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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할망 Feb 03. 2024

산에 갈까?

현재를 잊고 자꾸만 타입슬립을 떠나는 그녀의 그 시절의 이야기를 기억하고자언젠가 그녀의 그 과거마저도 잊히지 않을까 하는 허전함을 위해

그리고 그녀 곁에서 언제나 함께 해야 하는 나와 내 가족들의 위안을 위해,

그녀와 함께 타입슬립을 떠나기로 하다.     


“여보세요?”

“엄만데이, 내일부터는 아무도 오지마.”

“왜? 그럼 엄마 약 못 먹는데?”

“병원 가서 타고 오면 돼”

“이젠 엄마 혼자 병원 가도 약 받을 수 없게 우리가 다 조치했는데?”

“이제껏 잘 해왔는데 왜 자꾸 그래! 성가시니깐 오지 말라고”     


잠시 발리에서 들어와 있는 딸아이와 함께 홍 여사의 집으로 출동, 저녁거리를 장만하고 하하호호 웃으며 부족함이라고는 일도 없는 만찬을 마무리한 뒤 집으로 돌아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다시 고요해진 집에 홀로 남아 무슨 생각에 빠지신 걸까?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홍 여사의 목소리는 힘이 없지만 단호함과 화가 배어 있다. 일단은 알았다고, 그렇게 할 테니깐 그만 쉬시라고 답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스물아홉의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밭일과 갓난 막내 돌보기, 물 길어오기 등의 집안일은 홍 여사의 국민학교 입학을 미루게 하였다. 9살이 되어 학교를 처음 가게 되었다는 홍 여사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1학년을 건너뛰고 2학년부터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한다. 얼마나 신이 났을까. 학년 따위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으리라.     


늦깎이 국민학생이 된 홍 여사는 밭일을 할 일손이 필요하거나 아빠 없이 태어난 7살 터울 막냇동생을 돌봐야 할 때면 어김없이 결석을 해야만 했고, 어렵게 중학생으로 진학할 무렵부터는 할아버지 집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어머니와 떨어져 지내는 대신 할아버지는 홍 여사의 중학교 월사금을 내주었고 홍 여사는 중학교 진학과 할아버지 댁의 집안일을 거들게 된다. 줄줄이 딸만 넷이었던 어머니의 짐을 덜기 위함도 그 이유 중 하나였으리라. 네 자매들 중 왜 홍 여사가 그 댁으로 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모르긴 해도 이때부터 홍 여사와 홍 여사의 어머니가 서먹서먹한 관계로 들어서지 않았나 싶다. 치매 이후에 반복되는 옛 이야기 중 하나가 당신의 어머니를 원망하는 이야기이니...     


“할아버지 따랑(따라서) 밭에 가민(가면) 신고 온 신(신발은)은 그늘진 담 트멍(구석)에 얌전히 모셔 놓고이, 맨발로 일 해나서(일을 했어). 발 버무는(더러워지는) 거 보다이, 신이 더 귀해부난. 오늘추룩(처럼) 뱉(햇빛) 뜨거우민 발바닥이 와싹와싹 데워져도 신은 안신어서(신지 않았어).”      


나비들이 찾아오도록 배초향과 등골나물을 심었던 우영팟(텃밭)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잡초를 뽑으러 갔다. 석 달 가까이 홍 여사와 동행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들려주는 이야기는 맨발로 일해야 했던 그 시절의 것이 대부분이다. 우영팟에 도착하자마자 꺼내드리는 장화와 장갑, 팔 토시들이 어릴 적 귀한 신발을 소환해 주었으리라. 그리곤 세월 참 좋아졌다 하신다.     


홍 여사와 처음 우영팟을 찾았던 날은 한라산이 너무도 또렷하게 보였던 날이었다. 그때부터 홍 여사는 나와 함께 밭에 가는 일은 우영팟도 아니고, 꽃밭도 아닌 “산에 갈꺼?“가 되었다. 한여름에는 더워서 힘들 만 한데도 ‘내일 산에 갈까’ 하고 물으면 당연히 가자고 한다. 지난번 다 못 메고 온 검질(잡초)들을 마무리해야 한다고도 하신다.      


어린 시절의 뜨거웠던 발바닥과 신발, 몇 달 전 처음 찾았던 우영팟의 풍경, 다 못 메고 남겨둔 검질은 기억하시는데 어제 나와 함께 갔던 병원은 기억을 못 하신다. 안과 치료를 받고 나와 받은 약이거늘 감기약이라고 하신다. 오늘은 아침 식전에 혈압약을 드셨는데 식사를 마치고 나니 또 약을 먹자고 하신다. 맛있게 같이 저녁을 먹어 놓고는 내일부터 다신 오지 말라고도 화를 내신다. 어느 대목을 기억하고 어느 대목을 망각하는 걸까. 목요일에는 홍 여사와 산에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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