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림 공동기획 시리즈 NUDGE 조훈 《Acculturation 求音》
김희수아트센터 건물 앞에 도착해 내부로 들어서기 전, 문에 붙어있던 포스터를 보고는 잠시 멈춰 섰다. 징을 닮았으면서도 빙글빙글 돌아가는 ‘운명의 수레바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78장의 타로 중 10번 카드인 운명의 수레바퀴는 통제 불가한 운명의 힘에 대해 이해하고 수용하면서, 진정한 자유를 찾는 과정을 표현한다. 다양한 생명체가 수레바퀴 안에서 순환하고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면서 인생의 불확실성과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 포인트. 포스터 속 푸른색과 붉은색이 나선형으로 섞여 들어가고 있는 건 무얼 말하고 있을까?
《Acculturation 求音》 공연에는 작곡가 조훈을 필두로 전자음악과 사운드 디자인의 박세찬, 거문고 연주자 황혜영, 대금 연주자 임정민의 시너지 있는 무대가 펼쳐졌다. 영어와 한자가 섞여 있는 제목 자체가 동서양 융합에 대한 힌트. 제목을 쉽게 풀어보자면 ‘동서양 문화접변 안에서 새로운 소리를 탐구한다’는 의미라 생각하면 된다.
문화 접변(Acculturation)은 서로 다른 두 문화 체계의 접촉으로 문화 요소가 전파되어 새로운 양식의 문화로 변화되는 과정 혹은 결과를 말한다. 체계의 유사성이 높아진다는 특징이 있는데, 이를 두고도 자발적이냐 강제적이냐 나눌 수 있겠다.
유달리 좋아하는 장르는 있지만, 특정 장르를 따지면서 음악을 듣는 쪽은 아니다. 장르에 상관없이 들었을 때 직관적으로 좋으면 그게 곧 취향이 되는 편이라서. 취향으로 급을 나누는 사람들이 있기도 하던데, 그런 생각이 스스로를 가두는 것 아닌지. 한국 전통 음악, 서양 음악, 월드 뮤직, 전자 음악의 다양한 요소가 한데 뒤섞인 혁신적인 시도가 지속되길 응원한다. 작은 시도 하나하나가 저변의 확대를 가져올 테고, 낯선 건 잠시니까.
바깥은 거세게 비가 내리고, 어둡게 깔리는 조명이 본격적인 공연의 시작을 알린다. 첫 번째 곡은 이중언어성을 뜻하는 <Heteroglossia>. 조훈의 유려한 피아노 연주가 도입부 분위기를 그려나간다. 이어 대금과 거문고가 합류하면서 스산한 기류를 형성. 피아노와 다른 악기들의 박자를 각기 다르게 연주하면서 제목이 뜻하는 바를 표현했다. 음악과 조명으로만 연출된 무대는 관객에게 자신만의 심상을 그려나가길 제안하는 것 같았다. 문득 이 공간 자체가 영화관 같다는 즐거운 상상. 붉은 조명을 받은 무대 벽면은 아무것도 없지만, 관객 각자의 상상에 맡긴 영화가 재생되고 있을 것만 같아 즐거웠다. 나의 머릿속에는 어쩐지 비에 젖은 고택이 떠올라 오컬트 영화 한 편 뚝딱.
두 번째 곡 <Humor and Laughter>. 핀 조명이 거문고 연주자를 유일하게 비추면, 여백감 있는 거문고 소리가 존재했다가 여운을 주고는 사라진다. 이어 전자음이 들려오면서 빨라진 거문고와 피아노 소리가 얽혀들기 시작했는데, 각자의 세계 안에서 따로 노나 싶다가도 결정적 순간에는 맞아떨어지는 게 독특했던 부분. 어긋날 때는 이렇게까지 서로 어긋날 수가 있나 싶어 난해하다는 느낌이 없지 않았다. 유머와 웃음은 사람들이 서로 소통하기 위한 중요 요소라 생각한다고. 그래서 리듬이 충돌하는 폴리와 프레이즈를 가져와 소통의 과정을 그려낸 것 같았다. 리플렛에 나온 프로그램 순서대로 진행되지 않았던 지라 초반엔 정말 아무 정보 없이 2곡을 연달아 들었다. 어떤 제목일지 혼자 추측하면서 들어봤는데, 하나도 맞추지 못했다네요. 정말 예측불가한 음악이었다. 음악을 먼저 들려주고 나서 설명을 붙여주었기에 느껴본 소소한 재미!
연잎 위를 굴러다니는 물방울처럼 손가락이 건반 위를 활보한다. <Experience>의 도입부에서 재즈적 감성이 물씬 풍기는 피아노 솔로가 듣기 좋았다. 그러나 잘 다듬어진 듯한 구간이 계속 진행될수록 고상한 분위기 안에 든 알맹이가 뭘까란 의문이 자꾸 들었다. 그 이후로는 조금 더 과감해지더니 청자에게 계속해서 새로운 경험을 제시하는 것 같았던 느낌. 사실 이 곡엔 협화음과 불협화음의 경계를 넘나들며, 어느 지점까지 우리가 듣기 편하다고 허용할 수 있을지 실험하는 과정이 담겨있었다.
<Space>에선 ‘타르륵- 타르르륵-’ 거문고 괘를 술대로 긁는 소리가 은근한 쾌감이 있었다. 현악기면서도 타악기 소리를 낼 수 있다는 부분이 거문고의 색다른 매력이라고 느꼈는데, 어쿠스틱 기타의 울림통을 손바닥으로 두드리는 기법이 있는 것과 비슷한 느낌. 대금이 분위기를 한번 환기하는 부분에서 좋은 인상을 받았다. 고음역에선 플루트와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특정 구절의 반복성이 있어 듣기 불편하진 않았다. 브릿지에 쓰인 하모니는 우리에게 익숙한 K-pop 하모니를 삽입했다고.
공연의 막을 내리며 기존 흐름을 깨는 전자음과 빠른 속도에 따라붙는 피아노, 가볍고 경쾌한 EDM 진행에 발을 구르며 거문고를 뜯는 모습들이 활기차게 다가왔다. 격정적이던 거문고와 짧고 굵은 대금의 소리가 시공을 꿰뚫는 것 같았던 느낌. 바르작대며 잔 박자를 유지하던 전자음이 여운을 남기며 끝. 모스 부호처럼 깜빡거리며 빙그르르 무대 곳곳을 돌아다니던 불빛은 긍정적인 가능성의 신호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