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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레야맘 Jun 21. 2023

욕은 한국어로 해도 다 통한다

스페인 소몰이 축제 닭뼈 사건

18년 전인가..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한 대학생 시절 호주 어학연수 때였다. 버스를 타고 가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고개를 숙여 아래를 보니 남자 손 하나가 내 배 앞에 있는 거다. 뒷좌석에서 손을 뻗어 배를 만진 것도 아니고, 배에서 반 뼘쯤 떨어진 곳에 손을 쫙 펴두고 있었던 것이다. 뒤를 돌아봤더니 웬 남자가 능글맞은 얼굴로 씩 웃는다. 너무 놀라 뇌가 멈추는 느낌이었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빈자리로 자리를 옮겼다가 사람들이 가장 많은 번화가에서 내리는 것뿐이었다.


그때 소리를 지르거나 다른 사람에게 알리던지 욕이라도 실컷 해줄 걸 그러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한이 맺혔다. 난 그때 영어로 따질 만큼 내가 영어를 잘 못해서라고 생각했는데, 생각해 보니 언어가 문제가 아니었던 것 같았다. 그냥 너무 당황했고 용기가 없었던 거다. 분하고 억울해서 이제 외국에서 욕할 상황이 생기면 한국어로라도 욕 해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그리고 십여 년이 지난 후 마침내 그날의 다짐을 실천할  상황이 생긴다.


아이가 세 돌이 막 지났을 무렵, 마드리드에 살던 우리는 지금이 아니면 언제 가보겠냐는 생각으로 소몰이 축제로 널리 알려진 팜플로나 '산 페르민 축제'에 가게 된다. TV속에서 보던 신나는 축제 분위기는 아침부터 종일 바르(Bar)에서 마신 술에 흥건히 취한 취객들이 만들어 낸 흥이었고, 아무 곳에서나 구토하고, 노상방뇨하는 사람들을 눈만 돌리면 볼 수 있었다. 게다가 태양의 나라답게 햇빛은 어찌나 뜨거운지 거리에 있는 것이 곤욕이라 보이는 패스트푸드점에 들어갔다.



패스트푸드점도 축제를 즐기러 온 관광객들로 꽉 차 있었다. 한숨을 돌리며 겨우 주문한 음식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뭔가가 날아와 내 머리를 '탁' 때렸다. '뭐지?' 생각하려는 찰나 하나가 더 날아와 내 머리에 명중. 주워보니 닭뼈다. '아놔...' 날아온 곳을 봤더니 술에 취한 20대가 실실 웃으며 미안하다는 제스처를 취한다. 그 웃음을 보는 순간 나는 이성의 끈을 놓았다.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놈'한테 갔다. 한국어로 미친 듯이 욕을 해줬다. 남편은 깜짝 놀라 무슨 일이냐며 왔는데, 짧은 설명 후 가서 빨리 경비 불러오라고 보냈다. 그리곤 영어도 스페인어도 아닌 다른 언어를 하는 외국인 관광객에게 한국의 욕이란 욕은 다 쏟아부어줬다. 그제야 그놈과 친구들은 뭐라고 해명을 하며 미안한 감정이 조금은 섞인 사과를 했다. 하지만 여전히 제정신들은 아니었고, 그 사이 남편이 데려온 경비에게 그 일행은 모두 매장에서 쫓겨났다.


그들이 나간 후, 내가 인종차별 아니냐고 그냥 쫓아낼 것이 아니라 경찰을 불렀어야 됐다고 분해하자 남편이 나름 이성적으로 추측한 상황을 말해주었다. 남편 생각은 그놈 일행이 우리 가족이 앉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나눠 앉았는데 자기 친구한테 장난을 치려고 던진 닭뼈가 나를 맞혔다는 것이다.


그래, 그랬을 수 있다. 그럼 내가 처음 쳐다봤을 때 당황하고 놀라는 표정을 지었어야 되는데, 그놈은 웃고 있었다. 조그만 동양인 여자를 맞혔으니 그냥 웃겼던 거다. 과연 우락부락한 남자를 맞혔어도 웃을 수 있었을까?


경찰서에 못 끌고 간 것은 아쉽지만 어찌 됐건 그들이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미친 듯이 쏘아붙였더니 내 마음은 후련했다. 그 옛날 어리고 약했던 내가 아니라 이젠 대한민국 아줌마니까 무서울게 뭐가 있겠는가.


아, 무서울 건 있었다. 엄마의 어마무시한 욕을 처음 들은 딸아이의 놀란 표정... 아이에게 찬찬히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난 아이가 그때 그 상황을 충분히 이해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똑같은 상황이 다시 생긴다고 해도 난 똑같이 행동했을 것 같다. 그리고 이번엔 꼭 경찰에 신고도 해야지.


그날 우리는 더 이상 산 페르민 축제는 보지 않고 팜플로나를 떠났다. 꼭 그 닭뼈 사건 때문만이 아니었다. 정말 화장실 하나 위생적으로 이용할 곳이 없고, 취객이 넘쳐나고 냄새나는 거리를 도저히 아이와 함께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에서 스페인 축제, 그것도 편의 시설이 열악한 소도시 축제는 절대 비추라는 소중한 교훈을 얻었다.


나중에 남편이 물었다.

"근데 욕 잘하더라. 어디서 배웠어?"

"드라마에서 배웠지. 욕 많이 나오는 드라마 불편했는데 다 쓸모가 있네. 역시 세상 모든 건 배워두면 쓸모가 있어."


살아보니 욕을 잘할 수 있다는 것도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큰 용기와 자신감을 주는 것 같다. 외국에서도 욕은 다 통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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