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림뉴웨이브 2024 송보라 판소리
씩씩한 걸음걸이에서부터 장군의 기운이 느껴지는 호방한 여인이 무대에 등장한다. 걸걸한 목소리와 한 손엔 부채, 성역 없는 개량 한복 차림에 캐주얼한 스니커즈라니. 소리꾼 송보라에 대한 첫인상은 호걸이다.
'해주 원주 공주 옥구 ···'하는 노래를 듣게 된 9살 송보라는 판소리에 빠져들었고, 호기심이 많던 그는 동네 언니를 따라 갔던 연기 워크숍 청강으로 연기에 흥미를 느꼈다. 이야기를 풀어내는 창작자이면서도 무대에 서서 관객들을 만나는 소리꾼 겸 배우라는 지금의 송보라가 있기까지. ‘창작하는 타루’의 단원이자 화석으로 통한다는 그는 사람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눠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오늘도 자신만의 길을 가고 있다.
호탕한 웃음 소리를 내보인 송보라는 평소 지인들 사이에서 건강전도사로 소문이 났다고 하는데,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소소한 목상태 관리 꿀팁을 전하며 관객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스스로 “얼씨구!” 하는 추임새로 시작했던 그의 무대는 어느덧 추임새 없이 허전할 정도로 관객 호응으로 채워졌고, 온기가 도는 분위기 속에서 막을 내릴 수 있었다.
쿠션처럼 푹신했던 추임새
보성소리 적벽가 중 군사설움 대목
수림뉴웨이브 2024 송보라 공연은 전쟁을 주제로 어려운 한자어와 고사성어가 많아 어렵게 다가오는 전통 판소리 <적벽가>, 그중에서도 주된 이야기가 아닌 이름 모를 군사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군사설움 대목으로 출발했다. 한자어가 적어 듣기 편한 대목이고, 여전히 전쟁의 공포가 사라지지 않은 현재에 사소한 일상의 소중함은 무엇인지 익살스러운 연출로 전달하고 있었다. 목 상태가 좋지 않았던지 시원하게 소리가 터져나오지 못한 부분들이 아쉬웠지만 그 누구보다도 아쉬운 것은 목이 메인 본인이었을테니 안타까웠던 마음. 이에 동요하지 말라는 듯 객석에서 추임새가 연달아 터져나올 때 묘한 감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렇게 관객들과 눈을 맞추며 공연을 이어가는 모습과 고수의 “그렇지!”하는 추임새가 상응하며 긴장감 도는 첫 번째 공연이 끝이 났다.
화개장터같은 소리극
햄릿, 혼잣말 중에서
여성 햄릿과 남성 오필리아, 전라도와 경상도 사투리가 공존하는 무대라니. 동서양 요소가 혼재하다 못해 무구까지 나온다. 소리극 <햄릿, 혼잣말>에는 쉽고 재미있게 햄릿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는 고민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박선희 연출가의 재해석이 돋보인 이 작품은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소리꾼 송보라와 경상도 사투리로 추임새를 넣는 고수 최효동 덕분에 말맛이 좋았던 데다가 1명의 소리꾼이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이야기를 전달하기도 하고, 때론 햄릿 시점에서 그의 내면을 관객들에게 직접 들려주기도 하면서 몰입하기 좋은 순간들을 만들어냈다. 약간 가미된 욕설은 극의 몰입을 위한 조미료였어서 크게 거부감이 들진 않았다. “햄릿아~”라고 말하는 부분에선 마치 영화 <미나리> 속 순자 역의 윤여정 배우가 손주 데이빗을 친근하게 부르던 장면이 겹쳐 보이기도.
이 무대가 흥미로웠던 부분 중 하나는 미친 사람처럼 연기하며 주변인을 단절하던 햄릿이 오필리아에게 이별을 고하는 장면을 다룬다는 것이다. 여성인 햄릿이 남성인 오필리아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퍼붓는데, 이 말 속에 성녀와 창녀의 경계를 나누는 남성 위주의 구시대적 관점이 드러난다. 젠더프리 작품이라 꼬집어지는 부분들이 날카로운 풍자의 맛을 주었다는 점. 거기다 즉흥적으로 남성 관객에게 오필리아 역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는데, 이날의 오필리아는 제안받지 않았으면 서러웠을 정도로 역할에 충실한 표정과 행동 연기를 보여줬다. 예상보다 더욱 공연의 즐거움을 더해주었다는 후문이..!
“사는 것이 뭔지, 죽는 것이 뭔지, 개뿔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아. 흔들리지 마라. 흔들리지 말어!”라는 햄릿의 고뇌가 담긴 부분은 원작 대비 구수한 표현이 강렬한 감정을 도드라지게 하는데 효과적이었다는 생각이다. 마지막 장면으론 결투장에서 복수를 성공하는 햄릿을 보여주는데, 객석 1열 코앞에서 바닥에 쓰러진 복수 대상의 가슴께를 칼로 찌르고 난 후 햄릿이 뱉은 대사가 어쩐지 시큰하고 깊숙하게 마음에 스며들었다. “니 참 애 많이 썼다.”라는 강한 여운을 남긴 대사, 여기에 턱하고 숨을 멈춘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