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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 Apr 13. 2023

벚꽃비 맞으며 경주를 달리다

인생 첫 하프마라톤 도전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을 한 달 앞두고 열린 중국과의 평가전에서 부상을 당한 황선홍 선수의 심정이 이랬을까. 벼르고 별렀던 경주벚꽃마라톤을 앞두고 말도 안 되는 사고를 당했다. 일찌감치 마라톤 참가를 신청했고, 겨울부터 꾸준히 페이스를 올리며 체력도 키웠다. 한데 대회 일주일 전, 헬스장 탈의실에서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187g 무게의 아이폰이 가슴 높이에서 낙하해 직각으로 오른쪽 엄지, 검지 발가락을 가격했다. 하필 맨발이었다. 아무도 없는 탈의실에서 주저앉아 ‘흐읍, 크윽’ 하고 속으로 먹어 들어가는 비명을 질렀다. 고통스럽기도 했지만 마라톤 생각부터 나서 부아가 치밀었다. 이런 멍충이.


정형외과를 찾아갔다. 뼈가 부러지진 않았기에 약효가 센 진통소염제를 처방받고 간단한 물리치료라도 받을 작정이었다. 의사 선생님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며칠 잘 쉰 뒤에 달리기… 괜찮겠죠?”

“아이고, 무슨 말씀을. 발가락 염좌는 회복이 더뎌요. 2~3주는 푹 쉬세요. 반깁스도 하시고요.”

시무룩한 기분을 안고 병원을 나섰다. 당장 순천으로 출장도 가야 하는데, 드넓은 순천만 정원을 걸어다니며 취재는 할 수 있으려나. 마라톤도, 경주 여행도 취소하려고 했다. 마라톤 주최 측에 물으니, 참가비 환불이 안 된다고 했다. 숙소도 환불 불가였다. 일주일 지내보고 상태가 괜찮으면 조심조심 5km나 10km 코스를 뛰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순천 동천 벚꽃길

의외였다. 회복 속도가 빨랐다. 순천 출장 중 하루 2만보를 걸었는데도 발가락이 괜찮았다. 하프 마라톤도 괜찮을 것 같았다. 시험 삼아 순천에서 7~8km 거리를 달려봤다. 무엇보다 순천의 벚꽃이 너무 아름다웠고, 동천변을 따라 산책로가 기막히게 조성된 걸 보고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른 아침, 분홍빛 터널을 이룬 동천변을 달렸다. 발가락이 안 아팠을뿐더러 숨도 별로 차지 않았다. 사선으로 비치는 볕을 받아 더 진한 분홍빛을 띠었던 벚꽃길이 동화 같았다. 됐다. 뛸 수 있겠어.

벚꽃잎으로 덮인 보문정 연못.

대회 하루 전인 3월 31일, 아내와 함께 경주 보문단지에 입성했다. 자못 비장했다. 커피를 마시고, 보문호와 보문정을 산책했다. 벚꽃축제 기간인데도 경주 벚꽃은 절정이 지난 상태였다. 재작년과 작년 이맘때에도 경주를 왔는데 올해는 개화가 일주일 이상 빨랐다. 경주만이 아니었다. 올봄은 정말 기이했다. 벚꽃축제로 유명한 경남 창원과 서울의 벚꽃이 거의 동시에 피었다가 졌다. 늘 하던 대로 벚꽃축제 일정을 잡았던 지역 중에 축제를 망친 지역이 많았다. 이렇게 기후 위기가 우리 가까이에 와 있다.


결전의 날, 일찌감치 새벽에 일어났다. 발가락은 괜찮았는데 몸이 찌뿌둥했다. 순천에서 달린 뒤 생긴 왼쪽 발바닥 물집이 신경 쓰였다. 오른쪽 발가락이 아프니 달릴 때 균형이 깨지면서 생긴 물집 같았다. 순천과 경주에서 과식을 한 탓인지 위장 상태도 썩 좋지 않았다. 그래도 포기할 순 없었다.

대회 주최 측에서 보내준 핫핑크 티셔츠를 입고 출발지로 이동했다. 1만 명이 넘는 인파로 북적북적했다. “살아서 만나자!” 아내와 파이팅을 외치고 헤어졌다. 아내는 10km, 나는 하프 코스여서 출발 시간이 달랐다. 스타트 라인으로 이동했다. 지금까지 달려봤던 7km, 12km 대회와는 확실히 분위기가 달랐다. 러너들의 복장도 달랐고, 하체 근육도 달랐다. 재미 삼아 온 사람은 없어 보였다. 탕, 출발 신호가 울렸다.


초반 페이스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의외로 몸이 가벼웠다. 주황색 아식스 민소매 티셔츠를 입은, 그러니까 달리기 구력이 꽤 있어 보이는 60대 추정 아저씨를 페이스메이커 삼아서 달렸다. 이번 대회에는 단체 티셔츠를 입은 달리기 동호회 사람이 많았는데 대체로 속도가 빠르지 않았다. 한 명 한 명, 한 그룹, 한 그룹을 추월하는 재미가 컸다. 애플워치를 확인했다. 1km에 4분 30~40초 페이스. 평소보다 많이 빠른 속도였다. 5km까지는 괜찮았는데 조금씩 힘이 부치기 시작했다. 아저씨와 보조를 맞추는 게 점점 힘들었다. 안 되겠다 싶어서 6-7km 즈음 아저씨를 보내드렸다. 그리고 속도가 쭉쭉 떨어졌다. 이렇게 페이스 조절을 엉망으로 할 거면 애플워치를 왜 찬 걸까?


우려했던 상황이 벌어졌다. 왼발바닥 물집과 오른쪽 발가락, 부상 부위가 번갈아 가면서 나를 괴롭혔다. 초반부에 제쳤던 주자들이 다시 등 뒤에서 나타나 멀찌감치 사라져 갔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힘을 짜낼 수 없었다. 체력이 바닥난 건 아닌데 몸 곳곳에 속도 제한 장치를 걸어둔 것 같았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걷지 않았다. 기어이 경주시민들의 박수를 받으며 피니시라인을 통과했다. 잔부상과 작전 실패가 뼈아팠지만 인생 첫 하프마라톤을 완주한 걸로 만족했다. 골인 지점에서 먼저 10km를 뛰고 기다리던 아내와 부둥켜안았다. 이쯤되면 마라톤 풀코스 아마추어 부문 동메달이라도 딴 것 같지만 기록은 1시간 57분. 중하위권이었다.

완주를 하는 데는 음악이 큰 힘이 됐다. 내내 스포티파이 앱으로 노래를 들었다. BPM 100~120 정도의 너무 빠르지 않은 록과 팝 30곡으로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었다. 시작부터 음악과 분위기가 찰떡궁합이라 기분이 좋았는데 안개 낀 보문호에서 3호선 버터플라이의 ‘깊은 밤 안갯속’이 흘러나왔다. 남상아 누님의 몽환적인 목소리가 눅눅한 아침 공기에 녹아들었다.


10km 반환점을 앞두고 속도가 처질 때 힘을 실어준 노래는 본조비의 Livin on a prayer였다. 기타 전주가 나오는 순간부터 다리에 부스트가 걸린 듯했다. 실제로 속도가 빨라졌을 리는 없고 아드레날린이 솟구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미친 사람처럼 후렴구 “오오, 리빙 온 어 프레어!”를 외치며 반환점을 돌았다. 후렴 가사가 이렇다. Oh oh, we're half way there. Oh oh, livin' on a prayer Take my hand, we'll make it I swear 그러니까 진짜로 반환점을 돈 순간에 절반이나 왔다고, 고생했다고 격려해주는 노래라니.


4분의 3 구간에서는 U2의 I still haven't found what i'm looking for가 함께했다. 알 사람은 알 테다. BPM 100도 안 되는 보통 빠르기의 곡이다. 속도가 최저로 떨어진 지점에서 U2 형님들이 비슷한 속도로 함께 달리는 느낌이 들었다. 오르막길에서는 “I have climbed highest mountains I have run through the fields only to be with you” 이 가사가 사무쳤다.

작년에 촬영한 보문호 벚꽃길. 저길 달렸다는 게 꿈만 같다.

도착지점을 앞두고는 나의 달리기 최애송 Crusaders의 Way back home이 흘러나왔다. 이 노래 역시 보통 빠르기의 심플한 연주곡인데 달리면서 들으면 환희의 찬가 같다. 없던 힘을 짜내 한걸음 한걸음 더 뻗을 수 있게 되고 몸이 가벼워지는 묘한 효과를 얻는다. 하프 코스가 20km인 줄 알았는데, 1km가 더 남아서 좌절이 몰려온 시점에 이 노래가 날 살려줬다.


벚꽃마라톤답게 달리면서 벚꽃은 원 없이 봤다. 산책하면서 차분하게 꽃을 감상하거나 꽃밭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서 피크닉을 즐길 때와는 다른 차원이었다. 그러니까 순천에서도 느꼈던 건데, 빠르게 벚나무 아래를 달리니 꽃의 생김새는 자세히 볼 수 없지만 느린 셔터 속도로 사진을 찍으면 사물이 흐리고 번진 결과물을 얻는 것처럼 뭔가 몽환적인 이미지로 그 풍경이 가슴에 남는다. 꽃비 맞으며 달리다가 입속으로 꽃잎이 들어오기도 했는데 씹어보니 달큼하더라. 달리면서 꽃도 먹는 마라톤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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