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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결맘 Nov 17. 2023

0 발견하면 사라진다

‘분명히 기분이 안 좋을 이유가 없는데…’


아이가 수영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시간이다. 내일까지 데드라인인 프레젠테이션 원고 준비를 중간에 멈추고 컴퓨터를 그대로 켜둔 채 서둘러 집에 돌아갈 채비를 한다. 11월 중순을 지나고 있는 요즘은 오후 6시면 완전히 어둠이 내려앉는다. 깜깜해진 거리로 나왔는데 어제보다는 바람의 찬기가 덜하다. 캐시미어 목도리가 약간 덥게 느껴질 정도다. 내일부터는 목도리를 하지 않고 다녀도 되겠다고 생각하며 바쁘게 걸음을 옮기는데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들어서 마음이 가볍지 않다.


돌덩이처럼 나를 짓누르는 무게감은 아닌데, 누군가 나의 허벅지를 약하게 꼬집고 있는 느낌이다. 프레젠테이션 준비도 순조롭게 되고 있고, 저녁에 먹을 감자고추장찌개 레시피도 우리의식탁 앱에서 찾아놨고, 재료도 점심 때 즈음 이마트에서 사다가 냉장고에 채워 놓았다. 평소보다 퇴근 시간이 약간 늦어지긴 했지만, 지금 집에 도착해서 요리를 시작하면 7시에는 저녁밥을 완성할 수 있다.  


오랜만에 많은 사람들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게 걱정되고 떨리는 건가? 다들 나를 응원하는 사람들이고, 준비도 충분히 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을 거다. 게다가 나만의 목소리가 담긴 이야기를 써보기로 결정한 이후 아침마다 글을 쓰면서 뿌듯함에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을 느끼지 않았던가. 지금까지 업무에, 육아에, 집안일에, 운동에 시간이 빠듯해서 돈을 받고 쓰는 글 말고 내 글을 쓸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말이다. 무언가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내가 기특해 여의도 화목순대국에서 자축 파티도 했는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무언가 나의 기분에 변화가 있다면 가장 먼저 이를 느끼는 사람은 단연코 우리 아들이다. (공대 출신인 남편은……..) 수영 수업에서 돌아와 종알종알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는데 엄마의 눈빛과 표정이 미세하게 부자연스러운 것을 이 아이는 캐치한다. 눈 맞추는 시간이 평소보다 아주 조금 줄어들고 수영 용품정리하기나 집에 돌아오면 샤워하기 같은 규칙들도 아주 조금 더 잘 지키는 편이다. 이 아이와 있으면 정녕 fMRI가 필요 없다. 나의 뇌 활동이 투명하게 공개되는 바로미터가 바로 아들의 반응이다.


우리의식탁 앱의 레시피로 요리한 감자고추장찌개는 정말 눈이 번쩍 뜨이게 맛있었다. 강추다. 레시피에는 없지만 나는 묵직한 맛을 위해 찌개용 돼지고기 앞다리살을 추가하긴 했다. 남편이 식탁을 정리하고 식기세척기에 그릇을 정리하는 동안 나는 소파에 앉아서 계속 내 마음을 모니터한다. 무언가 석연치 않은게 분명히 있는데 미끈한 해삼처럼 계속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엄청난 괴로움은 아니지만 나의 자연스러운 움직임과 마음 작용에 약 0.5초씩 딜레이를 주고있다. 컬리로 내일 아침 샌드위치 재료인 식빵과 닭가슴살, 레몬을 주문하면서 생각해본다. 그런다가 갑자기 팟! 하고 무언가 떠올랐다. (잡았다 요놈!)


‘아, 브런치 작가 지원하기로 결정한 게 부담스러웠구나!’


나는 사람들이 내가 특별히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부분을 혹평할 때는 아무리 가혹한 평가라도 크게 마음의 부침 없이 잘 받아들이는 편이다. 하지만 내가 평소에 잘 한다고 생각하는 지점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더 많은 저항이 느껴지고 거부감이 든다. 브런치 작가 지원도 마찬가지다. 지난 번에 지원했다가 탈락해서 한동안 의기소침 했었는데… 명색이 글로 밥 벌어먹는 사람인데... 다시 한번 도전하기로 마음 먹으니 그 때의 기억이 떠올라 마음이 불편했던 거다. 유레카! 드디어 문제의 원인을 알았다. 잘 잡히지 않는 머리카락을 몇 번의 시도 끝에 집는데 성공했을 때와 같은 쾌감이 밀려왔다. 그리고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점점 멀어져 가는 사람의 목소리처럼 그런 무거움이 조금씩 내 마음 속에서 사라져갔다. 나는 다시 자연스러운 움직임과 마음의 상태로 돌아갔다. 오예!


발견하면 사라진다.

이것이 내가 나를 사랑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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