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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엽 Aug 01. 2024

모두를 아우르는 회색 지점

그레이바이실버 Grey by Silver

장르적 한계 없이 실험적인 공연을 보여준 그레이바이실버(Grey by Silver).


우리나라 고유의 정서인 ‘한’은 쉽게 번역하기 어려워 ‘Han’으로 쓰인다. 이 단어를 뭐라 꼬집어 설명할 수 있을까? 한반도에 일어난 여러 위기에도 삶을 포기할 수 없던 개개인의 끈질김을 연관 지을 수 있겠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개척하는 이들, 나의 후손만큼은 차별받지 않고 떵떵거리며 살 수 있길 바라던 다짐들. 살아생전 이승에서 맺힌 한이 풀리지 않아 혼이 구천을 떠돈다는 말이 있듯이, 삶을 단단히 지탱해 주는 것들에 대한 처절한 갈구가 이 정서의 근간이 아닐까?

 

사람들은 어둠 속 한 줄기 빛처럼 예술을 향유하며, 한 맺힌 삶을 승화하고자 노력해 왔다. 고된 노동을 조금이라도 달래기 위해 부르던 노동요가 그러했고, 나라 잃은 설움 또한 예술로 풀어내지 않았는가. 이렇듯 예술은 상류층이 누리는 특혜라고만 생각할 수 없는 것이 확실하다. 누군가에겐 고달픈 현실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가 되기도 하고, 피할 수 없다면 즐기겠다는 생각으로 풍자와 해학의 미학을 받아들이기도 했으니까. 그 때문에 예술이란 세계 안에서 감정을 분출하거나 정체성을 찾아가는 이들의 행보를 응원하며 나 역시 치유를 실현하고 있다.



한국 전통음악의 다양한 시도는 계속해서 이어진다. (사진=수림문화재단 제공)


민족이라는 단어의 재정립


그레이바이실버(Grey by Silver)는 피아니스트ㆍ작곡가 이한빈, 보컬리스트ㆍ작사가 이한율, 대금 연주자 김태현, 드러머 박예닮으로 이뤄진 순수 창작 음악 단체이며 이번 공연에서는 아쟁 김용성(협연)이 참여했다. 전통음악의 고유성과 현대음악의 독창성, 그리고 재즈의 자유로움과 클래식의 정교한 구조를 아우르는 균형점을 찾아내고자 노력하며, 다양한 장르를 관통하는 한국 음악의 새로운 흐름을 선보이고 있다.   

  

<민족의 노래>라는 제목은 지역과 인종, 문화의 구획을 나누는 의미로 ‘민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이름이 가진 의미처럼 세상 모든 색의 그림자가 회색이듯, 모두가 하나로 연결될 ‘연대’의 지점을 응시한다. 세계의 다양한 민족음악을 들어보면 각자가 가진 개성과 차별점이 있으나, 동시에 익숙한 동질성도 느끼게 된다. 다름을 통해 ‘새롭지만 익숙한 아름다움’에 초점을 맞춰 나가다 보면 균형을 이룰 수 있지 않겠냐며, 그레이바이실버는 음악 안에서 모두가 평화로운 시간을 누리길 소망한다고.     


현대적인 감각으로 가다듬은 국악의 신세계. (사진=수림문화재단 제공)


국악과 재즈의 융화

이토록 풍성한 순수 창작 음악  


무대로 들어서는 5인이 각자의 자리를 찾아가고, 짧은 인사와 함께 <다스름>을 연주하며 공연의 문을 열었다. 다스름은 국악에서 본격적인 곡을 연주하기에 앞서 속도와 호흡을 조절하기 위한 무박자의 짧은 곡조를 이르는 말. 이 즉흥연주는 순수한 언어의 기능으로 작용한다. 현장의 공기, 온도, 울림을 느끼고 조율하면서 그들만의 대화를 나누는 것인데, 그래서 다스름이 좋으면 해당 공연은 만족스럽다는 게 그레이바이실버의 정설이라고.     


문학과 음악으로 새롭게 창조되는 시간. 윤동주 시인의 <종달새>를 음악으로 확장한 무대에서는 연둣빛 조명으로 명랑한 봄을 연상시키는 반면, ‘고기 새끼’라는 단어에 무기력하고 비참한 자아를 대입한 화자를 생각하며 감상하는 것이 중점. 다음은 비운의 천재 김순남 작곡가가 김소월 시인의 시에 선율을 부친 가곡 <산유화>를 선보였다. 특히 이한빈은 김순남 작곡가 특유의 훌륭한 화성과 구조 형성 그리고 사람들이 따라 부르기 편하게 만들고자 노력했던 부분을 언급했다. 그레이바이실버의 창의적인 해석이 들어가 있어 선배 음악가에 대한 존경과 그들만의 지향점을 느낄 수 있었던 부분.      



국악의 매력은 동조할 수 있고 화합할 수 있다는 것.


국악과 재즈, 이 실험적인 교집합으로 만든 결과가 이렇게나 감각적일 수 있다니. 아이슬란드 여행 중 마주한 빙하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아이야>를 들으면서 알 수 없는 감정에 동요되었다. 눈이 시리도록 푸르른 빙하가 머릿속에 그려지면서도 역설적으로 포근한 따스함이 느껴지는 음악이었으니. 이국적인 분위기, 후반부 웅장하게 휘몰아치다 고요하게 마무리되는 부분에서 재즈적 뉘앙스가 강하게 느껴졌다.



리드미컬한 장단으로 팀의 중심을 잡아주는 드러머 박예닮. (사진=수림문화재단 제공)


아이슬란드 민요이자 자장가로 많이 부른다는 <VÍSUR VATNSENDA-RÓSU>, 낯설면서도 익숙할 수 있다는 묘한 인상을 받았다. 잔잔하다 거센 풍랑을 만난 듯 드럼 솔로가 펼쳐지고 나면 <뱃노래>가 꼬리를 물고 흘러나와 관객들을 매혹했다. 뱃고동을 떠올리게 하던 피리 소리, 보컬리스트의 흔들림 없는 소리와 풍부한 성량, 박자를 맞추는 숨소리가 기점이 되어 여러 악기가 의기투합하던 장면이란. 음악으로 뱃놀이하는 이들의 강한 에너지에 몰입해, 찌푸린 미간을 차마 펴지도 못하고 숨을 참아가면서 감상했다면 믿겠는지. 민요를 알고 있기에 어느 정도는 간과했던 나의 편견을 박살 내버린 경험.



깊고도 청명한 울림을 선사한 대금 연주자 김태현. (사진=수림문화재단 제공)


<Ancient Tree>는 삶과 죽음의 교차, 생태계가 순환하는 원시림을 그려낸다. 씨앗이 땅의 표면을 뚫고 발아하는 순간처럼 귓가를 두드리던 소리들. 평화롭고 잔잔해 보이지만 응축된 힘을 가진 자연은 모든 걸 품고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다. 이처럼 생명의 고리를 감각할 수 있던 곡.



아쟁 연주자 김용성이 공연의 게스트로 참여했다. (사진=수림문화재단 제공)


<진달래꽃>은 부드러운 강인함으로 표현된 만큼 경쾌한 드럼 소리와 피아노 그리고 아쟁이 융화되는 부분, 청아한 대금의 매력이 돋보였다. 까만 피아노에 비친 피아니스트의 손가락, 연주하며 내뱉는 허밍. 라벨이 떠오르기도 하던 피아노 독주의 순간도 강렬히 다가왔다.      



독창적인 음악만큼이나 남달랐던 그들만의 소통법, '바이노트'.


그레이바이실버 공연의 독특한 점 중 하나를 말하자면 일반적인 리플렛이 아닌 6공 다이어리 형식의 일명 ‘바이 노트’를 대여해주는 시스템. 아티스트 관련 정보 및 공연할 노래의 가사집, 관객의 생각을 기록할 수 있는 메모 용지로 구성되어 있었다. 멤버 이한율이 수작업으로 만들고 있다는데, 한번 쓰이고 버려지는 리플렛 대신 그들이 쌓아온 생각과 앞으로 쌓일 생각을 담아나갈 예정이라고. 더불어 공연을 본 관객의 감상까지 이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전했다. 이 정성스럽고 기발한 아이디어에 구매해 가는 관객이 있었을 정도.



바이 노트에 소소한 감상평을 남기면서 공연의 여운을 느껴봤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이번 공연의 앙코르곡이었던 <가시나무>의 가사처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너무나도 많은 자아 충돌로 힘겨워하며 살아간다. 점점 더 예측을 벗어나겠다는 듯, 늦장 부리다 찾아온 장마. 공연이 끝나고 난 뒤, 하늘을 뒤덮은 회색빛 먹구름은 은빛 빗방울을 떨어뜨리며 세상을 빗소리로 가득 채운다. 그레이바이실버가 음악을 통해 전달한 메시지를 곱씹으며 다시 한번, 그들의 질문을 되새겨본다. ‘과연 우리는 어떤 민족입니까?’


앙코르곡 <가시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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