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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만춘 Sep 18. 2021

정신과조차 방황하는 삶

 처음에 난 공황이 공황인지도 몰랐고 불안이 불안인지도 몰랐다. 매일이 불안하고 너무 불안해진 나머지 까무러칠 정도가 되었지만 그게 내 정신상태 때문에 까무러치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너무나 연약한 나머지 주기적으로 119 구급대원들을 괴롭히지 않으면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는 지경이 된 것인지는 몰랐다.


 그러니까, 난 그게 월요병인 줄 알았다. 남들은 일주일에 하루 오지만 나한테는 일주일에 7일 오는 변이 월요병. 나는 매일매일이 내일이 월요일인 것처럼 살았기 때문에.


 내가 공황장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는 단순했다. 인터넷에 있는 한 테스트를 해보고 나서였다.


 '다음 열두 문항 중 세 가지 이상 표시한다면 당신은 공황장애일지도 모릅니다.'


세 가지 문항을 제외한 나머지 문항에 모조리 체크했다. 계속 쓰러져대서 찾아간(아니 실려간) 병원에서도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했던 내 문제들이 전부 이 한 화면에 담겨있었다. 눈물이 났다. 휴일에 맞춰 정신과를 찾아갔다. 공황장애, 불안장애,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이미 인지하고 나서인지 그리 놀랍지 않았다. 오히려 나에게 맞는 약을 타먹을 수 있음에 감사했다.


 정신과를 가기 전까지의 나는 분명 정상인이었는데, 그냥 좀 월요병이 심하고 자주 외로운 사람일 뿐이었는데, 병원 문을 나선 후부턴 정신장애를 가진 사람이 되었다.


 첫 번째로 찾아간 병원은 신촌에 있는 옛날 전당포 스타일의 병원이었다. 딱 내가 생각하던 정신과 이미지였다. 신촌역 바로 앞 유명한 프랜차이즈 카페가 1층에 있고 그 위에 병원이 있었는데 카페 위로는 생각보다 엄청 음침하고 같은 건물이 맞나 싶게 으슥했다. 심지어 간판도 없었다. 병원은 내 자취방 못지않게 작았다. 그 당시 내가 영종도에서 투룸에 살고 있었으니 아마 내 방보다 작았을 거다. 대기실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벤치에 앉아있으려니 다른 손님들이 들어왔는데 뻘쭘하게 긴 의자 하나를 셰어하며 눈이 마주치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서로에게 눈도 돌리지 않았다. '내가 정신과에 왔다니?', '여기가 정신과라니?' 등등 인생의 금기라도 깬 것 같은 긴장감과 두근거림과 대기실의 어색한 공기가 나를 휘감았다.


 상담실에 들어가니 의사 선생님이 무슨무슨 좋은 활동을 하고 있고 무슨무슨 상을 받았다는 내역들이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선생님이 무슨 일로 왔냐고 물어봤는데 나는 한참을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물만 뚝뚝 흘렸다. 선생님도 조용히 곽티슈만 내쪽으로 밀어주셨다. 상담이 끝나고 밖으로 나와보니 접수처에서 약 조제까지 같이 해줬다. 의사 선생님 한 명, 접수 겸 약 조제 겸 원무 겸… N잡러의 시대에 걸맞는 트렌디한 직업을 가지신 직원분 한 명까지 총 두 명으로 굴러가는 병원이었다. 계속 다니다 보면 치료하러 갔다가 병만 더 깊어질 것 같은 황량한 환경이라 한 번 나가고 말았다.


 그리고 두 번째로 찾아간 병원 역시 신촌에 있는 또다른 병원이었다. 여긴 두 번 정도 갔었는데 갈 때마다 어째 손님이 나밖에 없었다. 여기 굴러가긴 하나 싶게 선생님 말투도 너무 까칠했다.


 "남들이 제 얘기를 하는 게 싫어요. 저는 존재감 없이 회사를 다니고 싶은데 회사 특성상 그게 잘 안 돼요. 가끔 사람들 뇌에서 제 기억을 다 없애버리고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도 해요."

 "그게 왜 싫어요?"

 "네?"

 "그게. 왜. 싫냐고요."

 "어… 저는 튀는 걸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구요…"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네…?"

 "남들이 내 얘기를 하는 건 내가 잘나서 그런 거예요."

 "아… 그러시구나…"


 또는


 "지금 무슨 일 해요?"

 "인천공항에서 항공 지상직으로 근무하고 있어요. 탑승권 발급해주고 탑승 도와드리고… 그런 일 해요."

 "일 하면서 뭐가 제일 힘들어요?"

 "게이트 업무 같은 경우에 출항 시간이 딱 정해져 있다 보니까 일이 마음대로 안 될 때 너무 조급해지고 사람들도 예민해져요. 뭐 그런 일이 어쩌다 한두 번이면 괜찮은데 빈번하게 이레귤러 케이스가 발생하니까 그게 제일 힘들어요."

 "그게 뭐가 힘들어요?"

 "네?"

 "그걸 만춘 씨가 바꿀 수 있는 거예요?"

 "어… 그런 건 아닌데…"

 "왜 본인이 바꿀 수 없는 문제로 힘들어해요?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잖아요? 나는 그런 식으로 생각 안 해요."

 "아… 그러시구나…"


 하는 식이었다. 뭔가 위로해주는 듯하면서도 혼나고 오는 듯한 느낌이라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그리고 약을 너무 쥐톨만큼 처방해줬다.


 "지금 일하고 계시니까 약 너무 세게 안 줄게요. 졸릴 수도 있어서."


 부작용이 걱정돼 조금 준 것 치고도 굉장히 용량이 적어 뵀다. 뇌가 분명 아까 무슨 약을 먹었다고 했는데 간은 당최 무슨 약을 해독해야 할지도 모를 지경이었을 거다. 약물에 의존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나 아예 약효가 없는 건 더 싫었다. 그럴 거면 병원에 간 의미가 없지 않나. 플라시보 효과에 의지하려는 게 아니라면 약효도 없는 것 같아 이곳 역시 발길을 끊었다.


 세 번째로 찾아간 병원은 한양 문물에 실망하고 동네 병원을 찾아보다 발견한 곳이었다. 분명 인천에 있는 동네 병원인데 신촌보다 훨씬 바글바글했다. 대기실이 문자 그대로 '미어터질' 것 같았다. 대기실이 모자라서 영상치료실까지 개방해놓을 지경이었다. 일반 내과도 아니고 정신과에서 이런 광경은 처음 목격하는지라 처음엔 다분히 당황을 했다. 초진이라 했더니 직원분이 나를 문진실로 이끌고 가 영역별 문진표를 건네주며 작성하고 나오라고 했다.


 정말 불행하게도 내가 병원을 찾은 날은 당시 사귀던 애인과 크게 다투고 헤어질 위기에 처해있던 날이었다. 왜 하필 그날 갔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마 평소에 같이 병원에 가주겠다고 말했던 애인에 대한 반항심에 '너 없이도 나 혼자 잘 갈 수 있어!' 하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호기로운 마음가짐에 그렇지 못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내 미래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다… 5점…'

 '나는 나 자신이 실패자라고 생각한다… 5점…'

 '나는 항상 죄책감에 시달린다… 4점…'


 5점이 제일 높은 점수였다. 심지어 눈물도 조금 흘렸던 것 같다.


 "만춘 씨, 우울 증상이 좀 심하게 나왔어요."

 "네에…"

 "뭐가 만춘 씨 마음을 힘들게 해요?"

 "그냥 다요… 무급 휴직 중인데요… 잘릴 수도 있고… 일을 못 하니까 돈도 없고… 저는 집도 없고… 엄마도 없고… 킁흡흑흙컥… 죄송해요."


 선생님은 또 말없이 곽티슈를 내쪽으로 밀어주셨다.


 젊은 여선생님이라 말도 잘 통하는 것 같았고, 이것저것 세심하게 잘 봐주시는 것 같아 일여 년 동안 이곳으로 정착했는데 어느 날 선생님이 다시 대학병원으로 돌아가신다고 했다. 원래 대학병원 교수님이시라고.


 "만춘 씨만 괜찮으면 다음부턴 저 있는 병원으로 와서 진료받아요. 대학병원이라 예약이 조금 까다로울 순 있는데 아무래도 만춘 씨 입장에서 갑자기 상담사를 바꾸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요."


 그래서 선생님을 따라 대학병원으로 가서 진료를 봤는데 영수증을 보니 내가 감히 감당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닌 것 같았다. 이 금액을 2-3주마다 한 번씩… 대학병원을 물로 본 내가 미웠다. 갑자기 공황과 우울과 불안이 씻은 듯이 낫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면 좋았겠지만 물론 그런 일은 꿈에서라도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언젠가는 이렇게 씻은 듯이 다 나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씻고 씻고 씻어서 언젠가는 정말로 씻겨져 내려갈 아이들이라면, 마지막 날에 그 친구들에게 단 하루 말을 걸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그래도 고마웠다고 얘기하고 싶다. 모든 것이 불행하진 않았었다고. 어둠이 있었기에 빛이 더 찬란할 수 있었다고.


 그럼 나는 이만 씻으러 가야겠다. 찬란해질 미래를 꿈꿔야 해서 말이다.


 #그럼 #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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