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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금 Apr 13. 2021

나의 키스여, 안녕

남편의 구두



- 새 구두인데도 낡아 보이네.

- 누구 거야?

- 아빠 거 ...... 버릴까?

-.....







 해야지, 해야지 하며 미뤄두었던 신발장 정리를 하고 있다. 안 신는 신발들을 끄집어냈다. 온갖 신발들이 뒤엉켜 널브러져 있다. 40대에 신었던 내 구두들이 보인다. 제법 굽이 높다. 어떻게 이런 구두를 신었지? 젊었다는 증거를 굽이 말해준다. 지금은 명품 구두를 거저 준다고 해도 굽이 있으면 그림의 떡이다. 아예 신을 생각 조차 안 한다. 내가 늙었는지 알 수 있는 우스개 테스트가 있는데, 그중에 '낮고 편안한 신발만 찾는다'라는 항목이 있다.  50대 중반이 넘은 중년 여인들은 모두가 공감하며 깔깔깔 웃는다. 

결국 버려지는 신발들은 굽 있는 나의 젊은 구두들이다. 

고맙고 미안하다, 안녕!


 남자 구두 몇 켤레도 있다. 언제나 깔끔했던 내 남자의 신발들이 무심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주인의 발을 잃어버린 구두는 그 주인이 누구였는지 까맣게 잊어버린 모양이다. 더 이상 체취를 간직하고 있지 않다.

짙은 갈색의 새 구두도 보인다. 처제에게 선물 받은 클래식한 구두는 주인이 누구인지 모른 채 10년을 지나왔다. 항암 치료 끝나고 회복되면 두 번째 인생의 길을 저 구두로 시작하리라 하던, 하마터면 큰 의미를 담은

역사적인 구두로 남을 뻔했는데 이제는 유행에 낡아버린, 망부석과도 같은 이 신발과도 이별을 하려고 한다.

이 구두는 내가 사는 날까지 가지고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봤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처음엔 그 남자의 물건들을 버리려고 하니 그 남자까지 버리는 것 같아 버리지 못하고 쌓아 놓았다. 보는 것조차 힘들어하니 동생이 와서 매몰차게 정리해 주었다. 나는 몰래 몇 가지는 빼놓았다. 그것조차 없으면 점점 잊혀질까 두려웠다. 그러나 그건 괜한 불안이고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그 남자는 나 보다 더 젊은 53세의 나이로 내 마음속에 터를 잡아 살고 있다. 가끔씩 꿈에 나타나 평상시처럼 아이들과 손잡고 꽃길을  걸어주기도 하고, 나랑 달리다가 사라지기도 한다. 먹먹한 가슴으로 일어날 때도 있지만 대체로 평안하고 평온할 때가 많다. 이제는 더 이상 그 남자의 물건에 연연해하지 말자. 물건은 물건일 뿐. 나도 내일을 알 수 없는 미지의 시간을 살고 있지 않은가. 살아 있을 때 정리할 수 있는 것들을 하나씩 정리하는 게 노년으로 가는 에티켓일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이 버리는 것보다 내가 버리는 것이 더 낫지. 그 남자의 구두끈으로 내 40대의 예쁜 구두를 리본 해서 묶어 줬다. 


- 나의 키스여, 안녕!


오늘 밤 꿈에는 구두 신은 그 남자와 구두 신은 그 여자가 만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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