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만춘 Aug 03. 2021

(안)슬기로운 공황생활

 나는 정신과 상담 주기가 굉장히 들쭉날쭉해서 어떤 날은 1주일에 한 번씩 가고 또 어떤 날은 3주일에 한 번씩 가기도 했다. 내 태도에 따라 다음 병원 방문 날짜가 달라졌는데 나죽겠다고 울부짖는 날엔 꼼짝없이 다음 주에 와야 하고, 나는 지금 이것도 하고 있고 저것도 하고 있고 이 세상은 너무나 살만한 척하면 2주에서 3주간의 시간이 주어졌다. 1주일이건 3주일이건 선생님한테 듣는 이야기는 항상 비슷했다. '이것과 저것은 하지 마시고 저것은 주의하시고...' 대충 이런 거였다.


 공황장애는 상담과 약물뿐만 아니라 생활습관 개선도 중요하다고 하지만 나는 대부분 모르쇠 했다. 공항이라는 환경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을뿐더러 우울증이라는 최고의 핑곗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나의 주 생활 반경은 침대 플러스 마이너스 2미터 정도였다. 침대와 무한도전이 내 라이프스타일의 전부였으니까. 이불 속에 누워 보고 또 봐서 이제는 자막까지 외워버린 무한도전을 시청하는 게 내 유일한 낙이었다.


 하지만 아예 삶을 놓아버린 건 또 아니었으므로 나도 뭔가 노력하려는 노력 정도는 했었는데 문제는 그게 '니은' 정도에서 그쳤다는 데에 있었다. 정신과 선생님한테 듣는 말, 타이탄이라 불리는 작자들이 했다던 말, 부자들이 실천하고 있다는 인터넷에 떠도는 말 등은 대개 항상 일치했다. 다 뻔한 말 하고 있는데 그 뻔한 말을 나만 지키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밀가루가 안 좋단 걸 알면서도 끊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내게 생활습관은 밀가루 같은 거였다. 


 '새벽 6시에 일어나 하루를 열어라. 남들이 자는 동안 고요한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나는 주로 새벽 4시 또는 5시 출근을 했는데 공항엔 모두들 깨어있는 사람밖에 없었다. 고요한 나만의 시간은 미라클하게 사라져버렸다.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무너진 생체리듬을 회복하라.'


 공항은 스케줄 근무로 움직이기 때문에 규칙적인 생활이 애초에 불가능했다. 오늘은 새벽 4시에 출근했다가 다음날은 오후 1시에 출근한다. 자는 시간도 뒤죽박죽, 밥 먹는 시간도 엉망진창이다. 스케줄이 거지같이 나오면 밤 10시에 퇴근했다가 다음날 새벽 3시에 출근해야 하는 일도 생긴다. 우리는 이걸 '꺾인다'고 표현했는데, 한 달 스케줄을 받아보고 이 꺾이는 날이 많으면 한 달 내내 업그레이드 된 거지같은 기분을 숨길 수 없었다. 이 꺾이는 날이 있으면 퇴근하고 집에 가서 샤워하고 나와 그 위에 고대로 화장을 하고 고대로 출근을 하면 된다.


 오늘은 낮에 잤다가 내일은 새벽에 잤다가 또 모레는 샐녘에 잤다가, 하루하루를 이런 식으로 사니 규칙적인 생활이 될 리가 만무했다. 또 수면 패턴이 이렇게 불규칙하면 불면증이 올 확률도 크다고 하는데, 실제로 나는 잠이 들어도 푹 잠들지 못하고 중간중간에 깨는 경우가 허다했다.


 밥 먹는 시간도 딱히 정해진 건 없었다. 업무시간엔 안 바쁜 시간에 관리자가 밥 먹고 오라고 보내주면 먹었고 쉬는 날엔 어영부영 배가 고프면 먹었다. 몸이 고되고 힘드니 뭔가 요리를 해 먹는다는 그런 이세계(異世界)에서나 볼법한 희망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내 주식은 편의점 도시락과 라면이었다. 전 직장 다닐 때 같은 팀이었던 MD가 내가 점심으로 허구한 날 편의점 김밥만 먹는 걸 보면서 '만춘님 그러다 죽어!'라고 겁줬던 게 생각났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꾸준히 운동하라. 몸과 정신이 맑아지고 긍정적인 사고를 하게 된다.'


 내가 그 당시 하던 운동이라고는 숨쉬기 운동이 전부였다. 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끝내주게 잘했는데 끝내주는 실행력이 뒷받침되지 않았다. PT를 알아보기는 했는데 막상 끊으려니 망설여지는 것이 내 귀여운 월급 때문인지 헬스장의 먼지만도 못한 내 의지 때문인지 아니면 둘 다 때문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운동이라면 운동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 출근하는 날은 꼭 만 보 이상은 걸었는데, 게이트 몇 번 뛰다 보면 알아서 찼다. 나는 일일 퀘스트 깨는 기분으로 게이트를 돌았다.


 'NRT(나리타) 게이트에서 승객 350명을 태우시오.(난이도 하)'

 'BKK(방콕) 게이트에서 각 INAD* 10명, DEPO* 10명을 핸들링하시오.(난이도 중)'

 'VTE(비엔티안) 게이트에서 환승객 50명을 수속하시오.(난이도 최상*)'


 *INAD : Inadmissible, 입국거절자

 *DEPO : Deportee, 강제추방자

 *난이도 최상인 이유를 잠시 설명해 보자면 : 

 1. 환승객 대부분이 라오스계 미국인이라 여권은 미국 여권인데 영어를 못 한다. 상대방은 라오스어, 나는 영어로 떠드니 기본적으로 말이 안 통한다. 

 2. 게다가 승객이 전 구간에서 이용한 항공사와 우리 항공사 간 시스템 상 수하물 연결이 되지 않으니 수동으로 백 넘버를 입력해줘야 하는데 대부분 Baggage claim tag(수하물 영수표)이라는 단어를 알아듣지 못할 뿐더러 알아들었다고 해서 그걸 어디에 뒀는지 까먹은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수속에 굉장히 난항을 겪는다. 그냥 저 게이트에 내가 안 걸리길 바라는 게 최선이다.

 나는 저 게이트에서 굉장한 사고를 친 전적이 있기 때문에 같은 게이트를 뛰었던 대리님이 두 번 다시 비엔티안 게이트에 홍만춘은 넣지 말라고 오피스에서 울분을 토하셨다는 후문...


 다 깨고 나면 HP는 폭삭 닳아있었고 보상으로는 작고 소중한 월급과 걸음 수와 소정의 경험치가 주어졌다. 그리고 보람은... 없었다.


 '술, 담배, 카페인을 멀리하라.'


 스스로 자랑스러운 게 한 가지 있다면 바로 술, 담배를 안 한다는 거다. MBTI에서 파워 I(내향형)를 자랑하는 나는 술자리도 별로 안 좋아하고 술 자체도 잘 안 마신다. 일단 맛이 없다. 당최 소독약 맛이 나는 액체를 마셔서 뭐한단 말인가? 몸에서 알코올이 안 받아주는 것도 있다. 팀 회식에서조차 부장님이 따라주신 맥주를 원샷했다가 그대로 화산 폭발할 듯 온몸이 시뻘게지는 바람에 부장님한테 미안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커피는 도저히 도저히 끊을 수가 없었다. 카페인이 들어가면 심장이 뛰고 심장이 뛰면 불안해진다. 공황발작이 오면 심장이 터질 듯 뛰는 증상이 있어 심장이 조금이라도 빨리 뛸라 치면 지레 겁을 먹는다. 그렇기에 더더욱 카페인을 끊었어야 했지만 내게 커피는 불가침의 영역이었다. 수속 사이사이에 마시는 커피는 최고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그때는 마스크를 안 썼으니 손님한테 입냄새는 좀 났을 것 같다.) 당시 내가 제일 좋아하던 커피는 1터미널 4층에 있는 @@카페에서 파는 라떼였다. 콜드브루 아니면 에스프레소 중에 선택할 수 있었는데, '안녕하세요. 저 바닐라 크리미 라떼 에스프레소 샷 하나만 넣어서 가능할까요?'가 내 고정 멘트였다. 가능한 걸 알면서도 직업병으로 인한 공손한 말투를 버리지 못해 항상 '가능할까요?'라고 물으면 이미 내 대사를 외워버린 직원분들은 내 머리통이 나타남과 동시에 알아서 포스기를 찍고 계셨다.


 지금은 어떻냐고 물어보면 할 말이 없다. 나는 아직도 주말엔 해가 중천에 떠야 일어나고 운동은 코로나 때문에라는 비겁한 변명을 대며 가지 않고 있고, 카페인은... 글을 쓰는 지금도 카페에 와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공황 동지들이여! 나는 그대들을 응원한다. 공황인들이 모두 힘내고 잘 살아서 나도 좀 잘 살았으면 한다. 그러니 부디 나처럼은 행동하지 마시고 잠도 잘 자고 밥도 잘 먹고 운동도 열심히 해서 슬기로운 공황 생활을 이어가시길 바란다. 피스!!

작가의 이전글 코로나 시대에 정리해고된 건에 대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