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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느진 Jun 02. 2021

라즈베리 빛 손

오늘의 눈 맞춤

2021년 6월 1일, 오후 6시 20분


 눈을 떴는데 몸이 심각하게 무거웠다. 어제 조금 돌아다녔다고 몸이 아주 거세게 반발을 표해왔다. 이틀 연속으로 본의 아니게 잠을 적게 잔 것도 한 몫한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참 몸이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아쉬운 마음으로 약속까지 미루고 다시 수마의 품에 안겼다.


 완전히 잠에서 깬 건 저녁을 먹으러 집에 들른 동생 덕분이었다. 직구한 영양제와 무가당 에이드 가루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알리려 내 방 문을 여는 기척이 아니었다면 몇 시에 일어났을지 모르겠다. 요구르트에 꿀을 타서 마시면서 휘적휘적 박스를 뜯는데, 평소와 다르게 달큼한 냄새가 확 풍겼다. 느낌이 싸했다.


 에이드 가루 중에 라즈베리가 들어간 것이 뜯어져 있었다. 영양제며 뭐며 붉은 가루로 도배되었다. 닦아내기도 쉽지 않았다. 정신없이 수습하는데 양손에 붉은 라즈베리 물이 짙게 들었다. 흡사 핏빛 같기도 해서 동생과 뭔가 섬뜩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씻으면 사라질 줄 알았는데, 시간이 한참 지난 새벽인 지금도 여전히 그 흔적이 남아있다.


 졸음 기운이 종일 따라다녀서 정신이 몽롱했다. 노트북 앞에 앉아있는 이 순간도 마찬가지고. 카페인으로 이 흐린 하루를 억지로 선명하게 깨우고 싶진 않아서 그냥 버텼다. 어떻게 시간은 흘렀다.


 손끝에 물든 붉은기가 내내 눈에 밟혔다. 괜히 달큼한 향기도 손에 머무르는 것 같고. 처음엔 왜 이런 일이 일어났지, 울컥 짜증이 났던 것도 사실이지만 웃기기도 해서. 시간이 지나면 점점 옅어질 색이라 더 눈길이 갔다. 섬뜩한 핏빛에서 조금 더 부드러운 꽃잎의 빛깔이 되었듯. 세상의 모든 것들의 시간은 유한하니까, 그 순간순간의 농도와 채도는 돌아오지 않는다.


 결국 밤 같은 새벽이다. 곧 다른 하루가 시작될 시간. 눈 감았다 뜨면 정신도 조금 더 선명해지고, 손끝의 라즈베리 빛은 옅어지겠지. 빛이 사라지더라도 달큼함은 오래 남았으면 좋겠다. 괜히 엄청 달콤한 초코 도넛이 먹고 싶은 새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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