 삶을 산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 상황의 내막을 보면 그의 인생을 다르게 볼 시선을 갖게 된다. 

  그는 사랑에 빠졌지만, 곧 이 사랑은 실패했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사랑하는 아내인 이디스의 행동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는 이디스가 만들어낸 세계를 조심스럽고 섬세하게 대하는 법을 터득했다.
  사랑은 종착역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것


  그는 또한 실패한 교육자이지만, 불륜의 대상이었던 학생을 통해 학문적 성취감을 이루기도 하고, (그가 캐서린과 사랑에 빠진 이유에 학문적 성취감도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교수들과 불화를 겪지만, 결국은 그 관계에 있어 우위를 갖게 된다. 


마치 권태와 무관심 덕분에 얻어낸 승리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즉, 그는 자기 삶을 그리고 타인의 삶을 관조적인 자세로 쳐다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와 그의 주변 인물들이 겪는 고난들은 누구나 일상에서 마주할 수 있는 흔한 사건들이다. 그는 이를 당당히 마주하며, 끊임없이 질문하고 해결하려는 자세를 취한다. 소설 속 수많은 등장인물 중 이러한 인물상을 주인공으로 설정한 까닭은 이 사람을 통해 작품 전반에 걸쳐 인생에 대한 포괄적인 메타포를 함축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가 아닌가 싶다. 


  소크라테스의 명언 중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이 있다. 이는 본래 신탁의 경고문이었는데, 소크라테스는 이를 ‘네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음을 인정하라’라고 이해하고, 끊임없이 자신과 사람들에게 ‘네가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을 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이런 결론을 내렸다.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도 않기 때문에, 스스로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보다 내가 현명하다. 즉, 오만함을 버리고 자신의 무지함을 자각하는 것, 그 무지함을 성장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하는 자세를 통해 소크라테스는 이 명언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나는 그리고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타인을 쉽게 판단하고 이해하려는 ‘오만’을 저지른다. 나 자신을 쉽게 알지 못하는 것처럼 타인을 이해한다는 행위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스토너는 죽음을 앞둔 병상에서 끊임없이 되뇐다. ‘너는 무엇을 기대했나?’. 나는 나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원한 것일까. 자아와 타인에 대한 가치판단이 여론에 쉽게 휩쓸리고 단순해지는 사상이 패배한 시대에 사는 지금, 우리가 가져야 할 의문이 아닌가 싶다. 비록, 힘들고 고통스러운 과정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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