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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할망 Dec 30. 2023

우등생

현재를 잊고 자꾸만 타입슬립을 떠나는 그녀의 그 시절의 이야기를 기억하고자언젠가 그녀의 그 과거마저도 잊히지 않을까 하는 허전함을 위해

그리고 그녀 곁에서 언제나 함께 해야 하는 나와 내 가족들의 위안을 위해,

그녀와 함께 타입슬립을 떠나기로 하다.


“3주 후에 다시 오시면 됩니다.” 일주일 만에 다시 만난 안과 원장님이 시술 경과를 보고는 괜찮아졌다면서 남기신 말이다. 홍 여사는 현재 오른쪽 눈에 ‘중심 망막 정맥폐쇄증’을 앓고 있다. 80이 넘도록 수고해 준 세월도 그러하거니와 고혈압이 발병 원인 중 하나라고 하니, 아니 왜 이런 듣보잡 병이 생겼을까 하는 의문은 하나 마나 한 소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돌아가신 홍 여사의 언니가 양쪽 눈 모두 실명한 가족력이 있어 병명을 듣는 순간부터 눈앞이 까매질 수밖에 없었다. 중심 망막 정맥폐쇄증의 나쁜 예후 중 하나가 실명이란다. 

    

자식들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홍 여사는 하루 두 번 먹어야 하는 약과 자기 전에 넣는 점안액을 까먹기도 하고, 어떤 날은 약을 먹었는지 기억하지 못하고는 또 약을 먹어버리는 날이 있다. 급기야 요일과 오전 오후가 적힌 약통을 사다 드렸으나,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를 떠올리지 못하는 날마저 있으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그녀의 언니처럼 실명될지도 모르니 우리 4남매는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저지 보다 더 시급한 문제에 당면해 있다.      


97년생인 큰애가 중학교에 입학해 처음 시험을 치르고는 원점수, 평균, 표준편차, 성취도 등 무슨 말인지 도통 알 수 없는 명사들과 함께 과목별로 그 수치들이 빽빽하게 적힌 성적표를 들고 왔다. 학력고사 세대인 우리 때만 해도 해당 과목 점수와 반 석차, 전체 석차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큰애가 준 성적표는 단어의 뜻을 하나씩 헤아리면서 숫자의 의미를 낱낱이 파악해야 할 정도였다. 신속하게 인터넷을 뒤져 놓고 ‘그러니깐 네가 받은 점수는 이거라는 거지?’라고 아이에게 확인 질문을 하고 나서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성적임을 확신하곤 했다.     


사람을 대함에 있어 ‘남녀 차별’과 ‘학과 성적 우대’의 신조가 남달랐던 홍 여사는 당신 손자들에게도 공부에 대한 관심이 유별났다. 자신이 낳은 4남매 중 누구는 몇 살에 한글을 떼었다, 누구는 학기 초에 급장을 못하고 집에 와서는 펑펑 울었다는 둥 전설 같은 레퍼토리를 늘어놓다가 끝내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이야기로 마무리가 된다. 당신도 초등학교 시절에 우등생이었노라는. 또는 같은 시간에 같은 선생님한테서 같은 공부를 배웠는데 왜 우등을 못하냐는. 큰애의 성적표를 단번에 읽어내지 못하기는 나와 별반 다르지 않으면서도 말이다.      

마치 가보(家寶)라도 되는 양 빛바랜 성적표와 우등상장을 아직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걸 보면 그녀의 성적 자부심과 명예로운 똑똑함은 감히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성역 중에 최고의 성역이었다. 과목마다 숫자가 아니라 ‘수, 우, 미, 양, 가’라는 문자가 적혀있고, 대부분이 ‘수, 우’인 성적표. 빼어날 ‘수’, 뛰어날 ‘우’. 심지어 연도 표기는 단기 4288년(=서기 1955년)이라 되어 있다. 격세지감!!   

  

그토록 빼어나고 뛰어났던 그녀가 이제는 현재를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어진 시절의 기억만 줄줄이 꺼내고 있다. 

홍 : 중학교 동창 남자아이가 전화와나신디, ‘너 그때 참 똑똑했어이’라고 허드라고 이, ‘다 옛날이라. 지금은 안 똑똑이라.’랜 고랐쪄.

(중학교 동창 남자아이가 전화왔는데, ‘너 그때 참 똑똑했어’라고 말했어, ‘다 옛날이야. 지금은 안 똑똑이라..'라고 말했어.)

언제나 공부 이야기 끝에는 자신의 똑똑하고 공부 잘했던 머리를 뽐냈거늘, 이제는 예전에 비해 자꾸 깜박깜박한다는 걸 본인도 인지하는가 보다. 당신의 성적표처럼 빛이 바래버린 그녀의 자부심과 명예를 되돌릴 길은 없는 걸까.     

 

이미 월요일 약까지 먹어버린 홍 여사의 약통을 내려다보며 박완서의 ‘일상의 기적’을 떠올린다. “아침에 벌떡 일어나는 일이 감사한 일임을.... 건강하면 다 가진 것이다.... 오늘도 일상에 감사하며 살자!”  

   

억수같이 퍼붓던 검은 구름과 빗줄기가 멈추고 파란 하늘과 흰 구름 위에 무지개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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