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대흥사 ‘유선관’
얼마 전 어쿠스틱 기타를 사러 낙원상가를 갔다. 나보다 연주도 잘하고 기타에 대한 지식도 풍부한 친구와 함께였다. 여러 숍을 전전하다가 다양한 기타 브랜드를 갖춘 한 상점을 집중 공략했다. 사장님에게 예산과 관심 있는 브랜드를 제시했다. 중 2 때부터 기타를 친 나도 실력에 비해 꼼꼼한 편인데 친구는 피아노 조율사처럼 예민한 귀를 가졌다. 10대가 넘는 기타를 테스트했다. 딱 이거다 싶은 기타가 없었다. 전부 성에 안 찼다. 우릴 지켜보던 사장님이 한 마디 하셨다. “이분들이 예산은 50만원이라면서 귀는 150만원이네. 거 참.” 친구와 나는 멋쩍게 웃었다(사장님, 정확하시군요).
기타에 관심이 없는 아내도 이 날 낙원상가를 따라왔다. 사장님 말씀을 듣고는 너무 통쾌해했다. 아마, 본인이 하고픈 말을 대신 해줘서 일 테다. 그리고 얼마 전, 남도 여행을 가서 그 멘트를 응용해 내게 던졌다. “당신은 7만원짜리 숙소 가면서 눈높이는 50만원, 60만원이야.” 정곡을 찔린 나는 괜히 혀를 날름거렸다.
7만원짜리 그저 그런 숙소에서 하룻밤을 묵고 땅끝 마을, 전남 해남으로 이동했다. 나는 숙소에 민감한 편이다. 출장을 많이 다녀서인지 가성비를 많이 따진다. 아내는 조금 다르다. 소비 습관이 헤픈 건 아니나 비용을 더 쓰더라도 제대로 된, 검증된 숙소를 선호한다. 그래서 숙소 때문에 여행 중 아웅다웅한 적이 꽤 있는데 어떤 숙소는 둘 다 퍽 좋아해서 두 번 이상 방문하게 된 곳도 있다.
해남 유선관이 그중 하나다. 올해 3월 초에 갔고, 두 달만에 또 갔다. 유선관은 두륜산 대흥사 안에 자리한 숙소다. ‘한국 최초의 여관’으로 알려졌다. 약 100년 전에 지어 수도승이나 신도가 머무는 객사로 쓰던 한옥이었는데 1970년 깨 여관 영업을 시작했단다. 임권택 감독이 이곳에서 ‘서편제’, ‘장군의 아들’ 등을 촬영했고,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소개하면서 유명해졌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천년고찰 속 여관이라는 사실만으로 훌륭한데 유선관은 최근 드라마틱한 변화를 맞았다. 2021년 ‘한옥 호텔’로 탈바꿈했다. 구들장에 오방색 요 깔고 자는 대신 푹신한 침대를 뒀고 불편한 공용화장실 대신 각 객실 안에 화장실을 만들었다. 건물 뼈대는 거의 그대로 두고 낡은 느낌의 현판도 남겨서 100년의 시간이 어우러지도록 연출했다.
대흥사는 스물한 살 무렵, 군 입대를 앞두고 친구들과 남도여행을 하며 들른 뒤 한참만이었다. 사찰 자체보다 절집 가는 길이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한겨울인데도 춥지 않았고 이끼 낀 삼나무와 시뻘건 동백꽃이 바닥에 나뒹굴던 길. 어두침침한 숲길은 소실점이 저 멀리 있어서 피안으로 천천히 빨려드는 기분이 들었다. 진짜 땅끝에 왔구나, 실감했다.
대흥사 매표소에서 절 방향으로 2km 들어가니 유선관이 나왔다. 차를 세워두고 절 쪽으로 걸었다. 20여년 전처럼 만개한 동백꽃을 보진 못했어도 한겨울에도 진한 녹색으로 농밀한 숲의 기운만은 여전했다. 도톰한 이파리가 반들반들한 동백나무를 비롯해 쭉쭉 뻗은 삼나무와 편백이 우거진 숲은 떠나온 서울의 칙칙한 겨울 풍경과 극적으로 대비됐다. 3월에도 5월에도 유선관에 머물며 가장 많이 한 일, 아니 거의 유일하게 한 일은 산책이었다. 숲에서 깊이깊이 숨을 들이켜고 새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시린 가슴이 덥혀지고 허한 마음이 채워졌다. 딱새, 박새, 직박구리, 물까치. 집 근처 남산에도 사는 친구들이지만 따뜻한 남쪽 깊은 숲에서 녀석들은 더 활기차 보였다.
산책을 안 할 땐 뭘 했을까? 해 질 무렵이면 송호리 해변으로 가서 낙조를 보고, 밤마다 별을 본 게 전부였다. 두륜산에 왔으면서 케이블카도 안 탔고 인기 관광지는 거들떠도 안 봤다. 부러 유명 식당을 찾지도 않았다. 나나 아내나 먹는 데 목숨 거는 부류가 아니어서 주로 8000~9000원짜리 백반을 먹었다.
유선관에 새로 생긴 시설도 있다. 바로 스파. 한옥 안에 두 명씩 이용할 수 있는 욕조가 있는데 계곡 전망이 기막히다. 아무도 지나다닐 수 없는 방향으로 문을 내서 물소리, 새소리 들으며 반신욕을 한다. 겨울에는 시원한 바람 쐬면서 노천욕의 기분을 만끽했다. 5월에는 눈부신 신록을 보는 게 좋았다. 몸이 뜨거워지면 전실로 나가서 자연인처럼 팔을 벌리고 바람을 쐤다(진짜 아무도 못 봤겠지?). 스마트폰으로 ‘스파 음악’을 찾아 들으며 아내와 키득거리기도 했다. 일본 료칸이나 발리의 마사지숍에 온 기본이 들었다.
여행 중 숙소에 갈 때마다 예민해진다. 아쉬운 부분을 지적하고 부족한 서비스를 투정하는 습관이 생겼다. 숙박비가 비싸면 불만은 더 커진다. 늘 싼 것만 찾는 것도 아닌데 고약한 습관이 생긴 것 같다. 아마 여행을 많이 다니면서 적절한 가격으로 좋은 숙소를 찾는 재미에 취한 건지도 모르겠다. 정작 성공률이 아주 높지도 않으면서, '내가 이렇게 여행에 능숙한 사람이야'라는 이상한 자아도취가 있는 것도 같다. 이런 것도 '전문가의 함정'이랄 수 있을까. 숙소든 여행이든 있는 그대로 편한 맘으로 즐기지 못할 때가 많다. 영화 '태풍이 지나가고'에 "왜 남자는 현재를 사랑할 수 없을까"라는 대사가 나오는데 딱 나를 두고 하는 말 같다.
한데 두 번의 해남 여행은 그렇지 않았다. 편한 마음으로 쉬었다. 숙박비가 싸지 않은 유선관도 트집거리가 없진 않았다. 그러나 뭔가 아쉽거나 아깝다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 왜일까. 아마도 겨울에도 진초록 나무가 가득한 숲, 난대수종이 가득한 이국적인 숲을 마음껏 누릴 수 있어서일 테다. 해변 휴양지에 가면 ‘프라이빗 비치’를 가진 호화 숙소가 있는데 유선관은 ‘프라이빗 포레스트’를 가진 셈이다. 숙소 주변을 자세히 보니 단풍 수종이 많았다. 깊은 가을, 스파에서 내다보는 울긋불긋한 숲은 어떨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