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편) 2-2. 더 크다는 의미
2장. '더 큰' 회사
“안녕하세요? 여기는 S 조선 인사팀입니다. 저희 회사 지원하셨었죠?”
난 아직 취할 정도로 마시지는 않았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네? 어디시라고요?”
“부산에 있는 S 조선입니다. 얼마 전에 저희 회사 하반기 공채에 지원하셨는데 기억 안 나세요?”
난 순간 술이 확 깨고 정신을 확 차렸다.
“네, 맞아요. 그런데 전 이미 불합격 통보를 받았었는데요.”
“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희 회사에서 새로 부서가 생겼는데 중국어 가능한 분이 필요해서 늦은 시간이지만 급하게 연락드렸습니다. 하반기 공채 탈락자들 중에서 중국어 되시는 분들만 면접을 진행하려고 하는데 면접에 오실 수 있으세요?”
이건 무슨 드라마도 아니고 믿기지 않았다. 패자부활전처럼 서류 전형에서 떨어진 나에게 면접의 기회가 찾아왔다. 하지만 당장 내일이 출국이었기에 내 머릿속은 백지처럼 하얘졌다.
“정말요? 면접이 언제예요?”
“내일 오후 두 시입니다. 오실 수 있으세요?”
정말 죽은 사람이 살아나 듯 내게 기회가 되살아났다. 하지만 같이 필리핀으로 가기로 한 친구가 옆에 있었고 주머니 속엔 비행기 표가 들어있었다. 난 방금 나에게 일어난 이 영화 같은 얘기를 친구에게 해줬고 친구가 깔끔하게 잔을 비우고 말했다.
“캬...내 먼저 필리핀 가가 있을 테니까 니는 내일 부산 내려가서 면접보고 고마 잘 돼가 안 왔으면 좋겠다. 절대 필리핀 오면 안 된다!”
친구는 나로 인해 갑자기 변경되는 계획에도 싫은 내색 없이 날 응원해주며 쿨하게 보내주었다. 다음 날 아침 그는 인천으로 향했고 난 부산으로 향했다. 나는 부산행 기차 안에서 이번 선택은 반드시 좋은 선택으로 만들겠다고 다짐했고 마침내 7개월의 백수 생활을 끝으로 부산에 있는 조선 중소기업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하게 되었다.
영화처럼 다시 잡은 면접 기회 그리고 합격. 그래서 더 기대가 컸던 첫 직장이었고 의미가 큰 내 사회생활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지극히 현실이었고 난 그 지독한 현실의 회초리에 후려 맞고서 그토록 어렵게 들어갔던 회사를 3개월 만에 사직했다.
첫 출근, 첫 회사. 처음은 그 무엇이라도 설레고 긴장된다. 내가 첫 회사에 첫 출근을 시작하던 때가 2007년 12월 한 겨울이었는데 취업이라는 두툼한 이불이 마음을 덮어주는 안도감은 추위도 잊게 만들 만큼 취업 준비생에게 무직만큼 추운 계절이 없다. 내게 공채 동기들이 생겼고 사원증이 발급됐고 월급 통장도 만들어졌다. 남들처럼 아침에 정장을 차려 입고 넥타이를 바르게 매고 또각또각 말발굽 소리를 내며 당당하게 출근길을 걷는다. 비록 수습 기간이라 월급은 많지 않지만 돈을 받기만 했던 부모님께 드릴 수도 있고 내가 사고 싶던 것을 눈치 안 보고 살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사회는 냉정하고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불변의 진리처럼 난 금세 불만이 생기고 지쳐갔다. 월급은 쥐꼬리인데 일은 노예처럼 시키는 거 같고 매일 반복되는 술자리에 지치더라도 출근 아침은 찾아왔다. 일의 방식은 비 효율적이고 이 인간은 왜 이렇게 말이 안 통하는지 짜증이 나지만 그래도 웃어야 한다. 이 비참한 회사원의 현실을 얼마 겪지도 않은 수습사원이지만 앞으로 계속 이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더 암담했다.
그 당시 조선업은 최고의 호황이었다. 대기업부터 중소기업까지 호황이 아닌 곳이 없었다. 좀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배만 띄울 수 있는 곳이면 조선소가 지어졌고 수주는 바닷물처럼 끊이지 않았다. 수주가 너무 많아 철강이 모자라 돈을 주고 철강을 사 오는 입장에서도 제철 업체에 좀 더 팔아달라고 부탁을 해야 할 정도였다. 내가 맡은 일이 그런 일이었다. 한마디로 구매 업무였는데 국내 철강 업체로부터 우리가 필요한 철강을 애원해서 필요한 물량을 조달하다가 경험이 쌓이면 중국 철강 업체로부터 더 싼 가격에 더 많은 물량을 사 오게 할 목적으로 날 채용한 것이었다.
일은 내게 큰 문제가 아니었다. 일은 배워가고 있었고 비록 적성에는 맞지 않았지만 재미없다고 회사를 때려 칠만큼 개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일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소화가 되는데 사람에게서 오는 스트레스는 항상 체했다.
조선업, 철강업 세계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철밥 먹고 산다.’고 표현한다. 그래서인지 사람들도 회사 분위기도 강철처럼 딱딱했다. 보수적, 수직적으로 짜인 이 세계는 군대식의 상명 하복과 ‘까라면 까야지.’라는 식으로 사람을 괴롭히고 강요했다. 물론 이런 분위기의 조직이 잘 맞고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난 전혀 아니었고 지금도 앞으로도 아니다.
그렇게 지쳐갈 때 즈음 그나마 말이 통하는 부장님이 있었다. 부장님은 화재 보험사 출신인데 선박 사고 처리 책임자로 스카우트돼서 경력직으로 온 분이셨다. ‘철밥’ 출신이 아니라 그런지 농담도 곧 잘하시고 가끔 술자리를 할 때면 마음을 편하게 해 주셨다.
“너는 이 회사 왜 들어왔어?"
퇴근 후 저녁 식사 겸해서 가진 술자리에서 부장님이 물었다.
“저보고 오라고 하는 데가 여기밖에 없었어요.”
난 솔직하게 답했다.
“음… 내가 솔직히 얘기하면 넌 여기랑 안 어울려. 더 큰 회사로 가. 여기 있지 마.”
“더 큰 회사요? 여기도 간신히 들어왔는데…. 어디요?”
“그건 나도 모르지. 네가 잘 찾아봐.”
난 그때 누구나 생각하듯 더 큰 회사는 회사 규모가 더 큰 곳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중에 정말 이직을 하기도 하고 회사 생활을 내공이 쌓이면서 내 스스로 큰 회사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나에게 큰 회사는 규모가 큰 회사가 아니라 내 행복감이 큰 회사, 나에게 더 큰 만족감을 주는 회사였다. 아무리 회사 규모가 크고 월급 통장에 찍히는 숫자가 커도 사람에게 받는 스트레스는 그 큰 숫자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만큼 사람을 무력화시킨다. 누군가 만약 이런 나에게 ‘월급 많이 받으면 그 정도는 버텨야지!’ 라며 배가 아직 불러서 그런 생각을 한다고 손가락 질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직장에서 사람으로 인한 시달림을 당하며 불행해져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것이다.
결국 그 날 부장님의 조언은 쪼그려져 있는 풍선이 되어 널브러져 있던 내게 바람을 훅 불어넣으며 과감하게 사직서를 던지게 했다. 그렇게 갈망하던 백수 탈출을 한 지 3개월 만에 백수로 귀환해 더 큰 회사를 찾아 방황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