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러닝으로 두드러기까지 극복한 사연
한해의 절반이 지나갔다. 벌써, 라는 느낌은 안 든다. 더위와의 사투가 끝나고 아침 공기가 차가워져야 비로소 어떤 시기가 저물고 기운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인정하기 싫은 심사일 수도 있겠다. 쏜살같이 여섯달이 흐를 테고 그러면 회한에 잠겨 한 해를 돌아볼 때가 오리라는 걸. 어쨌거나 상반기를 돌아보니 언제나처럼 이룬 건 딱히 없고 나란 인간도 그냥 그대로인 것 같다. 그래도 뭐라도 잘한 게 있지 않나 생각해보니 두 가지를 열심히 하긴 했다. 달리기와 기타 치기.
먼저 기타. 중 1 때 처음 통기타를 잡고 30년을 딩가딩가했다. 교회에서 반주도 했고, 대학 때는 록밴드를 결성해 클럽에서 공연도 뛰었다. 제대로 배워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독학과 어깨너머로 배운 게 전부였다. 펜데믹 시기, 기타를 다시 쳐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고로 일렉기타를 샀다. 역시 독학으로 기타를 퉁겼지만 실력이 늘 리가 있나. 벽을 넘고 싶었다. 그래서 난생처음 기타 학원을 찾아갔다. 한 달을 배웠다. 왜 진작 학원 문을 두드리지 않았던 걸까. 실력이 느는 건 둘째치고 동기 부여가 확실하다는 점에서 만족하고 있다. 자세한 얘기는 다음에.
달리기는 작년 여름부터 시작했다. 해방촌으로 이사 온 뒤부터다. 그전에 살던 성수동은 평지인 데다 서울숲공원과 한강이 지척이어서 완벽한 조건을 갖췄는데도 달리지 않았다. 몇 번 시도는 해봤다. 그러나 지병 때문에 포기했다. 일상생활에 지장은 없는데 달리기만 하면 도지는 질환이 있었다. 콜린성 두드러기. 30대 중반 이후 발병했다. 축구나 농구 같은 격한 운동을 하거나 자전거 타고, 등산하면서 땀을 흠뻑 흘려도 괜찮은데 이상하게 달리기만 하면 온몸이 가렵고 일시적 발진이 일어났다. 특히 건조한 가을, 겨울에 심했다. 그래서 딱 한 번 서울숲을 달린 뒤 마음을 접었다.
해방촌으로 이사 왔을 때는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시기였다. 계속되는 재택근무 탓에 긴장감이 풀어졌다. 허리둘레가 한없이 커지는 ‘확찐자’가 된 건 아닌데 뇌와 정신 상태에 지방이 끼는 것 같았다. 운동으로라도 일상에 탄력을 줘야 할 것 같았다. 집앞에 남산이 있지만 등산으로는 성이 안 찼다. 빨리 걸으면 집에서 타워까지 40분이면 도착하니까.
그래서 러닝을 시작했다. 여름에는 두드러기 발진이 적어 일단 도전해보기로 했다. 남산 반대쪽으로 코스를 잡았다. 집에서 미군 부대를 끼고 녹사평역을 지나 전쟁기념관을 찍고 돌아오기. 거리는 3km가 조금 넘었다. 갈 때 한 번, 올 때 한 번 약간 경사가 있었다. 평지 3km를 뛰는 것보다 힘이 들지만 그래서 재미있었다. ‘나이키 런’ 앱에 담긴 기록과 전쟁기념관 탱크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나도 해봤다. 나이키런!!”
처음엔 안 쉬고 한 번에 뛰기 어려웠다. 두드러기 때문에 달리다가 멈춰서 몸을 박박 긁기도 했다. 한데 신기하게도 달리기를 반복할수록 가려움증이 사그라들었다. 두드러기가 가장 심한 겨울에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호전됐다. 큰 상을 받은 것처럼 순간적으로 큰 감격이 들진 않았지만 뿌듯했다. 새치가 조금씩 나는 자타공인 아재가 된 뒤에 뭔가를 이런 식으로 극복해낸 경험이 처음인 것 같았다. 만성질환을 운동으로 이겨내다니!!!
조금씩 목표를 올렸다. 안 쉬고 뛰기, 거리 늘리기, 속도 높이기. 작은 도전을 하고, 그걸 이뤄나가는 과정이 좋았다. 전쟁기념관 쪽 코스가 지루하다 느껴질 때는 남산 둘레길을 뛰었다. 둘레길 도착할 때까지 경사가 상당해서 중간중간 걷기도 하지만 남산을 달리는 맛은 차가 쌩쌩 달리는 인도를 달리는 것과 비교할 수가 없다. 눈이 시원하고 마음은 산뜻하다. 코스를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다는 것도 큰 매력이다. 처음엔 경사 변화가 크지 않은 야외식물원 쪽을 빙빙 돌았는데 요즘은 훨씬 가파른 남산공원길을 달린다. 기분이 내키면 산 정상까지 뛰기도 한다. 아직은 심장이 터질 것 같고 지구력도 딸려서 논스톱으로 뛰진 못한다. 그래도 좋다. 마라톤 완주를 수시로 하는 사람들이 비웃는대도 상관없다.
달리기를 하면서 무엇보다 좋은 건 동네에 애정이 생겼다는 거다. 사실 해방촌에 와서 뛰기 시작한 건 이 동네에 정을 붙여보려는 발버둥이었다. 밤이 되면 술 취한 사람과 오토바이 소음으로 어수선한 동네, 불법 주차와 쓰레기 투기로 인상이 찌푸려지는 동네, 이웃 간에 정이 없는 동네, 핫플은 많아도 싱싱한 채소 파는 가게 하나 없는 동네… 해방촌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으라면 몇 페이지라도 가능했다. 최근 티빙에서 이효리가 주인공으로 출연한 ‘서울 체크인'을 봤는데 배우 구교환과 그의 여친 이옥섭 감독이 나온 편을 인상적으로 봤다. 이 감독은 미운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든 그 사람의 귀여운 구석을 보려고 한다, 그러면 밉지 않게 된다,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러닝을 열심히 하는 것도 비슷한 거였다. 달리면 달라 보인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남산이 있어서, 라일락 꽃향기 진한 미군부대 담벼락을 끼고 달릴 수 있어서 행복하다는 생각이 마음 한편에서 피어난다. 동네가 싫고 사람이 지겨워질 때면, ‘이따 나가서 뛰고 오자’. ‘일단 자고 내일 아침에 달리자’ 이런 식으로 마음을 달랜다.
원래는 자전거를 사려고 했다. 남산 갈 때마다 수많은 자전거족을 마주친다. 오르막길에서는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는 사람들, 내리막길에서는 세차게 질주하는 사람들을 보며 나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자전거 모델까지 봐 뒀는데 마음을 접었다. 왜? 남산에서는 자전거를 일방통행으로 타야 한다. 그러면 집에서 국립극장까지 이동한 뒤 올라야 하는데, 거기까지 가는 게 엄두가 안 난다. 자전거 산행은 해보고 싶지만 인도와 차로를 번갈아 헤쳐가며 자동차 경적음을 견디며 생고생을 하고 싶진 않았다. 결정적으로 달리기의 재미에 빠져 굳이 페달을 밟을 필요가 없어졌다.
해방촌에 이사 와서 사계절을 지나 보니 달리기 좋은 계절, 나쁜 계절은 따로 없는 것 같다. 봄은 날씨가 가장 좋은 계절이긴 하지만 꽃구경하느라 자꾸 서게 된다. 여름은 샤워하기 전 땀을 흠뻑 흘릴 수 있어서 좋다. 산에서 멈추면 모기에 물리니 쉬지 않고 달려야 한다는 것도 장점이다. 가을도 봄과 비슷하다. 단풍이 황홀하긴 한데 자꾸 멈춰서 사진을 찍게 된다. 겨울은 영하 10도 이하면 달릴 의지가 발동하지 않지만 꾸역꾸역 나가면 기분이 쾌청해진다. 이렇듯 계절마다 장단점이 있다. 나쁘기만한 계절은 없다. 긍정주의자는 아닌 나를 달리기가 좀 바꿔준 듯 싶다.
다시 생각해본다. 그래도 달리기 가장 좋은 달은 확실히 꼽을 수 있겠다. 바로 5월. 벚꽃 다 지고 남산에 나들이객이 줄어드는 시즌. 찔레꽃, 때죽나무꽃, 아카시아꽃 향기가 온 산에 진동할 때 달리면 다른 차원의 세계로 이동해서 꿈길을 나는 것 같다. 열 달을 기다려야 그 황홀한 기쁨을 맛볼 수 있다. 그때까지 꾸준히 달리며 여름, 가을, 겨울도 귀여워 해줄 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