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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엽 Oct 23. 2024

느리지만 또렷한 밑줄 긋기

수림뉴웨이브 2024 박우재 거문고

예술가에겐 일상이지만, 관객에겐 비일상인 모습과 이야기를 무대에 올려놓으니 참신하게 다가왔다.

평소 연습하던 모습 그대로 케이스 채로 악기를 들고 빈 무대에 등장한 박우재 연주가. 주섬주섬 연주에 필요한 물건을 꺼내놓는 모습부터 편하게 그가 하는 말들을 듣고 있었는데, 이러한 진행 방식이 새롭게 다가왔다. ‘이런 것까지 다 이야기해 준다고?’ 싶을 정도로 미주알고주알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더니 20년 된 물건과 7~8년 전 지인에게 선물 받은 파우치까지 소개해 주는 모습에 그의 일상 한 부분을 현장에 전시하는 느낌이라 감사했다. 격식을 차리다 따분함이 맴도는 공연장보다는 사람과 사람, 단지 음악이란 매개체를 통해 서로가 소통하는 자리였다는 느낌이 강하게 다가와서 좋았다. 



독창적인 주법의 발견


박우재 연주가가 활을 들고 독자적인 연주법을 만들어온 과정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수림문화재단 제공)

이색적인 인도음악, 그중에서도 지속음을 말하는 드론 요소에 빠져있던 어느 날 악기 고정 방법을 찾다가 지금의 독창적인 방식을 고안하게 되었다고. 그의 독특한 연주법은 거문고의 좌우 방향을 반대로 놓고 술대가 아닌 활로 연주하는 식이다. 여기서 비올라 활을 사용하는데, 바이올린 활보다는 더 두꺼운 소리를 낸다고. 구하기 쉬운 아쟁 활은 구수한 소리를 내기 좋지만 여리고 섬세한 소리를 내기엔 한계가 있었으며, 첼로 활은 활대가 너무 짧아 적합하지 않았다는 다양한 시도의 과정을 그의 입을 통해 직접 들을 수 있었다.

 

동서양 요소가 혼재된 연주법으로 듣는 음악은 아름다웠고, 현대적인 세련미가 있었다. 이는 정석적인 거문고 연주 방식이 아니다 보니 거문고라 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고구려 악기인 거문고의 타악기적인 인상을 뛰어넘어 현악기 특성이 도드라졌다는 점, 기존 질서와는 다를지라도 새로운 향유의 관점을 제시한다는 부분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거문고에 빠져들 시간


거문고의 방향을 반대로 두고 활을 사용해 거문고를 연주하는 모습. (사진=수림문화재단 제공)

《혼자서 천천히 나나》라는 공연 제목에는 큰 의미가 있진 않고, 말 그대로 혼자서 천천히 본인만의 속도로 나아가는 모습을 뜻한다. ‘나나’라는 어감이 귀엽기도 한데, 지나간 나와 지금의 내가 미래의 나를 맞이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좋을 듯하다. 중학생 시절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 부르고 노는 모습을 본 부모님의 권유로 거문고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친구 어머니가 쓴 시집 『나무가 나를 찾아오는 날에는(배교윤 시인 산문집)』에 수록된 「무화과」라는 시는 첫 번째 연주곡 <나나>의 메인 선율 모티브가 되었다. 시에서는 세상에 가치 없는 삶은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독백과 같은 연주가 독특하면서 간결한 느낌을 주고 있어 소개해 준 시를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우재, 박지하 작곡의 <육박십분>이란 원곡을 수림뉴웨이브 공연에서 <번짐>이라는 독주곡으로 선보였다. 물들고, 짙어지고, 옅어지는 등 화선지에 먹물이 퍼져가는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웅장한 듯 모던한 뉘앙스에 잘게 떠는 연주 부분이 인상적이었고, 줄을 꼬집는 손과 특히 크게 활을 휘두르며 곡을 마무리 짓는 부분이 기억에 남았다. 


수림뉴웨이브 2024에서 박우재 연주가는 정석적인 거문고 연주까지 선보였다. (사진=수림문화재단 제공)

마지막 곡 <점>에선 처마 아래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기타 소리를 떠올리게 하는 맑고 깨끗한 음이 듣기 좋았다. 줄을 동시에 퉁기며 음을 내고, 술대로 긁어 울림을 인다. 신비로우며 고루하지 않은 소리는 강약 차이로 리듬을 만들고 선율을 그려낸다. 중반부터 빨라지는 박자 너머 현대적인 감성이 관통하니 즐겁게 들었다. 

 


그만의 밑줄을 그어가는 중


평소 즐겨 듣는 음악에 대해 질문한 관객과 대화 중인 박우재 연주가.

트럼펫을 전공했던 수림문화재단 예술사업부 홍민경 PD의 질문과 박우재 연주가의 이야기 그리고 관객의 궁금증이 상호작용을 하는 과정을 들여다보는 것이 흥미로웠다. 이날 서성협 작가가 참석해 간략한 무대디자인 작품에 대한 이야기까지 들어봤다는 점! 거문고 연주가 박다울과 작업했던 소리병풍에 이어 유사병풍까지, 벌써 하반기 3회차에 접어든 수림뉴웨이브 공연인데도 관람할 때마다 작품이 멋지다는 생각은 사그라지지 않는다.

 

관객과의 대화를 이어가다, 술대(전통)와 활(창작) 중 어느 것으로 연주하는 게 더 좋냐는 질문은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는 짓궂은 질문과 다를 바 없다는 말에 모두가 웃을 수밖에 없었다. 활 연주법은 전승 기회가 있다면 흔쾌히 가르칠 생각이 있지만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아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없다는 아쉬움 섞인 말을 남겼다. 이 글을 본 누군가가 도전해 보기를 바라며! 

 

다음 음악 활동을 묻던 팬이 “용기를 내보세요.”라며 단호하고도 응원 섞인 한마디를 던졌는데, 이 말이 어찌나 유쾌했던지 개인적인 유머 코드를 저격했다. 응원에 힘입어 박우재 연주가의 다음 음악 활동이 조금 더 서둘러지길 모두가 염원하고 있진 않을까? 박우재 연주가의 ‘진화는 목표 지향적 성장이 아니라 다양성의 증대’라는 문구에 공감하면서 이날의 담백했던 공연 감상 기록을 남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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