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근하게 반짝이는 빛
밤새 눈이 내렸다. 솜사탕 같은 하얀 눈이 아니라 성글고 가벼운 눈이었다. 열차의 차창 너머로 도시와 산야는 회색빛을 띠며 회한에 젖게 했다. 하늘은 엷은 회색 안개로 뒤덮힌 드넓은 캔버스였다. 고대영어로 gray 의 어원은 ‘은근하게 반짝이는 빛’을 뜻한다. 흐린 날의 노을진 하늘은 말 그대로 '은근하게 반짝이는 빛'을 선사한다.
회색은 수많은 색상 중의 하나다. 회색은 우리 삶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회색이 주는 편안함이 있기 때문이다. 도시의 빌딩숲도, 주택의 담장도, 아스팔트의 거리도 주로 회색이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자동차들 가운데 내가 가장 선호하는 색은 흰색도 검은색도 아닌 은회색이다. 매년 글로벌 자동차 인기색상 리포트를 제공하는 어느 코팅제 제조업체는 2021년 국내 자동차 색상 1위는 하얀색이었고 두 번째로 많은 컬러는 회색이라고 밝혔다. 전세계 기준으로도 1위는 역시 흰색이었고 그 다음을 검정과 회색이 차지했다. 유럽에선 3년 연속 회색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리처드 웨다 박사는 나라별로 선호 색을 연구하였는데, 이탈리아 사람들은 보수적인 기질로 회색을 무척 좋아한다고 한다. 회색은 공해에 찌든 암울한 도심을 연상케 하지만, 때론 도회적이고 지적인 이미지를 갖는다.
그런데 언제부터일까, 회색을 기피하게 된 것은.
회색은 흰색과 검은색이 물리적으로 뒤섞여 정체성을 잃어버린 색이 되었다. 회색인간이란 말이 난무하고 스스로 회색임을 자처하고 자책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스무살의 나도 회색의 저주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80년 봄, 사회 초년생으로 어색한 투피스에 굽 있는 구두를 신고 어스름한 퇴근 길 버스정류장에 서있을 때였다. 동년배 대학생들이 종로를 휩쓸듯이 밀려들고 있었다. 청바지에 운동화 그리고 티셔츠를 입고 어깨동무하며 연호하는 그들을 피해, 나는 벽에 바짝 붙어 박제되어 있었다. 그들만의 푸르른 자유가 부러웠다. 시대정신에 매몰되지 못하는 서러움이 일었다.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는 변명으로 애써 외면했지만 그 날의 영상은 평생을 따라다녔다.
2024년 겨울의 스무살은 어떤 모습인가. 몇일전 우연히 올라온 연주 영상 하나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지난 12월 3일 예상치 못한 한 밤의 계엄령으로 세상이 뒤집어졌다. 선포되고 해제되기까지 단 여섯 시간이었지만 이번 겨울 내내 광장을 뜨겁게 달구었다. 거대야당의 입법폭주로 무너져가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려는 대통령의 마지막 선택이었음을 알게된 지지자들은 차가운 아스팔트를 밤새 지켰다. 루즈벨트는 우파는 거짓에 분노하고 좌파는 진실에 분노한다고 했다. 또 우파는 분열로 망하고 좌파는 부패로 망한다는 말도 있다. 이번엔 달랐다. 12월 14일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후, 대한민국을 지키려는 우파 국민들은 소위 말하는 틀딱 노년층만이 아니었다. 순수하고 맑은 눈을 가진 10대와 2030 청년들이 합류했다. 기적같은 세대 연합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들은 계엄령을 통해 현실 정치에 눈을 떴다. 진실과 정의를 갈구하는 청년들의 가슴이 뜨겁게 타올랐다. 주류 언론들과 방송 매체의 거짓 선동에 분노했다. 탄핵은 박근혜대통령 만으로 족하다. 그땐 몰랐지만 지금은 안다, 우리가 얼마나 선동에 취약한 지를. 영상 속의 청년들은 추위에 웅크린 채 눈을 맞으며 차디찬 바닥에 앉아 있었다. 스무살 부처. 눈보라에 밤을 지샌 그들을 위해 누군가 곡을 만들어 헌정했다. 애절한 첼로의 선율에 하얀 눈이 날렸다. 검은 머리와 검은 파카에 내려앉는 눈을 맞으며 그들은 스스로 회색 돌부처가 되고 있었다.
은근하게 반짝이는 회색빛 스무살은 처연함으로 빛났다. 겉 모습은 전혀 화려하지도 눈에 띄지도 않지만 심정은 눈부시다. 그들은 더이상 무리지어 행동하지 않는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독립된 인격체로서 스스로 자유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돌부처가 되었다. 스무살의 나는 설레어 그들 옆으로 다가가 앉는다. 구두를 벗어 던지고 운동화를 신고 청바지에 외투 속엔 스웨터를 입었다. 맑은 눈동자에 인사를 건넨다. 어떤 욕심도 야망도 없다. 시간을 거슬러 함께 돌이 되고 싶은 마음만이 시린 겨울 햇살처럼 쨍하다.
https://youtu.be/1xrNdnOkCrQ?si=9BvvzRnyJWpM2ON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